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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기자다"

삼척MBC 조규한 기자  2013.11.04 16:0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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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ㅇㅇ씨를 아세요”

“아저씨, 저희 아빠 아세요? 벌써 인사 나눴어요?”
“뭐라고? 너희 아빠?”
“저희 아빠 이름이 아저씨 핸드폰에 있는데요.”
“아닌데...”
“맞는데... 김ㅇㅇ씨, 저희 아빠인데요.”

대구 경산에 사는 은찬이는 올해 1월에 해외여행을 갔다가 만난 초등학교 5학년 아이다. 은찬이네 가족은 홍콩과 마카오를 3박 4일 동안 우리 일행과 동행했다. 뮤지컬 배우가 꿈이라는 은찬이는 여행 기간에 ‘기자’라는 직업을 가진 나를 잘 따랐다. 그리고 여행 마지막 날, 집으로 돌아가서도 서로 연락을 하자며 전화번호를 주고 받다가 내 핸드폰에 저장된 은찬이 아버지와 똑같은 이름의 전화번호를 보고 물었던 것이다.

그랬다. 나는 은찬이 아버지와 동명이인인 김ㅇㅇ씨를 오래 전부터 너무 잘 알고 지냈다.

내가 아는 김ㅇㅇ씨
“쾅-쾅!”
작년 8월 17일 아침, 달콤한 아침잠에 취해있던 나는 눈을 번쩍 뜰 수밖에 없었다. 엄청난 굉음이 울리고 집이 흔들리는 바람에 나는 잠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순간적으로‘살아야한다’는 생각이 들었고 서둘러 방문을 밀치고 뛰쳐나갔다.
“엄마! 무슨 일이야”
“몰라. 무슨 난리인지..”
얼른 베란다로 나섰다. 직선거리로 50미터 앞에 있는 건물 2층에서 희뿌연 연기가 치솟고 있었다. 뒤이어 뭔가가 터지는 소리가 또 들렸다.
‘사고다!’
나는 고양이 세수를 하고 옷을 대충 챙겨 입었다. 그리고 보도부 당직자에게 전화를 걸어 사고가 났음을 알리고 태블릿 PC를 들고 5분도 채 안 되는 거리의 사고 현장에 도착할 수 있었다. 뭔지 모르지만 ‘신속하게’라는 단어 밖에 생각나지 않았고 차림새는 별로 신경 쓰이지 않았다. 무조건 연기가 나는 곳으로 허겁지겁 달려갔던 것 같다.
사고 현장은 아수라장이었다. 가스가 폭발한 것으로 보였다. 건물들은 처참하게 부서져 있었고 크고 작은 잔해가 여기저기 날아가 있었다. 반경 수십 미터 안의 건물 유리창들도 부서져 있었다. 주변에 세워둔 차들은 마치 딱지치기라도 한 듯이 뒤집혀 있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사고현장에 도착한 나를 더욱 놀라게 한 건 사고가 난 것으로 보이는 건물이었다.

그 건물의 주인은 김ㅇㅇ씨.
내게는 사돈지간이 되는 이종사촌 형의 장인이시다. 사고 건물 2층에서 부상자 1명이 119구조대의 들 것에 실려 내려오고 있었다. 사고 현장은 기사에서 수없이 표현했던 그야말로 전쟁터를 방불케 했다. 경찰관과 소방대원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이 놀란 표정으로 몰려 들어 이른 아침의 난리를 지켜보고 있었다.

‘아침 뉴스 시간인데 가능한 속보 처리하자!’
보도부 사무실에 전화를 걸어 가스 폭발 사고 개요를 대략적으로 알렸다. 그리고 태블릿 PC로 정신없이 동영상을 확보하기 시작했다. 유년시절부터 강원도 삼척에서 생활한데다 기자 생활을 10년 가까이 하고 있어서 아는 경찰과 사람들이 눈에 띄었고 다짜고짜 취재를 했다.

“사고는 언제쯤 났죠? 가스 폭발 사고 맞나요? 부상자는 몇 명이예요? 사망자는 있나요? 부상자는 어디로 갔죠? 어디서 왜 폭발한 거죠? 목격자는 있나요?”

평소와 다르게 태블릿 PC로 현장을 찍으며 여기저기를 정신없이 오갔다. 그리고 시간이 조금 흘러 카메라 기자가 도착했다. 나는 인터뷰를 확보하려고 인근 주민들에게 다가갔다. 그런 사이에 한쪽에서 큰 소리가 들려왔다.

