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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혈의 시리아, 자유와 평화를 꿈꾸다

국민일보 박유리 기자  2013.11.04 15:4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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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여름은 지겹고 습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파업 여파로 정직은 예고된 것이나 마찬가지였고, 복잡한 심경을 꾹꾹 누를 만큼 뭔가 새롭고 열정적인 취재 대상이 필요했는지 모른다. 며칠 뒤, 어쩌면 몇 주 뒤에 떨어질 정직 처분을 앞두고 시리아 취재 계획을 세웠다. 스스로에게 말했다. ‘괜찮아, 그래도 여전히 취재할 거니까.’

정직 즈음 동네방네 소문을 내고 다녔다. 해외 취재를 간다는 소문은 참기름 냄새처럼 이 사람에서 저 사람으로 번져갔다. 나를 위한 조치였다. 중간에 포기하고 싶거나 상황이 막힐 때, 스스로 낸 소문에 책임을 지려는 보증수표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소문 덕분에 상황이 어려운 가운데 꾸역꾸역 떠날 수 있었다.

예상대로 징계 처분이 떨어지던 날, 책 몇 권을 싸서 ‘대기 발령석’으로 옮겼다. 갑자기 끊어진 라디오 소리처럼 자리에서 빠져나가는 나를 동료는 미안하고 어색하게 바라봤다. 집에 처박혀 시리아사태 취재 계획을 세워나갔다. 그러나 한국과 수교조차 맺지 않은 시리아 사태에 관한 자료가 없는 것은 기본이고,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전문 인력도 전혀 없었다. 한국의 중동 전문가는 대다수 터키나 이집트 전문가이기 때문이다. 우선 취재 목표를 터키 이스탄불에 본부를 둔 임시정부 시리아국가위원회(Syrian National Council·SNC)로 잡았다. 당시 시리아국가위원회는 사태를 해결하기 위한 국제 외교회담 ‘시리아의 친구들’에서 시리아 측 대표를 맡고 있었다. 현재는 시리아국가연합(Syrian National Coalition)으로 확대 개편돼 카타르에 대사관을 개설했다. 또 최근 조바이든 미국 부통령이 SNC와 양자 회담을 갖고 지지 의사를 밝혔으니 취재 당시보다 국제사회의 지지를 더 많이 받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당시는 대다수 외신이 전황과 국제사회 움직임, 난민 문제에 집중할 때였기에 시리아국가위원회에 관한 기사는 기사에서 몇 문장 정도였다. 물론 이조차 한국 언론은 다루지 않았다.

시리아국가위원회를 취재해야겠다는 결심이 서기까지 많은 질문이 내 안에 꿈틀거렸다. 유수의 세계 언론이 시리아에 관한 보도를 쏟아내는데 이 시점에서 간과되는 가치와 취재 대상은 뭘까? 지나간 한국 근현대사와 시리아의 역사도 겹쳤다. 열강의 틈바구니 속에서 독립과 자주를 꿈꾸던 조선의 역사를 외신은 어떻게 기록했을까? 그들이 한국의 역사를, 한국의 이야기를, 우리의 시선으로 썼을까? 그렇지 않았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나는 시리아인들의 관점에서 이 사태를 보고 싶었다.

외신과 당당하게 경쟁하겠다는 욕심도 컸다. 그들은 나를 모르겠지만, 나는 그들과 비슷한 아류작을 쓰는 기자로 자위하고 싶지 않았다. 매뉴얼까지 마련된 분쟁 취재 경험, 과거 중동 지배를 바탕으로 한 정보력, 취재원들에게 어필할 수 있는 외신 브랜드, 2년간 선도적으로 보도한 노하우…. 그게 영국 언론이었다. 같은 야마와 방식으로는 외신을 절대 이길 수 없다는 점도 작용했다. ‘한국의 ○○○ 기자, 분쟁지역 입성’이라는 겉멋 든 헤드라인과 결기 띤 기자 얼굴을 내며 연예인 행세하기도 싫었다. 제목 한 줄과 사진 한 장이 전부일 뿐 어차피 내용은 외신과 똑같은 기사는 쓰지 않아야겠다는 자존심이었다.

