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진아 기자 2013.12.18 13:59:28
“오전 10시가 되자 허기로 멍해졌고, 11시가 되자 다리를, 오후로 들어서자 머리를 떼어내고 싶었다. 한자리에 꼼짝없이 서서 작업하는 상체를 받치는 다리가 꺾일 것 같았다. 사타구니 높이의 컨베이어벨트에 놓인 난로를 내려다봐야 하는 머리는 불필요하게 무거웠다.”(한겨레21, 임인택 기자)
2009년 한겨레21에 실린 내러티브 연재기획 ‘노동OTL’의 일부다. 당시 한겨레21 사회팀은 4개월간 4명의 기자가 난로공장-갈빗집-가구공장-대형마트에서 각각 한 달간 일하며 현장의 노동자들과 같은 것을 보고 듣고 느낀 그대로를 기사로 풀었다. 당시 뜨거운 반응을 얻은 ‘내러티브 심층보도’로 “두껍게 기술된 리얼리티”라는 평을 받았다.
내러티브 저널리즘이 멀어진 언론과 대중의 사이를 좁히고 신뢰를 회복할 수 있는 하나의 방안으로 제시되고 있다. 흔히 ‘문학과 저널리즘의 경계선’이라는 내러티브는 이야기하다(Narrate)는 단어의 유래처럼 소설을 쓰듯 사건이나 인물을 그려내는 것을 뜻한다. 이달 발간된 책 ‘뉴스가 지겨운 기자’에서 한겨레 안수찬 기자는 “내러티브 심층보도에는 언론이 인간을 이끄는 게 아니라 인간이 필요로 하는 언론을 만드는 힘이 있다”며 “더 많은 발품과 땀은 기사를 근본적으로 바꾼다”고 밝혔다.
최우선 과제는 ‘장르’의 혁신이다. 다양성을 외면하고 속보 위주의 스트레이트가 지배하는 언론 풍토를 전환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스트레이트 기사가 갖는 양비론적 중립과 객관성의 허울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것이다. 안수찬 기자는 “더 많은 독자에게 다가갈 수 있는 혁신은 스트레이트에서 대중 친화적인 내러티브로 주류 기사 장르를 바꾸는 데 있다”며 “스트레이트는 간명해보이지만 복잡하고 중층적인 사실관계를 차단하거나 감추는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말했다.
내러티브는 전통적으로 이야기가 갖는 공감의 힘이 크게 작용한다. 친절하고 친근한 설명으로 대중들의 이해도를 높일 수 있다. 하지만 감정을 자극하는 이야기에 치우쳐 기사의 ‘사실’이 소홀해질 수 있다는 우려도 있다. 안 기자는 “내러티브는 허구가 아니라 사실을 더 풍부하게 다루는 것”이라며 “글쓰기만의 혁신이 아니다. 취재 과정이 달라져야 하는 것”이라고 밝혔다.
내러티브 기사 작법을 국내에 처음 시도한 이규연 중앙일보 논설위원도 “내러티브는 복합적이고 맥락적인 의미를 전달해 더 공정하고 정확할 수 있다”며 “이야기로 사람들에게 대중적인 흥미를 갖게 하는 점도 중요하다”고 말했다.
이 논설위원은 농구코치를 하다 루게릭병에 걸려 안구마우스로만 소통할 수 있는 박승일 선수와 4년간 주고받은 50여통의 이메일을 내러티브로 2005년 보도했다. 그의 고통과 삶의 의지를 담은 기사는 2009년 책 ‘눈으로 희망을 쓰다’로 출간됐다. 현재 동아일보는 매주 고정코너로 한 면을 할애해 삶 곳곳의 이야기를 전하는 ‘내러티브 리포트(Narrative report)’를 게재하고 있다. 지난 2010년부터 본격화하며 2011년 7월 이후 매주 연재하고 있다.
취재진과 전문가가 함께하는 ‘실전 내러티브 연구회’도 2010년 1월부터 운영하고 있다. 별도의 팀을 조직하기 어려운 여건 상 부서에서 1명씩 차출받아 연구회에서 주제를 정하고 외부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 해당 부서에서 기사를 출고하는 형태다. 송상근 동아일보 교육복지부장은 “동아닷컴에서 조회수 상위 30권에 꾸준히 오르는 인기연재물”이라며 “부서 업무와 동시에 장문의 내러티브를 쓰기 힘든 상황이라 연구회 성격으로 하되 지면게재를 노력하며 내러티브를 정착시키고 있다”고 밝혔다.
이 같은 시도가 현실에서 녹록치만은 않다. 출입처 위주로 돌아가는 현 시스템에서 이른바 ‘짬’이 나지 않기 때문이다. 심층 탐사보도가 추진돼도 팀의 명맥이 이어지는 경우는 드물다. 결국 ‘뉴스룸’의 변화만이 이를 가능하게 한다는 의견이다. 정치적 파워엘리트에 맞춰진 뉴스 초점을 대중의 이야기로 이동해야 한다는 설명이다. 안 기자는 “출입처를 벗어나 기자 개인이 취재·집필하는 데 충분한 시간을 주지 않으면 좋은 기사는 나올 수 없다”며 “나아가 각 언론의 이해관계를 떠나 매체·기자간 교류와 협력을 강화하는 뉴스룸 개방과 공유도 고려해볼 수 있다”고 말했다.
이 위원은 “언론과 기자들이 내러티브 저널리즘을 구현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면서 “스트레이트 구조 현실에서는 시도 자체가 힘들다. 내러티브 경험을 축적하고 발전시키기 위해 기사 생산 공정을 바꾸고 뉴스룸을 혁신해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