“건물 지하에 사람이 있대요!”
누군가의 외침소리에 소방대원과 경찰들이 건물 지하를 살피기 시작했고 부상자 1명이 들 것에 또 실려 나왔다.‘사돈 어르신이다’멀리서 봐도 알 수 있었다. 들 것에 실린 사돈 어르신은 온 몸에 상처를 입으신 것 같았다. 작은 목소리로 말씀을 하시는 것으로 보아 생명에는 지장이 없을 것으로 여겨졌다. 그 때까지만 해도 들 것에 실린 상처투성이인 사돈 어르신의 모습이 내게 마지막일 것이라고 전혀 상상하지 못했다.

사고 현장을 떠도는 사이에 아침뉴스에서 자막으로 속보가 무난히 처리되었다. 자막 보다는 보다 완성된 보도에 대한 욕심이 있었지만 그나마 선방했다. 다음 뉴스는 2시간 후였다. 다른 방송사의 취재기자와 카메라 기자들이 나오기 시작했고 다음 뉴스에 리포트물 제작이나 중계차 현장 연결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내게도 기자의 습성이 있었던 것일까? 사고 현장에서 일에 대한 열정으로 나는 사돈 어르신의 안부는 그렇게 까맣게 잊고 있었다.
‘빠른 판단, 방심은 금물!’
현장 취재를 일단 마치고 회사로 들어가기 위해 집으로 향했다. 부모님이 나와 계셨다.
“사돈 어르신 건물에서 사고 났어요. 어르신은 실려 나오셨는데 어떠신지 모르겠어요. 이모님한테 연락드려요. 회사 갈게요!”
“우리도 봤다. 괜찮으신 것 같은데.. 너나 조심해라~”

오전 뉴스는 완성도 높은 보도를 해야 된다는 생각에 서둘러 회사로 향했다. 불과 회사에서 차로 10분 거리에서 벌어진 사고라 시간적인 여유가 있었다. 다른 회사들보다 영상도 빨리 확보할 수 있었고, 오전 뉴스 시간에 맞추기에도 시간이 넉넉했다. 내 자랑이지만 태블릿 PC로 직접 확보한 인터뷰도 꽤 쓸 만 했다. 사실 MBC 9시 뉴스데스크까지 인터뷰를 줄곧 사용해 개인적으로 뿌듯했다.

오전 뉴스가 무사히 끝나고 휴식을 취하려 하는데 사고 현장에서 경쟁사가 정오 뉴스에 중계차를 준비한다는 소식이 들렸다. 너무 여유를 부린 것일까? 처음 사고 현장을 접했을 때 나는 중계차가 나올 만한 상황이라고 보고했다. 그런데 오전 뉴스가 방송되는 사이에 재차 중계차 연결을 요청하는 걸 깜빡했다. 그렇지만 회사가 가까워 중계차가 현장에 나와 보도할 수 있는 시간적 여유가 아직 남아 있었다. 보도가 아무리 취재를 잘 하더라도 영상과 기술이 접목되지 않는다면 보다 생생하고 완벽한 방송을 할 수 없는 게 현실이다. 다른 부서와 협의가 이뤄졌고 우리도 신속히 중계차 연결을 준비했다.

그 무렵, 내게 부상자 명단이 전달됐다. 1차 명단이라 정확하지 않았지만 사돈 어르신의 성함도 포함되어 있었다. 건강 상태가 안 좋으신지 다른 병원으로 옮겨진 것으로 파악되어 있었다. 나는 다른 생각을 할 겨를이 없었다. 현장 연결 시각에 늦지 않게 정오 뉴스 기사를 써서 현장으로 가려면 시간이 촉박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정오 뉴스 시간에 현장 중계는 이른바 반제품, 일부 보도 내용만 기자가 라이브로 방송하고 나머지는 사전 제작된 방송물로 보도하는 형식으로 방송하겠다고 데스크에게 보고 했다. 산불과 태풍, 폭설 등에서 현장 중계 경험이 있다 보니 모든 것을 현장에서 진행하면 방송 사고의 위험이 있다는 판단에서였다. 기사가 출고되고 나는 현장으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방송 시작 40분 전이었다.

