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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탈북자 체포 북송 위기

동아일보 주성하 기자  2013.11.04 15:35: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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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2월 중순부터 시작된 북송 위기 탈북자 구명 운동은 한국 사회가 4·11 총선이라는 큰 화두를 코앞에 두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한 달 넘게 한국 언론의 관심사를 붙들어 둔 이슈가 됐다. 이는 한국 사회를 넘어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과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까지 언급할 정도의 국제적인 관심사가 됐고, 세계 유수의 수많은 언론들도 관련 내용을 지속적으로 보도했다.

이렇게 탈북자 구명운동이 세계적인 이슈로 부각된 것은 우연한 일은 아니다. 당시의 기사들에는 중국에서 체포된 31명의 탈북자를 구해보려고 몸부림친 나의 피눈물이 담겨있다.

나는 탈북자이다. 미래가 보장되는 김일성대를 졸업했지만 자기 국민조차 지키지 못해 굶어죽게 하는 반인민적 독재정권에 분노해 탈북을 결심했고 실행에 옮겼다.
하지만 나는 중국에서 체포돼 북송됐고, 중국과 북한에서 6개 감옥을 이곳저곳 옮겨 다니며 죽음의 문턱까지 가기도 했다. 정치범이 돼 영영 종신형을 살 처지에까지 몰렸지만 운명은 나를 그냥 죽게 하진 않았다.

기적처럼 살아 여러 위험을 넘어 한국까지 왔지만, 이후 가족은 뒤따라 한국으로 오다 중국에서 체포돼 북송됐다. 그리고 보위부 감옥에서 폐인이 되었고 나는 살아서 다시 가족을 볼 수 있을지 알 수 없다.

이러한 아픔은 나 개인만의 예외적인 것이 아니다. 오늘날 한국에 입국한 탈북자 2만4000여명의 마음을 열어보면 진한 피가 뚝뚝 떨어지는 아픔을 누구나 간직하고 있다. 중국에서 탈북자 한 명이 한국까지 무사히 도착하는 동안 네 명은 성공 못하고 북한에 북송되고 있다. 이들은 무슨 특별한 사상이나 이념을 가진 것은 아니다. 단지 굶어죽지 않으려고 몸부림치던 평범한 사람들이다.

하지만 김정은 체제는 탈북자를 사살하라는 명령을 내렸고, 그래서 국경을 넘다 총에 맞아 죽는 사람들, 감옥에 끌려가 굶어죽는 사람들, 정치범수용소에서 영영 나오지 못하는 사람들이 억울한 죽음의 기록조차 남기지 못하고 있다.

나는 내가 기적처럼 살아 한국에 와 동아일보의 기자까지 된 데는 신의 뜻이 있다고 생각한다. 바로 하고 싶은 말도 남기지 못하고 죽어가는 탈북자들을 기록하고, 대신해 함께 울어주는 일이 내 앞에 주어진 운명이라고 생각한다. 그걸 위해 나는 북한의 가장 어두운 곳까지 가봤고, 가족과의 생이별이란 아픔도 겪고 있다고 생각한다.

제3회 조계창국제보도상 수상작인 “중국 탈북자 강제북송 관련 보도 시리즈”는 이름도 없이 죽음의 길로 끌려갈 운명에 처한 31명 탈북동포들의 절규를 혼신의 힘을 다해 담았던 기사이다.

지난해 2월 8일 중국 심양에서 체포된 12명은 내가 그들이 연길을 떠날 때부터 알고 있었다. 기자로 일하면서 중국을 떠도는 탈북 꽃제비들을 구출하는 일도 함께 하다보니 중국 내 사정은 잘 알고 있다. 다음날 9일 12명 명단도 받았다.

탈북자가 체포되면 우선 돈으로 조용히 빼내는 것이 불문율이다. 현지 조력자에게 공안과 접촉하냐고 물으니 “공안이 1인당 10만 위안 부른다. 그래서 12명 다 모아서 50만 위안에 뽑으려 지금 협상 중이다”고 대답하는 것이었다.

공안과 비밀접촉을 하고 있던 와중에 잇따라 심양에서 다른 팀이 잡혔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원래 중국에선 체포된 지 24시간 이내 뽑지 못하면 참 힘들다. 게다가 이번엔 수십 명이라 돈으로 해결하기 어렵다는 것을 직감했다.

