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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종철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 위원장(왼쪽)과 우장균 YTN 해직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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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명의 선후배가 만났다. 나이도, 얼굴도, 소속도 다르지만 이들의 공통점은 하나다. 바로 ‘해직기자’라는 이름.
1975년 엄혹했던 유신시절 김종철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동아투위) 위원장은 동아일보 기자로 동료들과 함께 자유언론실천운동을 벌이다 해고됐다. 올해로 39년째, 어느새 고인이 된 18명을 포함해 112명의 동료들과 함께 복직되지 못했다.
세상은 달라졌지만 해직기자는 여전히 있다. 지난 2008년 YTN에서는 정권에 의한 낙하산 사장 반대 투쟁이 벌어졌고 그 과정에서 우장균 기자도 5명의 기자들과 함께 해고됐다. 어느새 만 6년이 돼가지만 지금까지 제자리로 돌아가지 못하고 있다. 30여년의 세월을 훌쩍 뛰어 넘은 해직기자 선후배가 마주했다.
<김종철 위원장>
평생 복직 안될거라고 상상도 못해
40년 한결같은 요구는 명예회복과 복직
KBS 길환영 사태 보며 ‘기레기’ 극복 희망 발견
언론인 왜 선택했는지 고민하며 직분에 충실해야
<우장균 해직기자>
지키고자 했던 건 기자로서 자존심
직업인 양심 지키게 한 시대에 오히려 고마움 느껴
계속되는 방송장악 시도, 보수정권 영구집권 전략
해고로 여론 안 좋아지자 정직·위협 등 방법 동원사회=두 분은 해직기자라는 공통점이 있다. 펜과 마이크를 빼앗기며 무엇을 말하고자 했는가.김종철=1975년 3월12일, 우리는 제작거부에 돌입했다. 1974년 10월24일 자유언론실천선언의 연장선이었다(기자협회 동아일보 분회가 주도한 선언은 언론의 자유로운 활동을 주창하며 외부간섭 배제, 기관원 출입 거부, 언론인 불법 연행 거부 내용을 담았다). 선언은 유신체제에 대한 도전으로 비춰졌고, 박정희 정권은 중앙정보부를 동원해 동아일보 광고를 탄압했다. 1975년 2월에는 박 정권이 유신헌법에 대한 신임투표를 하며 일종의 계엄령 분위기를 조성했다. 회사는 그해 3월8일 경영이 어렵다며 기구축소를 이유로 18명을 해임했고 이에 항의하는 기자들을 10일, 12일 잇따라 무더기로 내쫓았다. 당시 동아일보와 동아방송, 신동아, 여성동아 등 160여명이 쫓겨나 최종 113명이 해직됐다. 현재 18명이 고인이 됐고 95명이 살아 있다. 이렇게 평생 복직이 되지 못하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후회한 적은 없다. 민주화 운동이었고 민족운동이었다.
우장균=말하고자 했던 것보다 지키고자 했던 것이 있었다. 기자로서, 언론인으로서의 자존심이었다. 2008년 이명박 대통령이 자신의 정치특보이자 고등학교 후배인 구본홍씨를 YTN 사장으로 임명하자 부당함에 노조는 반발했다. 청와대 출입기자였던 저는 직접 참여하지 못했지만 후배들의 입장을 존중했다. 하지만 정권이나 사측은 당연히 청와대 반장이 자신들 편이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으니 실질적인 배후 조종자라고 인식했다. 약간의 회유도 있었다. 현재 청와대 홍보수석인 윤두현씨가 정치부장이 됐는데, 이명박 대통령 해외 순방을 보고하면서 구 사장에 찍힌 제가 가기 힘들 테니 조치를 취해달라고 했더니 ‘갈 수 있다’는 말을 계속했다. 고민도 잠시 했지만 초심을 돌아보니 보도국장이나 정치부장을 하려고 언론인이 된 것은 아니었다. 해직 사유는 ‘대통령 순방 취재를 원활하게 하지 못한 책임이 있다’는 것인데 결국 투쟁과 시위를 ‘실질적으로 주도했다’는 혐의였다.