포부는 야무졌다. 그러나 취재방법은 없었다. 시리아 대사관이 한국에 있길 하나, 연락책이 있길 하나. 이태원을 뒤져 시리아인을 접촉했지만 그마저 허사였다. 포기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무렵, 시리아국가위원회 회원에게 메시지를 남겼다. 소셜네트워크서비스를 통한 첫 연락이었다. 답장은 기대하지 않았다.

“저는 한국의 박유리 기자입니다. 시리아인들이 끊임없이 숨지고 있다는 소식에 깊은 슬픔을 느낍니다. 한국도 많은 분들의 희생과 피로 지금의 민주화에 이르렀습니다. 당신을 만날 수 있을까요” (2012년 9월 3일)

답장이 왔다. “자유를 향한 투쟁은 어디든 비슷하다”는 내용이었다. 숨통이 트이는 것 같았다. 그러나 취재 협조에 대한 답은 차일피일 미뤘다. 며칠에 한 번씩 메시지를 보내 취재 방향을 설명했다. 국제기자연맹(IFJ)과 한국기자협회 회원증, 영문 재직 증명서도 보냈다. 시간은 점차 회사로 돌아갈 날을 향해갔다.

9월 20일. 마지막으로 시리아국가위원회에 메시지를 남겼다. 답을 보내지 않거나 애매하게 답하는 그쪽에 불편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다음날 확답을 받았다. 10월 초에 오라는 내용이었다. ‘아! 이제 가는구나!’ 물론, 그날 하루만 좋아라했다.

산 넘어 산이라더니. 이번엔 통역이 문제였다. 동행 취재를 약속해 놓았던 시리아인은 갑자기 갈수 없다고 말을 바꿨다. 출국일은 10월 3일인데 한국-아랍어 통역인을 구할 수 없었다. 한국에서 고급 아랍어를 쓰는 통역인은 많지 않다. 전화취재로 요르단, 이집트, 바레인, 사우디 등 교민 사회를 뒤졌지만 다들 고수준의 아랍어는 불가능하다고 답했다. “한국에서 아랍어 교수가 사우디에 온 적이 있었는데 그 분도 아랍어를 잘 못했다. 그만큼 아랍어가 어렵다”는 대답도 들었다(참고로 취재지역인 터키는 터키어를 쓴다. 그리고 취재 대상이 되는 시리아인은 아랍어를 쓴다).

포기와 희망 사이를 왔다 갔다 할 즈음, 여러 경로를 통해 레바논대 박사 출신의 여성 통역인을 소개받았다. 젖도 떼지 않은 아기의 어머니였다. 더 이상 대안이 없다고 판단해 통역인과 아기, 남편까지 비행기를 타고 터키로 와달라는 메일을 보냈다. 아기 동행 취재가 과연 가능할까? 이름과 전화번호밖에 모르는 시리아인을 터키에 가면 만날 수는 있을까? 출국 전날까지 심란했다.


터키 아타튀르크공항: 10월 4일 새벽 1시
새벽. 러시아를 경유해 17시간 만에 터키 아타튀르크 공항에 도착했다. 땅에 닿자마자 향신료 냄새가 강하게 코끝에 닿았다. 공항에 도착해 아기를 안고 있는 통역인 여성과 남편을 처음 만났다. 숙소로 향하는 차 안에는 어색한 침묵이 어둠처럼 내렸다. 거리에는 한국에서 볼 수 없는 늑대만한 개들이 구멍 난 타이어마냥 아무데나 퍼져 있었다.

