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대 말년 병장 기자의 행운이다. 사진기자 28년, 정년퇴직 1년여를 앞두고 명예로운 큰 상을 받았다. 무엇보다 아내와 딸에게 아빠가 기자로서 족적 하나 남겼다는 자부심을 줄 수 있어 기쁘다. 큰 딸의 말마따나 훗날 “니들 오락가락하는 할아버지가 그래도 옛날에 잘 나갔던 사진기자셨다”라고 자랑할 수 있을테니까. 2012년 5월 12일, 내게 운명처럼 다가온 이날은 토요일이었다. 중앙일보에서 중앙선데이로 옮긴 지 1년여, 오랜만에 현장취재에 나섰다. 주간 신문 속성상 기획기사와 심층 인터뷰 기사를 주로 다루기 때문에 당일 마감하는 취재는 거의 없다. 그날 오후 소집된 통합진보당 중앙위원회는 ‘비례대표 후보자 총사퇴 안건’ 처리를 둘러싸고 비당권파와 이를 저지하려는 당권파의 몸싸움이 예상됐다. 또한 그로인한 진보세력의 분열이 언론의 관심사였다. 그래서 토요일인데도 불구하고 대부분 신문과 방송, 인터넷 매체 기자들이 총출동했다. 중앙선데이도 사진기자 두 사람 모두 취재에 나섰다. 소동과 야유, 정회가 반복되며 몇 차례 밀고 당기는 몸싸움이 있었다. 처음엔 신통한 사진을 찍지 못했다. 타사 후배 기자들의 카메라엔 생동감 넘치는 몸싸움 사진이 있었다. 그날 현장의 모습과 소회를 6월 10일자 중앙선데이 에디터칼럼으로 썼다.
6월항쟁과 머리끄덩이녀 그해 6월은 맵고 무더웠다. 2년차 사진기자인 나는 거의 매일 출근하기 바쁘게 시위 현장으로 달려갔다. 어깨엔 두 대의 카메라와 망원렌즈를, 허리엔 방독면과 헬멧, 한 손엔 사다리를 들었다. 마치 외계인 같은 모습으로 하루 종일 시위 현장을 오가는 게 일과였다. 민주화 운동의 중심인 명동성당·서울역·종로·신촌 등으로. 1987년은 한국 민주화에 큰 획을 긋는 역사적인 사건들이 잇따라 일어났다. 서울대 박종철군이 물고문으로 사망했고, 6·10 대회 전날엔 연세대 이한열군이 경찰이 쏜 최루탄에 맞아 쓰러졌다. 이를 계기로 군부독재에 항거하는 시위가 들불처럼 번졌다. 6월 항쟁이다.
6월 26일 전국적으로 평화대행진이 열렸다. 그날 나는 부산 문현동 로터리에 있었다. 최루가스로 찌든 거리는 긴장감이 흘렀다. 어느 위치에 설까 망설였다. 최루가스를 덜 마시는 경찰 쪽인가 격렬한 현장을 찍을 수 있는 시위대 쪽인가. 허리에서 방독면을 꺼내 얼굴에 썼다. 경찰과 시위대의 중간에 섰다. 검은 장갑차 페퍼포그의 다연발 최루탄이 불을 뿜었다. 흩어지는 시위대를 향해 연속 셔터를 눌렀다. 제멋대로 터지는 지랄탄이 도로 위에서 춤을 췄다. 뿌연 연기 속에서 마스크를 한 대학생들이 대형 태극기를 들고 앞으로 나왔다. 셔터를 눌렀다. 36컷 흑백 필름이 멈춰 섰다. 필름을 갈아 끼워야 했다. 어! 어! 그 순간 웃통을 벗은 한 청년이 두 손을 쳐들고 ‘최루탄 쏘지 마라’ 절규하며 달려 나왔다. 아~. 나도 몰래 탄식이 나왔다. 내 카메라는 빈총이었다. 이날 한국일보 고명진 기자는 특종을 했다. 6월 항쟁의 상징처럼 되어버린 사진 ‘아! 나의 조국’이다. 나는 그날 역사적 현장에 있었음을 말 못했다. 눈으로만 보고 찍지 못한 아쉬움과 낙종의 기억 때문이다. 하지만 이젠 말할 수 있다. 기자에게 낙종은 쓴 약이고 특종을 잉태하는 씨앗이라고.