사회=해직 통보를 받았던 당시 상황과 심정은.김종철=동아일보사(현 일민미술관) 2층 공무국에서 23명의 기자들이 단식투쟁을 하고 있었는데, 3월17일 새벽 3시경 회사가 폭력배 200여명을 동원해 우리를 쫓아냈다. 해머와 전기톱, 몽둥이를 들고 쇠문을 부수며 습격한 이들에 상대가 될 수 없었다. 마지막으로 총회를 하고 만세를 부르고 빠져나왔는데 그날따라 부슬비가 내리더라. 나오는 순간 유신체제에서 박정희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절대 들여보내주지 않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밖에 있던 천관우, 문익환 선생 등 재야인사들 수십 명과 부둥켜안았는데 처참한 기분이었다. 신문회관(현 프레스센터)에 모여 3월18일 동아투위를 설립했다. 참담하긴 했지만 후회하진 않는다. 앞서 1974년 3월8일 동아일보 노조 설립 당시에는 집행부가 해임된 후 1차대책위에 참여했다가 해직을 당했다(언론사 최초 노조로 33명을 발기인으로 한 출판노조 동아일보 지부가 탄생했다). 언론사 통념상 기자들이 노조를 만들면 최소 사형 내지 무기징역을 받는다고 엄두도 못 내던 때였다. 한 달 만에 복직했고 곧이어 10·24 자유언론실천선언을 발표했다.
우장균=2008년 10월6일 오후 4~5시쯤 정유신 기자로부터 전화가 왔다. 오후 6시경 방이 붙는데 선배가 미리 알아야 될 것 같다고 했다. 6명이 해고인데 그중 제 이름이 있다는 것이었다. 청와대 춘추관에 있었는데 KBS와 SBS 청와대 방송반장들에게 해고사실을 알렸더니 황당해했다. 몇몇 후배들도 그럴 리 없다는 거다. 당시 이동관 수석 아래 행정관이 YTN사태로 해고는 한명도 없을 거라고 했단다. 경미한 정직 정도 예상했는데 굉장히 당혹스러웠다. 사실 실감은 안 났다. 새벽 1시쯤 집에 들어가 아버지와 어머니, 아내와 아들딸의 잠든 얼굴을 보니 그때야 실감이 나더라. 이명박 정권 초기였고 앞으로 5년이 남았는데 이 정권에선 쉽게 복직이 안 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뭘 먹고 살아야 할지, 20년 언론인 생활을 접고 새로운 삶을 살아야하는 건지 여러 생각에 그날 밤 잠을 못 이뤘다.
사회=해직 이후 많은 어려움이 있었을 것 같다.김종철=해직 후 3월17일부터 9월17일까지 6개월간 매일같이 동아일보로 출근해 사옥 앞에 서 있었다. 출근하는 사람들은 우리를 보고 얼굴을 못 들거나, 뻔뻔하게 지나갔다. 사옥에서 신문회관까지 행진하며 구호를 외치고 대학, 사회단체에 유인물을 배포하기도 했다. 개신교와 천주교 사제단 등에서 성금을 걷어 몇 달간 월급의 반 정도를 줬다. 하지만 3분의 2 이상이 가장이었기 때문에 6개월 되던 때 취업을 결정했다. 저는 독신이었지만 홀어머니에 동생이 5명이었다. 그러나 박정희 정권에서 취업불가로 동아투위, 조선투위 출신 기자들에게 좌익 등급을 매긴 것 같았다(실제 2000년 보안사 내부 문건이 공개됐다). 옥고는 3번 치렀다. 1978년에는 민권일지 사건으로 구속됐다(동아투위는 1977년 10월부터 1978년 10월까지 1년간 제도언론에서 보도되지 않은 민주인권 관련 125건을 모아 1978년 10월24일 발표했고 정권은 긴급조치 9호로 10명을 구속했다). 나중에 공소장을 보니 제가 한 동아투위 위원이 유인물을 읽는 걸 어깨너머로 따라 읽었다는 혐의였다. 당시 안종필 위원장과 제가 2년6개월로 가장 높은 형을 받았고, 1979년 12월14일 13개월을 산 후 나오니 12·12사태가 일어나 있었다.
우장균=만 6년이 두 달 남았다. 그동안 많은 경험을 했다. 실체적 민주주의가 된 상태에서 21세기 해직기자들은 선배들처럼 옥고를 치르거나 고문을 당하진 않았다. 민주화를 경험했고 그만큼 시민의 힘이 커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1~2년 만에 해결될 줄 알았던 것이 어느덧 6년이 됐다. 아내는 저보다 더 씩씩한 여성이기 때문에 닦달한 적이 없다. 다만 아버님이 재작년에 돌아가셨는데, 안타까운 것은 해직기자 6명 중 3명의 부친이 아들의 복직을 보지 못하고 돌아가셨다. 81세인 어머니가 계시는데 51살 아들의 해직 모습을 보여드리는 것이 마음이 가장 안 좋다. 후회한 적은 한 번도 없다. 오히려 변변치 못한 제게 직업인으로서 양심을 지키게 해준 시대와 상황에 고맙다. YTN은 ‘희망펀드’ 등 노조에서 지금까지 월급을 보전해주고 있어 자존심을 지킬 수 있는 중요한 물적 토대가 됐다.