하지만 중계차 연결 장소에서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서울MBC와 통신케이블이 아직 연결되지 않고 있었다. 21세기 IT강국에 있는 도시 한복판에서 통신이 연결되지 않아 현장 연결이 되지 않고 있었다. 멀리서 달려온 경쟁사는 버젓이 저렇게 중계차를 연결하고 대기하는데 이게 무슨 일일까? 나는 엔지니어 동료에게 서두르라고 다그쳤다. 그러나 고성은 짜증으로 돌아왔고 결국 나는 현장에서 스탠바이만 하다가 기사 한줄 읽지 못한 채 되돌아와야 했다. 사전에 제작된 반제품이 있어서 정오뉴스에 방송 사고를 내지 않은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여유를 부리며 방심했던 게 오히려 보도에 차질을 빚었던 것 같아 아쉬움이 컸다. 일의 노하우가 있더라도 제대로 접목되지 않으면 늘 아쉬운 게 기자인 것 같다.

기자, 현장의 취재 열정이 보람으로
사실, 사고 발생 당시에 나는 해당 지역을 출입하는 기자가 아니었다. 방송사 특성상 취재기자들이 지역을 나눠 맡고 있는데 마침 선배 기자가 휴가 중이었다. 그래서 일주일 동안 삼척지역을 맡았는데 이런 대형사고가 터진 것이다. 게다가 집에서 훤히 보이는 곳에서 사고가 터져 누구보다 현장에 빨리 가다보니 취재를 도맡게 됐다.

아무튼 내 잘못이 아닌데도 오전과 같은 방심이 방송 차질을 야기한 것 같아 보도부 동료들에게 조금 미안했다. 부서 분위기도 가라앉아 있었다. 불평과 비판의 목소리도 있었지만 분위기를 추스르고 저녁뉴스를 위한 아이템 회의가 이뤄졌다. 기자별로 취재 아이템이 정해지고 나는 사고 현장을 다시 찾았다. 친근한 장소가 한순간에 폐허로 변한 모습이 그제야 눈에 생생하게 들어왔다. 사돈 어르신의 안부도 궁금했다. 하지만 나는 감정에 치우쳐서도 그리고 상황을 단정 지어서도 안 되는 기자다. 사고 현장을 꼼꼼히 누비며 팩트를 확인해야 했고 기사를 생각하다보니 벌써 하루가 저물고 있었다.

현장 취재가 끝나더라도 오늘 같은 날은 뉴스가 전파를 탈 때까지 방송국은 전쟁터이다. 그렇게 숨 가쁘게 달려온 하루가 끝나고 MBC 9시 뉴스데스크에 가스 폭발 사고 보도 2꼭지가 방송됐다. 비록 작은 실수가 있어 아쉬움도 남았지만 무난히 하루를 보냈다는 안도감이 그제야 들었다.

그 무렵, 기자 10년 차에 접어든 나는 왠지 매너리즘에 빠져들고 있었던 것 같다. 가끔씩 경찰서와 소방서를 떠돌며 경찰관이나 소방관에게 ‘형님! 기사거리 없어요? ... 좀 줘 봐요.’하고 한마디씩 툭툭 던질 때가 그립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다. 과거에 취재한 일들을 떠올리며 ‘지금의 나’라면 더 빨리 더 잘 해냈을 텐데 하는 후회도 가끔 했었다. 그런 찰나에 사건사고 기자처럼 현장을 뛰어다녔더니 일에 대한 열정으로 하루가 보람찼다.

조금은 부끄럽지만 ‘기자’라는 본능으로 일어나 신속하게 대처했고 그 동안 쌓아온 인맥과 노하우로 생생한 현장을 취재한 게 얼마 만인지.. 역시 기자는 현장에서 힘을 얻으며 살아간다는 걸 새삼 느끼게 됐다. 더 많은 팩트를 그리고 영상을, 음성을 확보하려고 온 종일 뛰어다닌 기분에 퇴근길마저 가벼웠다. 오랜만에 먼 곳에 사는 친구들과 지인들도 전화를 걸어와 뉴스를 봤다며 안부를 물었다. 그래 맞다. 그 날 하루 나는 기자였고 대한민국의 중심에 서 있었다.

