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S의 문창극 전 국무총리 후보자 검증 보도가 우여곡절 끝에 중징계를 피했다. 방송통신심의위원회는 4일 전체회의를 열고 “일제 식민지배는 하나님의 뜻”이라는 문창극 전 후보자 교회 강연을 보도한 KBS ‘뉴스9’에 대해 방송심의에 관한 규정 9조(공정성)1항과2항, 14조(객관성) 위반을 적용해 행정지도인 ‘권고’를 의결했다. 방심위는 “국민의 알권리 및 공직 후보자 검증 보도에 대한 언론의 역할 등을 고려하고 위원회 합의제 정신에 대한 인식을 함께 한다”며 전원 합의로 이 같이 의결했다.
당초 방통심의위 산하 방송심의소위원회는 지난달 27일 KBS 보도에 대해 법정제재 중에서도 중징계에 해당하는 ‘관계자 징계’(벌점 4점)를 다수 의견으로 전체회의에 상정한 바 있다. 4일 전체회의에서도 정부여당 추천 위원들은 KBS 보도에 문제가 있다며 법정제재를 주장했으나, 징계 수위를 두고 의견이 엇갈렸다. 결국 여야 위원들은 4시간30분에 걸친 마라톤 회의 끝에 합의제 원칙을 지켜야 한다는데 인식을 같이 하고 전원 일치 의견으로 ‘권고’를 의결했다. 권고는 재승인 심사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 행정지도성 조처다.
여당은 '낮추고' 야당은 '높이고' "합의의 전통을 만들었다"
‘관계자 징계’부터 ‘문제없음’까지 상반된 의견의 논쟁적인 사안에 대해 이처럼 전격적인 합의가 이뤄진 것은 극히 이례적인 일이다. 이 같은 ‘반전’에는 이번 문창극 보도 심의를 둘러싸고 방심위 해체론과 무용론까지 제기될 정도로 거세게 일었던 비난 여론이 일부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조직의 위상 자체가 흔들린다는 위기감을 느낀 것이다. 최근 여야가 정치적으로 대립하고 있는 상황에서 방심위가 앞장서서 합의 정신을 살려야 한다는 공감대도 컸다.
당초 이날 회의에선 앞서 방송심의소위에서 ‘관계자 징계’ 의견을 냈던 김성묵 부위원장, 함귀용 위원, 고대석 위원을 포함해 박효종 위원장까지 “KBS의 문창극 보도는 편집권을 크게 오남용했다”며 ‘관계자 징계’를 주장했다. 그러나 같은 정부여당 측인 하남신, 윤석민 위원은 법정제재 중 가장 낮은 수위의 ‘주의’(벌점 1점)를 주장했다. 하남신 위원은 “교회라는 특수하고 제한된 공간에서 기독교적 언어로 종교적 관점에서 구한말 역사와 시대상을 얘기한 것을 총리 후보자의 민족관과 역사관을 검증하는 대상으로 삼은 것은 적절치 않았다”면서도 “언론의 검증 기능을 심하게 위축시켜선 안 되므로 관계자 징계는 과하다”며 이 같이 주장했다.
윤석민 위원 또한 “정상적인 일반 시청자 눈에서 볼 때 친일, 민족 비하 발언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게 만드는 보도 내용”이라고 지적하면서도 “최근 여야 정치권이 세월호 특별법을 두고 극한의 대립을 보이는 상황에서 사회 분열이나 또 다른 갈등을 야기해선 안 된다”면서 마찬가지로 ‘주의’ 의견을 냈다.
‘관계자 징계’ 4명, ‘주의’ 2명, ‘문제없음’ 3명으로 어느 의견도 의결정족수를 채우지 못한 상황. 그러자 박효종 위원장은 미리 준비해온 장문의 원고를 읽은 뒤 “합리적인 불일치도 합의제정신의 일종”이라고 주장하며 법정제재 의견을 낸 위원들만을 중심으로 제재 수위 조절을 시도했다.
이에 야당 측 윤훈열 위원이 “이게 무슨 합의고 토론이냐”고 항의했고, 박신서 위원도 “다수결로 몰아가기 위한 합의로밖에 생각되지 않는다”며 “이런 의사 진행에는 동참할 수 없다”고 밝혔다. 윤훈열 위원도 “밤을 새서라도 토론해서 합의를 유도하려는 노력이 중요하다”며 “이런 식의 회의 진행이라면 항간에 논의되는 방심위 무용론 해체론과 관련해 저 또한 중심에 설 수밖에 없다”고 엄포를 놓았다. 야당 측 상임위원인 장낙인 위원은 이에 앞서 오후 6시경 징계 시도에 반대하며 퇴장했다.