잠깐 눈을 붙이고 아침에 일어났다. 처음으로 시리아국가위원회의 시난에게 전화를 걸었다. 첫 약속 장소는 악사레이(서울로 치면 명동쯤 되겠다)의 대형쇼핑몰. 그는 몇 차례 전화를 통해 시간을, 또 장소를 바꿨다. 우리에 대한 불신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최종 확정된 첫 약속 장소는 시리아국가위원회 본부가 있는 무역센터였다. 터키어로 된 주소지 하나 달랑 들고 택시를 탔다. 나와 통역인 가족 모두 터키어를 모르기 때문에 매번 그렇게 주소지를 찾아갔다. 터키 택시는 네비게이션이 안 되고 기사들도 영어를 못하는데, 2주간 국제 미아가 되지 않은 것만 해도 천만다행이다.
택시에 내려 무역센터 정문 분수대에 도착하니 정장을 입은 중동 남성이 다가왔다.“Yuri(유리)?” 한국에서 메시지를 주고받던 시난이었다. 가방과 소지품 검사를 거쳐 시리아 독립기가 걸린 본부에 들어갔다. 긴 중앙통로를 따라 몇 개의 방이 딸려 있었다. 긴장감이 밀려왔다.

지금부터 체류 기간은 약 2주. 현재로선 교감 지수 0점. 당장 핵심적인 질문을 하기보다 신뢰감을 주는 데 주력하자고 마음먹었다. 내가 왜 여기에 왔는지, 당신들은 서방 언론에 어떤 불만을 가졌는지를 들어보자고. 시난은 시리아국가위원회 활동가 세 명과의 만남을 각각 주선했다. 모두 정치 수배자들이었다. 이들을 통해 정치 수배범 현황과 정권의 억압, 저항의 역사를 파악할 수 있었다.

“시리아의 민주화 운동과 혁명은 보도되지 않고 전쟁만 보도되고 있더군요.”
“언론은 서방 국가들이 (시리아 사태에) 개입하지 않는 변명을 하고 있어요.”
이런 이야기를 듣고 있을 즈음, 시난이 인터뷰를 끊고 급하게 말했다.
“압둘 바세트시에다 위원장이 인근 호텔에 도착했습니다. 인터뷰, 도와줄게요.”
지금 당장? 오늘? 당시 위원장을 맡았던 시에다의 일정은 늘 불확실했다.

위원장은 1주일에 하루 정도는 이스탄불, 나머지는 해외 외교 일정 때문에 바빴다. 한국에 있을 때부터 시난은 위원장 인터뷰를 장담할 수 없다고 말했었다.

급하게 택시를 타고 ‘힐튼 가든 인 호텔’로 향했다. 내가 탄 택시 앞으로 시리아국가위원회의 여성 멤버가 탄 다른 차량이 빠르게 달리고 있었다. 신이 도운 것처럼 첫날부터 모든 일이 잘 풀리다니. 택시에선 터키풍의 흥겨운 음악이 나왔고, 창문 밖으로 불어오는 바람은 따뜻했다. 창문 밖으로 손을 뻗어 바람을 쥐었다.

그러나, 위원장은 쉽게 만날 수 없었다. 도착 한 시간이 지나도록. 시에다 위원장 대신 조지 사브라 대변인이 나타났다. 사브라 대변인은 위원장이 촉박한 일정으로 휴식을 취해야 한다는 말을 전했다. 대신 사브라와 한 시간 정도 대화하며 시리아국가위원회의 윤곽을 파악할 수 있었다.

다음날 시리아국가위원회 기자회견이 열렸다. 중동 매체 기자들이 몰려들었다. 당시 터키와 시리아 간 폭격으로 전운이 한창 고조된 때였다. 지금 바로 한국에 기사를 보낼 수만 있다면, 내가 정직이 아니었다면 하는 아쉬움도 들었다. 대신 시간이 지나면 버려지는 내용보다는 장기 기획 쪽으로 맞추어서 취재를 하자고 결정했다. 기자회견 중간 중간에 위원장에게 가서 명함을 건네거나 나를 각인시켰다. 시난은 이날부터 프랑스로 떠났고, 나를 도와줄 시리아인은 없었다.