기자도 마음 아파한다
사고 당일, 어둠이 짙게 깔리고 나서야 나는 귀가했다. 집에는 이모님이 와 계셨다. 물론 가스 폭발 사고 때문이라는 걸 한 눈에 알 수 있었다. 사고 현장을 가까이에서 취재한 내게서 ‘가스가 왜 폭발했는지?’ ‘사돈 어르신에게는 어떤 영향이 있는지?’를 자세히 알고 싶으셔서 기다리고 계셨다. 하지만 아직 밝혀진 게 명확치 않아 뭐라고 말씀드리기가 어려웠다. 다만 사돈 어르신이 계신 곳에서 사고가 발생한 것으로 지금까지 추정되고 있고, 어쩌면 폭발의 원인 제공자가 될 수도 있다며 조심스럽게 말을 건네야 했다. 이모님에게는 청천벽력과 같은 말일 수 있기에 매우 조심스러웠다. 그리고‘아직 단정지을 수 없다’는 말을 애써 강조했다. 이모님도 병원 응급실로 후송된 사돈 어르신의 매우 처참한 순간을 힘겹게 말씀해 주셨다. 또 화상 정도가 너무 심해서 헬기로 서울의 큰 병원으로 옮겨졌고 곧 수술을 받아야 할 것 같다고 하셨다. 이종 사촌형도 병원에 가 있다고 하셨다. 나는 그저 사돈 어르신이 건강하시기만을 뒤늦게 기원할 뿐이었다.

다음 날 나는 가스 폭발 사고 현장을 다시 찾아 후속 취재에 나섰다. 사고 현장에는 국립과학수사연구원 조사관들과 경찰서 감식반원들이 나와 가스 누출과 폭발 원인을 규명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이들을 상대로 조사 과정과 추정 폭발 원인 등을 추가로 취재 했다. 또한 사고 현장에서 수백미터 떨어진 건물까지 진동이 감지되고 건물 파편이 날아가면서 피해도 계속 불어나고 있어 지원 대책이 어떻게 마련되고 있는 지도 알아봤다. 후속 취재를 통해 가스 폭발 사고 발생 이튿날 소식을 다시 뉴스로 보도했다. 이렇게 둘째 날 취재도 지나갔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왔다.

이모님은 이튿날에도 나를 또 기다리고 계셨다. 사고에 관한 새로운 얘기를 듣고 싶으신 거였다. 하지만 국과수와 경찰의 진전된 수사 상황을 이모님에게 제대로 전할 수 없었다. 사고 발생 장소와 원인 등의 상황들이 이모님의 염려를 키울 것이라는 판단 때문이었다. 이모님은 답답해 하셨고, 이종 사촌형도 궁금한 마음에 전화가 걸려왔다. 가족들은 방송과 신문, 인터넷 매체 등에서 보도되는 내용에 매우 민감해 있었다. 그렇기에 나는 명쾌한 대답을 해 줄 수 없었다. 사돈 어르신의 상태는 점점 악화되고 있었다. 이종 사촌 형은 수술 일정을 잡았다며 많이 괴로워했다. 가족들이 많이 지치고 힘들어하고 모습 때문에 나도 가슴이 아팠다.

사고 이후에 갖가지 소문과 억측이 지역에 나돌면서 가족들을 더 괴롭혔다. 가스 폭발 원인에 관한 억지부터 사돈 어르신 신변에 관한 추측까지 이런 것들이 가족들을 몹시 괴롭혔다. 일일이 나열할 수 없지만 가족들은 환자의 고통에 눈물 흘리고 이런 소문과 억측에 또 한번 울어야 했다. 내게도 억울함과 답답함을 호소했다. 나는 이런 모습을 곁에서 보며 속만 태울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동료 기자까지 그런 소문을 듣고 와 신빙성이 있는 것처럼 얘기할 때는 아주 속상했다. 내 주변 사람들을 적극적으로 대변해주지 못하는 현실이 그렇게 답답한 적은 없었던 것 같다.

나는 사고가 발생한 지 사흘 만에 선배 기자가 복귀해 본래 출입지역으로 다시 돌아왔다. 이번 사고와 직접적이지 않지만 어떤 식으로든 나와 연관된 취재 현장이 왠지 껄끄럽다는 기분도 들고 있었기에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삼척시내 정서가 그 사고로 인해 뒤숭숭해졌고 서로를 비난하는 현수막이 내걸릴 정도로 민심이 흉흉한 게 현실이었다. 하지만 내가 취재한 현장을 마무리 짓지 못했다는 아쉬움도 다른 한편으로 남아 있었다. 여하튼 여러 감정이 나를 혼란스럽게 했다.

