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원 안정이 먼저냐, 공정방송 회복이 먼저냐. 마치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와도 같은 이 물음이 몇년째 반복되는 공영방송 KBS 수신료 인상을 둘러싼 논의의 한 단면이다. 한쪽에선 공영방송의 공적책무 수행을 위해선 수신료 인상을 통한 재원 안정화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주장하고, 다른 한쪽에선 방송의 정치적 독립과 공정성 보장을 위한 제도적 장치가 확보되지 않는 한 수신료 인상에 동의할 수 없다고 맞선다.
15일 방송통신위원회 주최로 서울 목동 방송회관에서 열린 수신료 공청회도 꼭 같은 모양새였다. 이날 공청회는 지난달 여당 측 이사들 단독 처리로 KBS 이사회를 통과해 방통위에 제출된 ‘수신료 4000원’ 조정안에 대해 각계의 의견 수렴을 위해 마련된 자리였다. 그러나 물과 기름처럼 갈린 양 극단의 의견은 ‘수렴’될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다.
“광고를 2000억 줄이면 공영성이 갑자기 올라가나” 공영방송이 수신료를 주재원으로 운영되어야 한다는 당위적 전제에 대해서는 모두가 동의했다. 현재 KBS가 공영방송으로서 제 역할을 다 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에 대해서도 대체로 공감했다. 그러나 원인에 대한 진단은 달랐다. 수신료 인상을 찬성하는 이들은 KBS의 전체 재원에서 광고가 차지하는 비중이 지나치게 높아서 공영방송으로서 제 역할을 기대하기 힘들다고 주장한다. 공영방송이 상업방송과 시청률 경쟁을 해서 되겠냐는 지적이다.
그래서 KBS는 수신료를 4000원으로 올려 2012년 기준 37%인 수신료 재원 비중을 절반이 넘는 53%까지 끌어올리고 40%에 달하는 광고 재원은 22%까지 낮추겠다는 계획을 밝혔다. 이경재 방통위원장은 14일 “2019년에는 KBS에서 광고를 없애겠다”며 한 걸음 더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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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방송통신위원회가 15일 서울 목동 방송회관 3층 회견장에서 KBS 수신료 인상안에 대한 의견수렴을 위한 공청회를 개최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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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청회에서도 절반의 참석자들은 ‘공영방송의 정상화는 재원 안정화에서 시작된다’는 주장을 폈다. 주정민 전남대 신문방송학과 교수는 “KBS에 기대하는 공영성 강화, 경영혁신, 고품격 방송 등은 광고 중심의 공영방송 재원 구조에선 절대 해결될 수 없다”며 “공영성 회복과 공적책무 수행을 할 수 있는 기반을 먼저 만들어주고 추후에 책임을 묻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주장했다.
윤석민 서울대 언론정보학과 교수(공영방송발전을위한시민연대 사무총장)도 “수신료를 내서 공영방송을 정상화 하자는 주장이 대체 뭐가 문제인가”라고 목청을 높였다. 윤 교수는 “KBS의 거버넌스 문제와 정치적 공정성 문제가 해결되길 진짜 원한다면 KBS에 대한 우리의 발언권을 높여야 하는데 그게 바로 수신료”라며 “꼴랑 2500원 내면서 친권을 주장할 수 있나”라고 말했다.
이에 대해 전규찬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교수는 “지난 정권과 현 정권에서 공영방송의 공적 영역을 와해시키고 민주주의의 위기를 가져온 게 자본권력인가 정치권력인가”라며 “후자라면 대체 수신료를 인상하고 광고를 다른 데로 돌려서 공영방송의 독립성과 제작 자율성, 건강성을 확립하겠다는 논리 구조가 어떻게 성립되는 것인가”라고 반문했다.
문철수 한신대 미디어영상광고홍보학부 교수도 “과연 광고 때문에 KBS의 공영성이 손실된 구체적인 사례가 있나”라고 의문을 제기했다. 문 교수는 “광고주의 압력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부정할 순 없겠지만 과연 그것이 정치권의 압력보다 강하게 작용하고 있는지 의문”이라며 “광고 재원이 6000억원일 땐 안 되던 공영성이 (광고를) 4000억원으로 줄이면 올라가나”라고 물었다.
이완기 민주언론시민연합 정책위원장은 “수신료 인상은 KBS 이사회와 방통위 의결을 거쳐 국회 동의를 받아 이뤄진다. 수신료 인상에 목매달면 정치권에 목매달게 된다”며 오히려 정치적 독립을 해칠 가능성을 지적했다. 이 위원장은 “상업방송인 JTBC가 종편이라고 욕먹다가 최근 조사에서 신뢰도 2위까지 올라간 것을 보면 수신료 인상이 공영성 강화의 유일한 방안이라고 평가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고 꼬집었다.
“수신료를 정치적으로 봐선 안 된다”는 주정민 교수나 “거버넌스 문제도 결국 수신료 인상으로 해결해야 한다”는 윤석민 교수의 주장과 달리 공영방송 지배구조 개선에 대한 정치적 타협이 필요하다는 주장도 있었다. 정윤식 강원대 신문방송학과 교수는 “수신료 문제는 한국 정치의 극명한 대립적 상황을 보여주는 상징”이라며 “방통위나 국회에서 정치적으로 타협 가능한 솔루션을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정 교수는 지배구조 개선 방안으로 대통령이 사장을 지명하고 국회나 방통위 청문회를 거치는 프랑스 모델을 제시했다. 그는 “KBS가 어떻게 정치적 독립이 가능한가. 균형을 맞추는 것이 중요하다”면서 “현 정치 체제에서 야권에서 여권 이사들을 어느 정도 견제할 수 있는 장치는 청문회 정도밖에 없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에 대해 이완기 민언련 정책위원장은 “우리나라에서 청문회가 실효성이 있냐”며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고, 이후엔 공영방송의 거버넌스와 관련된 문제는 더 이상 논의의 장에 오르지 않았다.