사회=39년째 동아투위에 대한 명예회복과 보상이 요원하다. YTN도 6년째에 접어들었다.김종철=요구는 복직과 배상이다. 해직 직후 부당해고 소송을 했는데 유신시대 법정에서는 ‘이유없음’으로 기각됐다. 본격적인 소송은 2008년 10월말에 했다. 진실과 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에서 박정희 정권이 동아일보 광고 탄압과 기자 강제 해직을 했다며 정부와 동아일보사가 동아투위의 명예를 회복시키고 배상하라는 권고 결론이 나왔다. 34년 만에 정부기구에서 처음이었다. 통보를 받은 날 정부와 동아일보를 상대로 위자료 배상 소송을 냈다. 1심에서 패소했고, 2심에서는 정부의 부당 압력에 의한 해고 사실은 인정하지만 ‘시효’가 지났다고 판결했다. 대법원에 상고했는데 2년이 지나도록 조용하다. 박근혜 대통령도 긴급조치 피해자에 보상을 한다더니 감감무소식이다.
우장균=대법원에서 5년째 계류 중이다. 2008년 1심에서는 6명 전원 해고무효가 선고됐지만, 2009년 2심에서 3:3으로 해고 무효와 정당이 갈렸다. 복잡하지 않은 사안인데 사법부가 판결을 기피하고 있는 것 같다. 내년 3월 YTN 사장이 바뀌는데 정권이나 새 사장이 화해의 차원에서 복직시킬 수 있다고 본다. 아니면 새 정권 차원에서 해결할 수 있는 문제다.
사회=2014년 8월 현재 YTN·MBC 등 언론인 16명이 여전히 해직상태다.우장균=1987년 실체적 민주주의를 획득한 직후 바로 민주정권이 들어서지 못했다. 10년 후 우여곡절 끝에 수평적 교체를 이뤘는데 보수정권 입장에서는 언론을 제대로 통솔, 장악하지 못한 거다. 특히 영구집권을 위해서는 대중적 영향력이 강한 KBS, MBC, YTN 등 방송을 장악해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른바 ‘겁주기 효과(Chilling effect)’다. 정권이 사장을 임명하는 방송사라는 공통점이 있는데 사장을 통해 내부를 장악하면 시민들의 의식을 깨우는 방송이 없을 거라는 계산이다. 제대로 된 PD수첩, 돌발영상이 안 나오지 않는가. 해고로 여론이 좋지 않다보니 이제는 정직을 시키고 노조를 위협하는 등 교묘한 수를 쓰고 있다.
김종철=인사권이나 편성, 제작권의 문제다. 기자뿐만 아니라 PD, 아나운서 등 언론인들은 각광받는 자리에 있기를 바란다. 기자사회도 빛이 나는 곳을 선호하고 내근은 꺼리는 경향이 있다. 공영방송 사장이나 중요 보직자들은 인간적인 양심 없이 권력을 누리기 위한 자리로 인식하고 있다. 그래도 최근 KBS 길환영 전 사장 사태를 보면 후배들이 속물적인 이해관계에서 벗어난 듯 하다. 조직에서 대우 받는 것이 다가 아니다. 언론계 전체에 퍼져 있는 속물근성과 천박함을 극복하는, 이것이 희망 아니겠는가. MBC는 있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 대선 전 정수장학회로 논란이 됐던 이들은 소위 출세하고, 할 말하는 이들은 정신적인 강제수용소로 내쫓겨 고통을 받고 있다.
