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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장이 청와대 앞에서 고개 숙인 날, KBS는 침몰했다

김시곤 전 국장 사임하면서 "사장이 보도 독립성 침해"
KBS노조 "백운기, 청와대 인사 만난 뒤 보도국장 선임"
KBS기협 "길환영 사장 퇴진 안하면 제작거부 돌입"

김고은 기자  2014.05.14 13:2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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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길환영 KBS 사장이 김시곤 보도국장의 막말 파문과 관련 9일 오후 서울 종로구 청운 효자동 사무소 앞에서 농성중인 세월호 유가족들에게 고개 숙여 사과하고 있다. (뉴스1)  
 
“우리는 KBS 세 글자가 왜 이토록 부끄러울까요.” 공영방송 KBS는 추락하고 절망과 분노만 남았다. 세월호 참사 희생자 가족의 사과 요구에 아랑곳하지 않던 공영방송 수장은 정권의 요청에 청와대 앞으로 달려갔고 보도국장은 사퇴했다. 그 순간 KBS 구성원들의 얼굴은 수치심으로 붉게 달아올랐다.

사태 수습을 주문하려는 찰나, 후임 보도국장 인사에 청와대가 개입됐다는 의혹이 제기됐다. KBS가 청와대의 ‘부속기관’이자 KBS 사장은 ‘꼭두각시’에 불과하다는 비판이 줄을 이었다. ‘난파선 KBS호’에서 더 이상 가만히 있을 수 없다고 판단한 KBS 구성원들은 사장을 비롯한 책임자 퇴진을 요구하며 집단행동을 결의했다. “창사 이래 최대 위기”에 KBS 노조 분리 이후 최대 규모의 사장 퇴진 투쟁이 예상된다.

KBS를 뒤흔든 사태의 결정적인 단초는 세월호 희생자 수와 교통사고 사망자 수를 비교한 김시곤 전 보도국장의 발언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KBS 공채 37기의 지적대로 “지금 KBS를 향한 국민의 불신과 분노덩어리는 KBS 내부의 무너진 원칙과 컨트롤타워 부재의 결과”이다.

이명박 정부 이후 6년간 켜켜이 쌓인 불공정·편파 보도에 대한 국민들의 실망과 불신에 세월호 참사 과정에서 재난주관 방송사 KBS가 보여준 보도 행태가 기름을 끼얹었다. “왜 우리 뉴스는 대통령에게 책임을 묻지 않는 건가요?”라는 막내 기자들의 물음처럼 KBS는 세월호 참사에 대한 책임론에서 박근혜 정부를 지우는 데 급급했다.

박 대통령과 희생자 가족들의 만남을 보도할 때는 거친 분노와 절규 대신 박수와 함성 소리를 채워 넣었다. 급기야 유가족들이 지난 8일 보도국장 사퇴와 책임자 사과를 요구하며 여의도 KBS를 항의 방문했지만 길환영 사장은 이를 철저히 외면했다.

그러나 만 하루가 채 안 돼 분위기는 급반전됐다. 9일 오후 길 사장이 청와대 앞에서 농성 중이던 유가족들을 찾아 사과했고, 김시곤 보도국장은 사퇴했다. 직후 박준우 청와대 정무수석은 박영선 새정치민주연합 원내대표와 만나 “KBS에 최대한 노력할 것을 요청했고, 그 결과 보도국장이 사의를 표명한 것”이라며 KBS 사장 사과와 보도국장 사퇴에 청와대가 개입했음을 드러냈다.

길환영 사장이 정권 눈치 보기에 급급하고 이에 따른 보도통제가 횡행했다는 폭로도 다름 아닌 보도국장의 ‘입’을 통해 나왔다. 김시곤 전 국장은 이날 사퇴 기자회견에서 “언론에 대한 어떠한 가치관과 식견도 없이 사사건건 보도본부의 독립성을 침해해 온 길환영 사장은 즉각 자진 사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 KBS 기자협회가 12일 오후 8시 긴급 총회를 열고 5시간에 걸친 논의 끝에 길환영 사장의 퇴진을 요구하고 이를 거부할 경우 제작거부에 돌입하기로 결의했다. (KBS 기자협회)  
 
이어 이날 저녁 JTBC ‘뉴스9’와 전화 인터뷰에선 “길환영 사장은 대통령만 보고 가는 사람”이라며 “길 사장과 같은 언론관을 가진 사람이 공영방송 사장을 해선 안 된다”고도 했다. 그러면서 “길 사장이 이번 세월호 사건뿐 아니라 평소에도 끊임없이 보도를 통제했다”면서 “윤창중 사건을 톱뉴스로 올리지 말라고 한 적도 있다”고 구체적인 사례를 증언하기도 했다.

충격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KBS 교섭대표 노조인 KBS노동조합(1노조)은 13일 긴급 기자회견을 열고 “백운기 시사제작국장이 청와대 모 인사와 만난 뒤 보도국장에 임명됐다”고 폭로했다. 1노조에 따르면 백 국장은 보도국장 임명 하루 전인 지난 11일 회사 차량을 이용해 청와대 근처에서 모 인사와 한 시간 가량 접촉했으며, 회사 복귀 직후 길 사장은 부사장 등을 불러 신임 보도국장에 백운기 국장을 기용하겠다는 뜻을 전한 것으로 알려졌다.

KBS측은 즉각 “사실이 아니다”라고 반박했지만, 백 국장의 차량 기록과 인맥이 의혹을 무성하게 하고 있다. 알려진 대로 백 국장은 이정현 홍보수석과 광주 살레시오 고등학교 동창생이다.

언론개혁시민연대는 13일 논평을 내고 “KBS를 좌지우지하는 실질적인 수장은 여의도동 18번지가 아니라 청와대로 1번지에 있었다”고 성토하며 “길 사장은 ‘청와대의 꼭두각시’였을 뿐”이라고 지적했다. 전국언론노조 KBS본부(새노조)는 12일 성명에서 “청와대와 가깝고 충성심이 높은 인물을 새 보도국장에 임명한 것은 뉴스의 정상화를 염원하는 사내 모든 구성원들의 요구에 정면으로 맞서는 것으로 용서받지 못할 죄악”이라고 비판했다.

KBS 양대 노조는 비대위 체제로 전환하고 길환영 사장 퇴진 투쟁에 돌입했다. KBS 기자협회도 12일 긴급 총회를 열고 길 사장과 임창건 보도본부장의 즉각 퇴진을 요구하며 이를 거부할 경우 제작거부에 돌입하겠다고 선언했다. 조일수 KBS 기자협회장은 “길 사장은 공영방송으로서 위상을 현격히 추락시켰고 구성원들의 명예를 떨어뜨려 사실상 리더십을 상실했기 때문에 사장으로서 인정하지 못한다”며 “지금이 명예롭게 퇴진할 수 있는 유일한 시기다. 쫓기듯 떠나는 추한 행태를 보이지 말라”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