그러자 가장 강력하게 중징계를 주장했던 함귀용 위원이 나서서 중재를 시도했다. ‘관계자 징계’에서 제재 수위를 낮출 테니 야당 위원들도 ‘문제없음’에서 일부 조정해 줄 것을 제안한 것이다. 결국 20여분간 휴회한 끝에 8명의 위원들은 전원 일치로 ‘권고’를 결정했다.
윤석민 위원은 “개인의 양심과 소신에 대해 조금씩 타협해야 했지만, 합의의 전통을 만들었다는 의미가 크다”고 높이 평가했다. 박효종 위원장은 “방심위가 도덕적 권위를 가지려면 진정한 합의제 정신으로 운영돼야 한다”면서 “3기 방심위가 앞으로 나갈 이정표를 제시해줬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나머지 위원들도 박수로 만족감을 나타냈다.
"보도는 문제…한 개인의 인생 망쳤다"
하지만 방심위가 KBS 보도에 문제가 없다고 본 것은 아니었다. 이날 여당 추천 위원들은 KBS 보도에 대해 “사상검증”, “인격살인”이라며 강한 어조로 비판했다. 회의에 앞서 KBS측 요청으로 이뤄진 추가 의견진술에서 용태영 KBS 보도본부 주간이 “문 후보자가 교회 강연 등에서 일관되게 왜곡된 역사인식을 드러냈고, 이를 가장 적확하게 드러낼 수 있는 발언을 편집해 보도한 것”이라며 정당한 권력 비판 감시 보도라고 주장했지만, 여당 측 위원들은 KBS를 크게 나무랐다.
특히 공안검사 출신인 함귀용 위원은 “일부 문제의 소지가 될 만한 발언만 편집해 잘못 보도함으로써 문창극 후보자 개인이 회복할 수 없는 피해를 입었다”며 “객관성과 공정성이 결여된 보도로 한 개인의 인생이 망가졌다”고 힐난했다.
윤석민 위원도 “KBS라는 실로 영향력이 막강한 공영방송이 정상적인 상식을 가진 사람이 용인할 수 없는 방향으로 친일, 민족 비하적 인물로 강조해서 보도하는 것이 과연 언론의 막중한 책무로 정당화 될 수 있는 일인가”라고 비판했다.
박효종 위원장은 “총리 후보자 검증과 국민의 알권리도 중요하지만 일방적으로 강연 자료를 선택해 짜깁기, 편파 보도함으로써 개인이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입고 시청자를 오인하게 만들어 과도한 사회 분란을 일으킨 데 대해 누가 책임져야 하냐”고 말했다. 또한 “불편부당한 언론인이 한 순간에 친일파라는 왜곡된 이미지로 전락하고 한 개인의 인권을 심각하게 침해했다”며 “편집권을 오남용한데 대해 엄중하게 책임을 물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반면 야당 위원들은 KBS 후속으로 문창극 강연을 보도한 SBS와 종편 등 19개사에 대해 방심위가 얼마 전 ‘문제없음’ 또는 행정지도를 내린 조처 등과 비교할 때 형평성에 맞지 않다며 ‘문제없음’을 주장했다. 장낙인 위원은 방심위가 내린 법정제재들이 법원에서 잇따라 뒤집힌데 대해 자성을 촉구하기도 했다.
한편 이날 전체회의를 앞두고 전국언론노조·한국PD연합회·방송기자연합회 등 언론·시민단체들은 기자회견을 열고 문창극 강연 보도에 대한 방심위의 이중 잣대와 ‘표적심의’를 비판하며 방심위 해체 투쟁에 나설 것을 경고한 바 있다. 이들은 “KBS 보도에 대해 징계를 내린다는 것은 정부의 잘못을 감시하고 지적해야 하는 언론의 ‘감시견’ 기능을 무력화시키고 사실상 방송을 검열하겠다는 것이나 마찬가지”라며 “언론의 논리가 실종되고 정치의 논리만이 활개 치는 방심위라면 더 이상 존재할 이유도 가치도 없다”고 밝혔다.
언론개혁시민연대도 이날 논평을 통해 “박근혜 대통령을 위해 선거운동을 펼쳤던 사람이 박근혜 대통령의 인사를 검증하는 보도를 심의하고, 정부를 감시하고 비판하는 보도를 징계하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되는 일”이라며 “KBS 문창극 보도에 대한 중징계는 위헌이며, 반헌법적”이라고 비판했다. 권오훈 전국언론노조 KBS본부(새노조) 위원장도 “징계가 내려질 경우 위헌 소송 제기 등 모든 수단을 동원해 싸울 것”이라며 “앞으로 방심위의 모든 심의와 결정을 반대한다”고 경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