그 사건은 김정은 체제 출범 이후 첫 대량 탈북자 체포였다. 애도기간 탈북자는 3대 멸족하라는 지시가 내려왔단 말도 나오긴 하지만 어찌됐든 이번에 북송되는 사람들은 시범 케이스에 걸릴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협상이 진행 중인 기간엔 이 사실이 공개되면 안됐다. 그러는 와중에 한 북한전문 인터넷 신문이 이틀 뒤인 10일 ‘탈북자 심양에서 10명 체포’라는 기사를 홈페이지에 게재했다. 그래서 급히 전화를 걸었다. 사실 협상이 진행 중이니 기다려 달라고…그들도 이 바닥을 잘 아는지라 고맙게도 기사를 내려주었다.

그런데 그 사이 어느 언론이 잽싸게 그 인터넷 신문 기사를 보고 또 받아쓴 것이었다. 또 전화해 사정을 이야기했더니 기사를 내려주었다.

나는 10일 편집국장을 만나 이야기했다.
“탈북자들이 체포됐다는 기사는 지난기간 수없이 나와도 별 효과가 없었다. 이번에도 단순한 기사만 쓰면 기사가 묻힌다. 한번 중국과 정식으로 해보고 싶다. 후진타오 주석에게 탈북자를 구해달라는 호소문 형식으로 편지를 써보려 하는데 편지가 뒤로 밀리면 힘이 확 빠지니 1면을 꼭 좀 내주셨으면 한다.”

국장은 “생각해보자. 중국과의 문제도 있고 하니 쉽게 결정할 문제는 아니다”고 대답했지만 결국 1면을 내주었다. 사실 일개 기자가 12억 중국의 주석에게 편지를 써서 1면에 싣는 그런 전례 없는 기사 형태는 결정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체포된 탈북자 가족들은 그동안 조용히 외교통상부와 국가인권위를 찾아가 도움을 달라고 호소했다. 우리 외교부는 언제나 그랬듯이 최선을 다한다는 말을 되풀이했다. 물론 나는 조용한 외교란 사실 조용해달라는 외교라는 것을 잘 안다. 맨 날 최선을 다한다고 하지만 최선을 다하지 않는다는 것을 너무 잘 안다.

그러는 와중에 13일 중국 공안과의 물밑 협상이 결렬됐다는 소식을 들었다. 어쩔 수 없이 14일엔 터뜨리려고 기사를 다 출고하고 5판을 뽑았는데, 연합에서 그날 저녁 국가인권위에 탈북자 가족들이 진정을 했다는 사실을 알고 기사로 실었다. 신문은 하루 전부터 기사를 써야 해서 늘 통신사보다 보도가 늦을 수밖에 없다.

그렇게 14일 아침 기사는 나갔지만 반향이 별로 없었다. 중국 대사관 앞에선 그 흔한 시위도 없었다. 사실 기자는 있는 사실 전하는 게 주 업무지만 이번엔 마음먹고 시작한 일을 아무 의미 없이 보도 몇 개로 끝내버리긴 싫었다. 그래서 여론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나는 전화를 돌리기 시작했다.

지금 와서 고백컨대 중국대사관 앞에 최초로 나와 시위를 한 사람은 사실 나의 동생뻘 되는 사람이다. 이슈 확대에 결정적인 기여를 한 차인표 씨가 나오게 된 것도 15일 탈북자 대안학교인 여명학교 조명숙 교감에게 전화한 것이 계기가 됐다.
“어른보다 탈북 청소년들이 시위에 나와 호소하면 무엇보다 여론이 움직일 텐데. 친구들이 잡혀간다는데 나서 주십시오.” 실제 체포된 사람 중엔 여명학교 학생의 가족도 있었다.

조 교감은 처음에 “방학인데…”하고 말꼬리를 흐렸고 “아이들 데리고 나가는 것이 옳은 일일까요”라며 확신을 못했지만 결국 나와 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리고는 21일 탈북학생은 물론 여명학교 후원자인 차인표를 위시해 연예인 수십 명까지 함께 나와 깜짝 놀라게 했다.

