김고은 기자 2014.12.03 13:46:05
“혁신적인 기업들은 먼저 당신 회사의 시장과 고객을 빼앗고, 다음으로 인재들을 빼앗고 모든 자산까지도 빼앗을 것이다.” 세계적인 경영 전략가 게리 하멜 교수의 말이다. 지금 지상파 방송사는 딱 중간 위치쯤에 있다. 시청자들이 떠나고, 유능한 제작진이 떠나고, 광고주들마저 등을 돌리고 있다. ‘지상파 독과점’도, ‘콘텐츠 왕국’도 다 옛말이다. 미디어환경 급변으로 지상파는 수많은 채널들 가운데 ‘원 오브 뎀’이 된 지 오래다. 난공불락 같던 지상파의 기세가 꺾인 것은 지상파 스스로 자초한 탓도 있지만, 수많은 정책결정의 결과라는 사실 또한 명약관화하다. 줄 듯 말 듯 지상파를 쥐락펴락하는 주파수 정책이 대표적인 사례 중 하나다. 과연 ‘공룡’ 지상파는 이대로 빙하기를 맞고 멸종할 것인가. 전통 미디어의 강호로서 연착륙에 성공할 것인가. 출구가 안 보이는 지상파 위기를 플랫폼과 콘텐츠, 신뢰의 관점에서 3주에 걸쳐 살펴보고 현실 가능한 대안과 가능성을 찾아본다.
지상파의 위기를 보여주는 통계는 많이 나와 있다. 대표적인 것이 광고 매출이다. 2011년을 기점으로 하락 추세인 지상파 TV광고 매출은 2012년 처음 인터넷에 1위 자리를 내준 이래 재역전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한국방송광고진흥공사에 따르면 지난해 국내 전체 광고시장은 2012년 대비 2.9% 성장했는데 지상파는 3.2% 감소했다.
‘2014 방송산업실태조사’ 결과 역시 마찬가지다. 2013년 방송사업매출은 14조 347억원으로 전년 대비 6.3% 증가했지만, 지상파방송만 홀로 1.6%(629억원) 감소했다. 전체 광고 시장에서 차지하는 점유율 역시 59.6%로 하락세가 지속됐다.
시청층 고령화도 문제다. 닐슨코리아 자료에 따르면 KBS2TV, MBC, SBS 등 지상파 3개 채널 평균 시청연령은 2003년 38세에서 2013년 46세로 10년 사이 8세나 늙었다. 지상파 시청층의 고령화는 화장품 광고 매출 변화에서 단적으로 드러난다. 지난달 21일 대한상공회의소에서 열린 미디어경영학회 정기학술대회에 발표자로 참여한 서지희 KBS 플랫폼개발부장은 “20~39세 여성들이 지상파를 떠나 케이블로 옮겨가면서 지상파 광고비가 줄어들고 케이블 광고비는 늘어나고 있다”면서 “2013년 화장품 광고주의 케이블 광고비는 지상파의 3배 수준으로 집행됐다”고 밝혔다.
지상파의 줄어든 파이는 유료방송을 살찌웠다. 케이블과 위성방송, IPTV는 광고 매출, 방송사업매출 모두 지상파와 반대로 상승세다. 가입자도 늘고 있다. 지난해 유료방송 가입자는 IPTV 가입자의 큰 폭 증가에 힘입어 전년 대비 9.9%나 증가했다. 반면 지상파 직접수신가구 비율은 꾸준히 줄어 2013년 말 기준 6.8%에 불과하다. 대다수의 가구가 유료방송을 통해 지상파를 보고 있는 것이다. ‘무료 보편적 서비스’라는 지상파의 개념 수정도 불가피해졌다.
미디어 이용 행태도 달라졌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안방이나 거실에 앉아 TV를 보는 대신 다양한 N스크린 기기를 통해 시청한다. 이런 시청 패턴 변화를 반영해 KBS가 지난해 수신료 인상안을 처리하며 수신료 부과 대상을 ‘TV수상기’에서 스마트폰과 같은 ‘수신기기’로 전환하려다 거센 역풍을 맞고 물러서기도 했다. KBS의 항복으로 일단락됐지만 미디어 이용 행태 변화와 ‘제로TV 가구 증가’라는 시대적 변화에 대한 지상파의 위기감을 단적으로 보여줬다.