지난달 12일 일산 킨텍스에서 열린 통합진보당 중앙위원회. 비례대표 경선 부정을 일으킨 당권파에 대한 책임을 묻고 비례대표 사퇴를 의결한 전국운영위의 결정을 추인하기 위해 소집됐다. 당권파 이정희 공동대표가 사퇴를 밝히고 퇴장하면서 회의장은 긴장이 고조됐다. 비당권파의 유시민·심상정·조준호 공동대표가 단상에 앉고, 의장을 맡은 심 대표가 개회를 선언했다. 하지만 참관인석을 장악한 당권파 당원들은 “불법 중앙위 중단하라”는 구호를 외치며 회의 진행을 방해했다. 소동과 야유, 그리고 정회가 반복됐다. 마감 시간이 다가왔다. 언론에 공개된 행사, 설마 난장판으로 끝내지는 않겠지. 철수 준비를 했다. 그때 참관인석의 당원들이 단상 앞으로 몰려왔다. 심상치 않았다. 껐던 노트북을 다시 켰다. 마음을 가다듬고 그들을 주시했다. 심 대표가 당헌 개정안을 상정하려 하자 수십 명이 단상으로 뛰어 올랐다. 막아서는 진행요원과 몸싸움이 시작됐다. 기자들도 단상에 뛰어올랐다. 내 카메라 앞으로 물병이 날아왔다. 조준호 대표가 멱살을 잡혀 끌려갔다. 주먹과 발길질로 난장판이 되었다.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카메라를 머리 위로 들었다. 격렬한 몸싸움이 벌어지는 곳을 향해 셔터를 눌렀다. 그곳에 이른바 ‘머리끄덩이녀’가 있었다. 메모리칩 속에는 분노한 그녀가 조준호 대표의 머리채를 잡아 뜯고 있었다. 아수라장에서 거둬 올린 특종 사진이다.
폭력사태를 지켜보면서 25년 전 6월 항쟁이 불쑥 떠올랐다. 저들이 독재타도와 비폭력을 외쳤던 세력이 맞는가. 민주화를 위한 희생도 마다하지 않은 세력, 내게 부채의식을 갖게 했던 그들이 아니던가. 하지만 그날 일산 킨텍스에는 민주투사가 아니라 민주적 가치를 짓밟고 정파와 조직의 이익만 좇는 불한당들이 있었다. 6월은 지금도 내 가슴을 뜨겁게 한다. 거리에 나서면 귓가에 25년 전의 함성이 들리는 것만 같다. 카메라를 내려놓고 시민으로 돌아가 함께 외치고 싶었던 “독재타도 민주쟁취”. 요사이 그 6월 항쟁의 정신에 먹칠을 하는 사람들이 너무도 많다. 그게 슬프다.
행운이 따랐다. 내 인생에 큰 복을 받은 날이었다. 아수라장이 된 단상에서 걷어 올린 특종이었다. 하지만 마감 시간에 쫓겨 중앙선데이에는 사진을 싣지 못했다. 보고 찍었던 첫 몸싸움 장면을 먼저 전송했다. 그리고나서 메모리칩 뒷쪽의 결정적인 사진을 발견하고 전송했지만 마감 시간을 넘기고 말았다. ‘당원에 머리채 잡힌 당대표’ 사진은 다음날 중앙일보 1면에 크게 보도됐다. 이어 타 신문과 방송에 인용 보도되고 인터넷에 널리 퍼지면서 사진 속 젊은 여성 당원 박모씨는 ‘머리끄덩이녀’로 불리게 됐다. 폭력은 민주주의의 적이다. 진보 세력은 박정희·전두환·노태우 대통령으로 이어진 군사독재 정권에 굴하지 않고 민주주의를 위해 투쟁했다. 우리나라가 이만큼 민주화된 것도 그들의 희생과 역할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민주적 가치를 외쳤던 그들이 민주주의를 짓밟는 폭력을 행사한 것은 어떤 말로도 정당화 될 수 없다.
특종 사진 속의 또 한 사람 조준호 전 통합진보당 대표에게 전화를 했다. 저녁 한 번 모시고 싶다고. 며칠 뒤 조준호 대표와 마주앉아 저녁을 먹었다. 늦은 밤까지 이어진 술좌석에서 그녀에 대한 미움도 원망도 버렸음을 확인했다. 그리고 1월 27일자 신문에 ‘머리끄덩이녀를 위한 변명’을 썼다.
머리끄덩이녀를 위한 변명 “그녀를 풀어줬어야지요. 그녀에 대한 미움이나 원망은 이미 버렸어요. 검찰에서 난 처벌을 원하지 않는다고 말했는데 법원이 징역 10개월 실형을 선고하고 말더군요. 그날 나를 똑같이 폭행했던 다른 사람들은 집행유예로 풀어주면서요.” 여기서 그녀는 일명 ‘머리끄덩이녀’로 불리는 24세 박모씨다. 당시 머리채를 잡힌 전 통합진보당 조준호 대표는 최근 필자와 만나 “그녀가 참 안 됐다”며 안타까워했 다. 재판부가 형평성을 잃고 그녀에게만 가혹한 처벌을 내렸다는 것이다. 실형 선고는 유감스럽게도 결정적 증거가 된 한 장의 사진 때문이었다. 이를 악물고 머리채를 잡아당기는 그녀, 집단폭력에 고통스러워하는 조 대표의 표정이 흑과 백처럼 너무도 강하게 각인됐기 때문이리라.
사진기자협회는 25일 머리끄덩이녀 사진을 2012년 한국보도사진 대상으로 선정했다. 지난해 5월 12일 경기도 일산 킨텍스에선 통합진보당 중앙위원회가 열렸다. ‘비례대표 후보자 총사퇴 안건’ 처리를 둘러싸고 비당권파와 이를 저지하려는 당권파 사이에 극심한 몸싸움이 벌어졌다. 당권파에 속한 그녀는 조준호 당시 공동대표의 머리채를 잡아당겼고, 그 모습이 중앙일보에 보도됐다. 이어 인터넷에도 널리 퍼지게 됐다.