“KBS에서 줄어든 광고, 재배분 효과 낙관적이지 않아” 수신료를 4000원으로 올리면 광고 매출을 2100억원 줄이겠다는 KBS의 구상에 대한 반응도 엇갈렸다. KBS가 광고 축소 규모에 대한 과학적인 산출 근거나 구체적인 액션 플랜 없이 선언적인 발표에만 머물렀다는 지적이 제기된 가운데, 수신료 인상을 찬성하는 이들은 이에 대해서는 대체로 어떤 언급도 내놓지 않았다.
정부는 지난달 발표한 방송산업발전 종합계획에서 수신료 인상으로 줄어든 KBS 광고 재원이 전체 방송산업 발전을 위한 재원이 되어줄 것이란 장밋빛 전망을 내놓았다. 지상파 방송 사업자 단체인 한국방송협회도 이날 공청회를 앞두고 성명을 내어 “수신료 인상은 방송산업 선순환 구축의 출발점”이라고 주장하며 “건강한 방송 환경을 조성하기 위해 수신료 인상안을 조속히 처리하라”고 촉구했다.
그러나 문철수 교수는 “지상파 방송 광고 시장이 이미 침체기에 든 상황에서 KBS에서 줄인 광고가 다른 지상파 방송사로 흘러들어갈 것이란 근거는 없다”고 잘라 말했다. 문 교수는 “오히려 KBS가 광고를 줄이면 KBS와 결합판매를 하고 있는 중소방송사들은 어려움을 겪어 결국 전체 지상파의 어려움이 가중될 수 있다”며 “KBS만 살고 다른 지상파는 죽어도 되는가”라고 일침을 가했다.
이종관 미디어미래연구소 정책연구실장도 “광고 재배분 효과가 그리 낙관적이지 않을 수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KBS가 광고를 줄이면 수요와 공급의 원칙에 따라 KBS의 광고 단가가 올라갈 가능성도 있다. 그렇게 되면 광고는 실질적으로 많이 줄지 않으면서 수신료 수입은 올라가는 효과가 발생할 수 있다”며 “KBS가 수신료 인상의 반대급부로써 광고 축소를 얘기한다면 보다 구체적인 액션 플랜을 가지고 국민을 설득할 수 있어야 한다”고 밝혔다.
“1500원이 껌값인가” 4000원이라는 수신료 금액에 대한 입장 차이도 분명했다. 수신료 인상을 찬성하는 이들은 현재의 수신료에 대해 “꼴랑 2500원”이라며 “4000원도 적다”는 주장을 폈다. 그러나 준조세 성격인 수신료를 월 1500원을 인상하는 것만으로도 서민들에게는 부담이며, 그 외 사회적 비용 증가도 무시할 수 없다는 지적이 제기됐다.
추혜선 언론개혁시민연대 사무총장은 “1500원이 껌값이라고 얘기하지 말라”면서 “줄줄이 공공요금이 인상되고 있는데 수신료가 여기에 플러스되면 사회적 비용 인상효과가 있다”고 주장했다.
이종관 미디어미래연구소 실장도 “수신료가 4000원으로 인상되면 관행상 유료방송 사업자들도 현재 4000원 수준인 저가 의무형 상품의 금액을 인상시킬 가능성이 높다”며 “결국 방송 전반의 요금이 인상되면서 국민이 지불하는 사회적 비용이 증가하게 된다”고 말했다.
무엇보다 KBS가 수신료 인상과 관련해 자구 노력이나 국민들을 설득하려는 노력이 부족하다는 지적이 줄을 이었다. 이종관 실장은 “떡 줄 사람과 먹을 사람 간의 인식의 간극이 크다”고 지적했다. 그는 “떡을 먹고 싶은 사람이 떡 줄 사람을 설득해야 하는데, KBS의 경영상황이 열악하다는 것만으로 설득이 되겠냐”며 “자구노력과 공적책무 이행, 광고 축소 등에 대한 고강도 계획이 나오고 KBS가 희생적인 모습을 먼저 보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최진봉 성공회대 교수도 “방송의 공정성 보장을 위해 KBS가 변화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게 먼저”라며 “준조세인 수신료를 올리는데 있어 국민의 합의를 받아내고 논의를 진행하는 것이 순서”라고 지적했다.
추혜선 총장은 수신료 인상 처리의 정당성 문제를 지적했다. 추 총장은 “수신료 인상안이 KBS 이사회 여당 이사들에 의해 일방 처리되고, 이사회에서 검토도 안 된 안이 방통위로 넘어가는 등 민주적 절차가 막대하게 훼손됐다”며 “그런 절차 속에서 만들어진 안을 받아서 이뤄진 오늘의 공청회는 어떤 정당성도 명분도 없다”고 비판했다.
그러면서 “수신료를 올리려면 제대로 올려야 한다”며 “민주적 절차를 지키고 공영방송의 순기능을 살리고 영국의 BBC 같은 위상을 가질 수 있는 플랜을 만들어서 자신 있게 설득하라. 공영방송을 구현해야 하는 주체인 내부 구성원들이 먼저 자신감을 가지고 건강하고 제대로 된 논의를 진행해 달라”고 당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