그 다음날 또 위원장이 묵은 호텔에 찾아갔다. 집행위원들의 회의가 있었다. 역시 그는 나타나지 않았다. 호텔 프론트에서 검색해도 위원장 이름은 없었다. 호텔에서 무작정 기다리는, 일명 뻗치기를 하고 있을 때 한 중동 남자를 만나기도 했다. 리비아 민주화 운동을 하는 사람이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그와 더 이야기하고 싶었지만 호텔 어디에서 튀어 나올지 모르는 위원장 행방 때문에 더는 대화할 수 없었다.

두 시간쯤 지났을까. 시에다 위원장이 야외 테라스에서 집행위원들과 대화하는 게 목격 됐다. 내가 다가가자 그가 미안하다는 말을 건넸다. 인터뷰할 때 상대방이 미안해하면 얼마나 금상첨화인가! 그 미안함으로 더 자세히, 길게 이야기해줄 텐데. 물론 센스 있는 여성 통역인은 울다 지친 듯한 아기까지 안고 내 옆에 서 계셔 주었다. 아기가 위원장을 더욱 미안하게 했으리라. 지금 와서 하는 얘기지만 아기가 있는 어머니라고 해서 일을 못 할 거라고 섣불리 생각했던 건 모두 나의 착각이었다. 그녀와 남편은 아기를 안은 채 함께 호텔 곳곳에서 뻗치기를 해주고, 중동문화에 익숙하지 않은 나를 코치해주었다.

그는 결국 회의를 중단시켰다. 집행위원들에게는 기다리라는 말을 전하고 내가 있는 로비로 나왔다. 집행위원들은 대다수 망명 정치인이거나 학자였다. 고대문명 학자인 시에다 위원장은 인터뷰를 통해 시리아와 혈맹관계인 북한과 한국의 차이를 설명하기도 했다. “언젠가 한국이 민주화되면, 수교가 되길 희망합니다.” 그는 이렇게 말하며 취재노트에 친필 서신을 써 주었다. 그 인터뷰가 끝나고서야 터키 도착 3일 만에 편히 잠을 잘 수 있었다.

반정부단체에 제대로 된 홍보팀이 있을 리 만무하지만 취재 기간 동안 시리아 반정부 활동가 14명과 이스탄불에 거주하는 도시의 난민들, 중동문제 전문가, 레바논의 분쟁전문 기자와 시리아 내에서 전쟁을 치르고 있는 반군과 접촉하며 취재 수첩을 채웠다. 오늘 조금이라도 안면을 튼 사람들에게 지인 소개를 부탁하고, 그렇게 만나게 된 취재원이 또 다른 사람을 소개시켜주고. 우연과 인연, 의지와 땀이 켜켜이 쌓인 시리즈가 ‘유혈의 시리아, 자유와 평화를 꿈꾸다’이다. 여기까지 쓰니 벌써 할당된 원고지 30 매가 다 되어간다(이 책의 주인공은 나 혼자가 아니니 매너상 이만 접는다. 오늘의 기사 마감 시간이 다가오지만 절대 쓰기 싫어서 그런 것은 아니다!).

터키어를 못하는 나와 통역인 가족을 실은 택시가 한밤에 어두운 숲길로 들어가는 바람에 바들바들 떨던 기억이 지금도 아련하다. 한국말로 “강도 아냐? 우리 어떡해?”를 연발하고 있을 때, 택시 안 라디오에서 싸이의 ‘강남 스타일’이 나오지 않았더라면 증폭되는 불안을 감출 수 없었을 것이다. 고마운 싸이! 이 길 저 길 지나 숙소에 도착했을 때야 그 기사는 강도가 아닌 걸로 판명 났다. 그 때가 한국으로 치면 초가을, 터키로는 여름의 한복판이었다. 그리고 지금 나는 2013, 봄의 초입에 서 있다. 몇 주 뒤 레바논에 있는 시리아 난민촌으로 다시 떠난다. 또 다시 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