졸지에 악명 높은 머리끄덩이녀가 된 그녀는 2개월여 동안 도피생활을 하다가 자수했다. 그리고 지난해 12월 24일 징역형을 선고받아 복역 중이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박씨의 행위는 정당정치의 근간을 무너뜨린 것으로 죄가 무거워 실형을 선고했다’고 했다. 하지만 그 사진이 없었다면 그녀가 구속되고 실형을 선고받았을까? 그건 아닌 것 같다. 그녀도 아수라장이 된 단상에서 몸싸움을 벌이고 폭행에 가담한 50여 명 중 한 사람일 뿐이다. 조 대표는 머리채를 세 명 이상이 잡아챘다고 했다. 심상정·유시민 공동대표보다 당권파에 더 밉보인 조 대표는 한동안 이리저리 끌려다니며 폭행을 당했다. 기자들도 폭력의 틈바구니에서 카메라를 머리 위로 든 채 사진을 찍어야 했다. 보이지 않는 주인공들을 향해 셔터를 눌렀다. 오직 고함과 비명소리를 방향 삼아서다. 앞에서 옆에서 위에서 조 대표에게 주먹질을 하고 발길질을 했어도 가해자의 얼굴이 없는 사진이 대부분이었다. 얼굴 없는 사진은 긴장감이나 현장감이 떨어진다. 그녀만이 카메라 렌즈에 조준호 대표와 완벽한 표정으로 잡혔다. 아니 필자의 카메라에 그녀가 들어왔다는 표현이 적절하다. 그녀보다 더한 폭력을 휘두른 사람들이 적지 않은 데도 말이다.
당시 폭력사태의 배후 주동자들이 있을 텐데 사진 증거가 없어선지 그들을 소환하거나 조사했다는 소식은 듣지 못했다. 이런 상황인데 어쩌다 얄궂게 사진에 찍힌 그녀가 왜 옥살이를 억울해하지 않겠는가. 자신보다 큰 죄가 있는 사람들은 멀쩡한데 자신만 옥살이를 한다고 생각할 것 같다. 그런 점에서 그녀 또한 피해자다. 인터넷에선 그녀를 악녀로 표현하는 등 온갖 언어폭력과 인신공격을 일삼았다. 목적을 위해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 그 어떤 폭력도 정당화될 수는 없다. 그녀의 잘못도 결코 작지 않다. 그럼에도 검찰·법원은 얼굴 없는 폭력 주동자를 모른 체하면서 그녀를 속죄양으로 삼은 게 아닌 지 되돌아봐야 한다. 폭력사태의 주인공은 결코 그녀가 아니었다. 일부 인터넷 매체는 그녀의 초상권이 침해됐을 가능성을 제기했다. 하지만 그녀는 당시 국민들의 관심사였던 정당 공식 행사에 참석했고, 언론 취재 사실을 충분히 알고 있었다. 초상권 침해 운운은 과장된 얘기일 뿐이다. 필자는 상을 받아 기쁘면서도 한편으론 마음이 편치 않다. 그녀의 불행이 그 사진 때문에 시작됐고, 형평성 없는 재판부 판결의 빌미를 제공했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판결은 이미 내려졌다. 이젠 피해자든 가해자든 분노와 원망 대신 평안과 사랑이 함께하길 바랄 뿐이다.
9년 전 2월 18일, 내겐 최악의 날이었다. 나는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인간이었다. 내 삶의 가장 행복했던 시기에 신은 내 행복을 거둬 갔다. 졸지에 사랑하는 아홉 살 아들을 잃고 난 제정신이 아니었다. 세상을 살아갈 여력도 희망도 없었다. 다행히 내겐 위로와 힘이 되어준 친구 목사가 곁에 있었다. 그 친구도 4년 뒤 이 세상을 떠나고 말았지만…. ‘고난이 유익이다’는 성경 말씀을 수없이 되뇌었다. 바람과 구름, 새와 꽃이 내게 다가와 친구가 되었다. 작고 하찮은 생명과 자연을 사진으로 찍어 아들에게 블로그 편지를 썼다. 그렇게 시작한 사진은 포토에세이 ‘조용철 기자의 마음풍경’과 ‘산에서 들에서’가 되었다. 아들이 내게 준 선물이다. 그동안 자연 부문과 피쳐 부문에서 보도사진상을 여럿 받았다. 하지만 보도사진의 정수라고 하는 스팟뉴스 부문에서 받은 상은 가작이 전부였다. 지난 1년 참 많은 복을 받았다. 그 복을 이 글을 읽는 분들에게 나눠드리고 싶다. 오늘 비록 삶이 어렵고 힘들더라도 희망과 용기를 잃지 말자. 어둠의 끝에 빛이 있듯, 절망과 슬픔 뒤에 기쁨과 희망이 있음을 기억하며 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