기존의 지상파 역할을 많은 부분 유료방송이 대체하면서 지상파 플랫폼에 대한 회의론도 고개를 들고 있다. 우선 직접수신 환경 개선을 나 몰라라 한 지상파 스스로의 책임 탓이 크다. 난시청 문제 해결을 케이블TV에 맡겨두고 책임을 방기한 역풍을 뒤늦게 맞고 있는 셈이다. 지상파 한 관계자는 “지상파 사업자 스스로 그동안 콘텐츠의 중요성만 강조하고 유통과 네트워크의 중요성을 간과한 책임도 있다. 직접수신과 네트워크를 강조하는 내부의 목소리를 무시하고 그런 사람들을 정책 결정 과정에서 배제해온 결과”라고 꼬집었다.
지상파도 변명할 여지는 있다. 지상파 콘텐츠를 공짜로 줘서 케이블을 빠른 속도로 시장에 안착, 성공시킨 것은 정부당국의 정책결정의 결과였다. 덕분에 케이블TV는 저렴한 가격으로 손쉽게 가입자를 유치할 수 있었다. 지상파 디지털 전환 과정에서 실내수신이 상대적으로 어려운 미국식 전송방식으로 결정하고, 수신환경 개선 없이 급한 불 끄듯 2012년 아날로그 방송을 종료한 것도 물리적으로 직접수신율 확대를 어렵게 했다는 지적이다.
게다가 정부의 미디어정책은 점점 통신, 산업 위주로 가고 있다. 박근혜 정부는 지난해 연말 방송의 공공성보다 산업으로서의 성장전략에 초점을 맞춘 ‘방송산업발전종합계획’을 발표했다. 이후 방통위가 지상파 등의 ‘규제’ 업무에 신경 쓰는 동안 미래부는 유료방송과 통신 산업 중심의 ‘진흥’ 정책을 폈다. 차세대방송 서비스인 UHD(초고화질) 방송도 유료방송이 먼저 상용화를 시작했다. 최근 미디어업계 뜨거운 감자인 700㎒ 주파수 대역 배분에 대해서도 미래부는 ‘경제적 효과’ 등을 강조하며 사실상 이동통신사 쪽에 주자는 논리를 펴고 있다. 심지어 지역 방송 권역을 무시하는 발언도 미래부 고위 공무원 입에서 나왔다. 만일 700㎒ 대역 주파수 확보에 실패할 경우 지상파는 UHD 방송을 할 수 없게 되고, 결과적으로 지상파는 수많은 PP 중 하나로 전락하게 될 것이란 우려가 크다.
지상파 지원 정책도 번번이 ‘특혜’ 논란에 휘말려 좌초되기 일쑤다. 3기 방통위가 지상파 MMS, 광고총량제 허용 등을 포함한 정책 방향을 발표하자 당장 종편 소유의 신문과 케이블 업계 등이 “지상파 특혜”라고 반발하며 철회를 요구했다. 중간광고 도입 역시 유료방송 업계는 물론 시청자단체의 반발이 거센 형국이다. 지상파가 ‘콘텐츠 제 값 받기’를 요구하고 있는 유료방송 업계와의 재송신 대가 산정 협상 역시 녹록지 않은 상황이다. 방통위는 아예 법을 고쳐 재송신 협상에 직접 개입하겠다는 뜻을 밝혀 지상파로선 입장이 더 불리해진 처지다.
지상파 내부 관계자들은 재원의 위기가 지상파의 위기를 가속화 할 것이라고 입을 모은다. 재원이 부족해지면 콘텐츠 투자가 힘들어지고, 그러면 콘텐츠 품질이 떨어져서 시청자가 외면하는 악순환이 계속 될 것이란 지적이다. 때문에 광고제도 개선이나 지상파 콘텐츠 제값받기 등을 통해 지상파가 양질의 콘텐츠를 제작할 수 있는 최소한의 재원 기반을 마련해줘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지상파 한 관계자는 지상파 ‘홀대’ 정책은 결국 시청자 피해로 연결될 것이라고 지적한다. “지상파 시청률이 떨어졌다지만 여전히 매일 저녁 전체 1900만 가구 중 약 30%가 지상파 3사 뉴스를 시청한다. 지상파는 법률적으로나 사회적으로도 많은 규제를 받고 있고, 상당 부분 사회 안전성과 건강성을 유지하는 기능을 한다. 이런 지상파를 무너뜨렸을 때 미디어가 갈 수 있는 길은 종편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