사고에 대한 취재를 인계하고 나니 사돈 어르신의 안부가 더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이모님으로부터 화상 때문에 수술을 받으신 사돈 어르신을 면회한 일을 들을 수 있었다. 사돈 어르신은 말을 못하실 정도로 고통에 시달리고 계셨다. 게다가 지역에 떠도는 온갖 소문을 들으신 탓인지 ‘꼭 진실을 밝혀 달라. 억울하다’며 가족들 앞에서 하고 싶으신 말을 직접 펜으로 쓰지 못하신 채 온 힘을 다해 손가락으로 종잇장에 그리셨다(?)고 했다. 안타까웠다. 결국 사돈 어르신은 그런 고통을 겪다가 엿새 만에 숨을 거두셨다. 그리고 가족들은 오열했다. 현장을 취재한 나도 괴로웠다.

다시 만난 새로운 김ㅇㅇ씨
몇 달 후, 국과수와 경찰은 사고 건물에 가스가 새어 있는 상태에서 알 수 없는 불이 나 사고가 났다는 수사 결과를 내놨다. 사실상 원인은 명확히 규명되지 않은 것이다. 조사 결과는 허무함 그 자체였다. 그 동안 가스 폭발 사고 피해자들에게 엄청난 금액의 성금이 답지했고 사고 수습도 많이 진척돼 안정을 되찾아 갔다.

하지만 명확히 규명되지 않은 사고 원인조차 유가족에게는 고통이었다. 또한 피해 복구와 성금 모금의 모든 과정이 아픈 상처였다. 사고로 인한 피해를 파악하는 과정에서 그리고 성금을 나누는 과정에서 유가족들은 가족을 잃은 것도 모자라 온갖 눈총을 받아야 했다. 소유한 건물에서 사고가 났다는 이유로 꽤심한(?) 죄인 취급을 받고 있었다. 때로는 이웃 사촌에게 때로는 공무원에게 그러했다. 하지만 이런 뒷얘기는 사고 현장을 처음으로 취재했던 내게 별 의미(?)가 없었다. 나는 벌써 몇 개월째 고통 받는 친인척을 보며 안쓰러워하는 일개 동네 기자에 불과했다.

‘내가 처음에 사고 현장을 더 면밀하게 취재해 남들이 모르는 걸 알아냈다면 사정이 달라졌을까?’
‘사고 처리 과정을 가족들에게 자세히 얘기해 줬으면 저들이 덜 고통스러웠을까?’
‘지금까지 내가 사고를 계속 취재하고 있다면 어땠을까?’ .....

갖가지 후회와 미안한 감정이 밀려 들었다. 유가족들은 사고로 인해 정신적으로 신체적으로 약해져 병원에서 치료를 받기도 했다. 이종 사촌형은 지금도 답답할 때마다 전화를 걸어와 이것 저것 푸념을 늘어 놓는다. 사고 이후의 처리 과정에서 답답함이 생기다보니 묻는 것인데 나는 지금 아는 것도 없고 아무 것도 도와줄 게 없는 무능력한(?) 기자이자 동생일 뿐이다. 그래도 ‘지방에서 기자한다면 뭔가를 해줄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걸었을 텐데 이종 사촌형에게 절망만 안겨준 것 같다.

기자 생활을 하다보면 평범한 일상도 많다. 그러나 기사화가 되지 않지만 사람들 속에 숨어 있는 일들을 알게 되어 울고 웃을 때도 종종 있다. 특히나 지역 기자는 그러하다. 낯선 현장과 사람보다는 친근한 현장과 사람이 더 많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번 취재 현장처럼 내 주변 사람과 마음을 같이 해 주지 못해 마음 아팠던 적은 없었다. 기자가 고민해서 해결될 상황은 아니다. 하지만 ‘냉정’과 ‘인정’이 교차하는 게 기자의 현실이다.

사실 사돈 어르신은 초등학교 시절에 뒷집 아저씨였다. 우리 가족이 새로 이사한 집의 뒷집에 살고 계셨고, 십 수 년이 지나 ‘나’와는 사돈으로 맺어졌다. 그리고 작년 여름 나는 사돈 어르신을 취재 현장에서 뵙게 되었다. 그것이 사돈 어르신의 마지막 모습이다. 오로지 취재 현장에 대한 의욕과 열정으로 나는 그 당시에 사돈 어르신에게 평소처럼 안부(?)를 여쭙지 못했다.

그래서 하늘은 올해 초에 새로운 김ㅇㅇ씨를 만나게 해준 것 같다.
사돈 어르신의 명복을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