사회자=세월호 이후 ‘기레기’라는 말이 보편화되며 언론 불신이 커지고 있다.우장균=기레기는 시대상 언론의 위기를 보여준다. 세월호나 윤 일병 사건 등 언론이 국민들을 대신해 거대 정치·경제 권력의 비리를 밝혀줘야 하는데 그렇지 못했다. 저널리스트라는 말을 붙이기 어려울 정도다. 샐러리맨형 기자가 되는 경향이 가속화되고 있는데 돌이키기 쉽진 않을 것 같다. 또 SNS 등이 확산되며 언론의 진화가 요구되고 있고 그에 맞는 새로운 유형의 언론인이 등장해야 하는 전환점에 와 있다. 하지만 KBS처럼 위기 속에 다시 집단지성이 발현될 수 있으리란 기대도 있다.
김종철=언론인의 본분에 충실한 기자들이 많이 나와야 하는데 절대 다수가 그렇지 않다. 왜 굳이 언론인이라는 직업을 택했나. 언론인이라면 적어도 추구하는 가치가 있을 것이다. 책임자가 언론의 바른길을 걷지 않을 때 그대로 따라가면 그 조직은 무너진다. 어쩔 수 없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인간으로서 직업인으로서 직분에 충실하면 구성원의 힘으로 기레기가 되지 않을 수 있다. 1971년 3월 서울대생들이 동아일보 사옥 앞에서 언론에 ‘경고장’을 보내며 언론화형식을 한 것은 기자들을 각성시켰다. 하지만 유신시절 언론은 진실을 한 줄도 쓰지 못했고, 1973년 10월 한 대학가 농성장 입구에는 ‘기자와 개는 출입금지’라는 팻말이 붙었다. 기자로서 자존심이 상했다. 언론이 시류에 휩쓸려 굴복하면 결국 국가 자체의 존립을 흔드는 것이다. 언론의 지배구조도 민주화해야 한다. 아무리 일선 기자들이 열심히 취재해도 기사 한줄 못 나가면 자기 검열이 습관 돼 월급 받는 직장인으로 전락한다. 언론이 민주화되지 않으면 민주정부가 서지 못한다.
사회=오늘날 자본권력의 영향력도 무시하지 못한다.김종철=시장경제체제에서 광고나 판매수익에 의존할 수밖에 없지만 뉴스타파처럼 자본에서 100% 독립된 매체도 있다. 뉴스타파는 세월호 이후 3만6000여명으로 4000여명이나 후원이 늘었다. 최근 세월호 다큐도 유튜브에서 반향이 크다. 뉴스타파 후원이 10만명이 되고 케이블 채널을 확보하면 지금보다 10~20배는 영향력이 커질 것이다. 시민들의 수준은 이미 상승했다. 뉴스타파처럼 자본이나 권력에 종속되지 않은 매체들이 생겨나고 KBS, MBC, YTN 지배구조가 개선되면 동력이 될 수 있다.
우장균=뉴스타파 이전의 유사한 모델이 1988년 창간한 한겨레신문이다. 뉴스타파는 국민주주를 모아 창간한 한겨레보다 자본으로부터 독립이 지속가능한 모델을 제시했다. 뉴스타파가 매달 1만원씩 3만여명의 돈을 후원받고 있는데 마치 시민들이 주주이자 주체적 주인인 바르셀로나 축구팀과 같다. 만원을 내고 개인적 이익을 바라는 것이 아니라 명예와 보람을 얻겠다는 것이다.
사회=후배 기자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말은.우장균=가끔씩 푸른 하늘을 쳐다볼 때, 산에 올라 넓은 광야를 볼 때, 동해의 푸른 바다를 볼 때 초심을 생각해봤으면 좋겠다. 단순히 돈을 벌기 위해서는 월급을 더 많이 주는 기업에 가면된다. 물론 인사권자나 광고주가 교언영색으로 유혹할 수도 있다. 그럴 때 기자를 하려 했던 초심을 떠올리며 인간으로서, 기자로서 최소한의 자존심을 생각하고 지키면 좋겠다.
김종철=현대사회에는 많은 시련이 있었지만 언론인들은 역사의 발전에 서 있었다. 일제 강점기 시절 해방과 독립을 위해 싸웠고 4월 혁명·6월 항쟁도 마찬가지였다. 1964년 언론윤리법 파동으로 기자협회가 탄생했고 5·16쿠데타 이후 박정희 독재에 항거하며 역사의 중심에 서 있었다. 기자협회 창립 50주년을 계기로 후배 기자들이 선배들의 자취를 짚어보길 바란다. 현대사에서 언론인들의 민주화 운동을 돌아보고 반성하며 언론을 바로 세워야 한다.
사회=김성후 기자 kshoo@journalist.or.kr
정리·사진=강진아 기자 saintsei@journalist.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