그때부터 모든 신문 방송이 탈북자 강제북송 이슈를 1면으로 다루기 시작했다.
기자가 여론을 조작했다고 비난을 할 진 모르겠지만, 또다시 이런 일이 있다면 나는 또 그랬을 것이다. 시위라면 몸을 사리던 탈북자들도 인터넷에서 스스로 약속하고 뛰쳐나왔다.
특히 16일 광주에서 나서준 탈북자들은 여론의 불씨가 죽을까 말까 하는 기로에서 극적으로 분위기를 반전시키는데 아주 큰 역할을 했다. 아이 맡길 곳이 없어 태어난 지 100일 밖에 안 되는 아이를 품에 안고 나온 한 탈북여성을 보고 나는 눈물이 나왔다.

중국대사관 앞 시위에 항상 앞장선 박선영 의원도 여론 확산에 결정적 기여를 했다.

여론이 확대되는 게 느껴지는 것이 지지하는 메일이 오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었다. 중국에 있는 한 북한 주민이 내게 보내온 메일의 머리말만 그대로 인용해본다.

“인터넷을 통하여 당신과 당신의 활동에 대하여 알게 되였습니다. 인간의 자유와 권리, 참다운 민주주의를 위한 성스러운 사업에서 분투하고 계시는 당신에게 숭고한 경의를 표합니다. 당신의 붓과 펜은 그냥 간단한 붓과 펜이 아니라 그야말로 총대입니다. 앞으로도 백절불굴의 정신으로 끝까지 싸워주기 바랍니다.”
이런 메일들을 받는 사람은 쉽게 포기하기 어렵다.

2월 14일 첫 보도 이후 탈북자들의 북송이 확인된 3월 14일까지 나는 한 달간 모두 33개의 관련 기사를 썼으며 이중 10개가 1면 기사였다. 대다수가 타 언론에서 보도하지 않은 단독 취재기사들이었다. 정말 밤늦게까지 취재하고 또 취재했다.

이번 보도의 파장은 컸다.
미 의회에서 3월 5일 탈북자 강제 북송 중단 청문회가 열렸고 이 청문회에서 내가 쓴 기사 3건, 즉 ‘후진타오 주석에게 보내는 호소문’과 ‘아! 꽃동산’ ‘중국 탈북자에게 죽음의 낙인 찍어 북송했다’등이 영어로 번역돼 참석자들에게 배포됐다.
탈북자 북송을 반대한다고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 힐러리 클린턴 미 국무장관이 발언했다.

한국의 경우 이 보도는 정부에서 조용한 외교를 주장하던 탈북자 외교를 처음으로 방향 전환하는 계기가 됐다. 정부는 유엔인권이사회에서 이 문제를 제기했고, 이명박 대통령도 중국이 인도주의적 관점에서 탈북자 송환을 막아줘야 한다고 대국민 연설과 방한한 중국 외교부장과의 회담을 통해 두 차례 언급했다.

한나라당은 물론 민주당까지 합세해 탈북자 강제 북송을 반대한다는 결의안을 채택했다. 이전에는 찾아볼 수 없었던 일이었다.

하지만 여론으로 탈북자들을 구출하진 못했다. 중국은 끝내 자신의 입장을 바꾸지 않았다. 이번 탈북자 북송 반대 운동은 중국의 완고함을 또 한번 확인한 계기가 됐다. 그러나 헛된 일은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나는 구하지 못한 탈북자들에 대한 마음의 빚을 갚는 심정으로 지난 1년 동안 60명이 넘는 탈북자들을 한국으로 구출해왔다. 그래도 중국엔 구해야 하는 탈북자들이 너무 많고 이들이 한국으로 오다 체포되는 일도 비일비재로 일어난다.

나는 또다시 기회를 본다. 이 글을 쓰는 시점의 어제도 심양에서 한국행 탈북자 한 팀이 또 체포됐다. 그러나 기사를 쓰지 않았다. 그렇게 짤막한 보도를 해봐야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점을 알기 때문이다.

중국 내 탈북자 보도는 안다고 다 쓸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생명이 걸린 문제다. 엄청난 고뇌가 따를 수밖에 없다. 그런 고뇌가 담긴 지난해 내가 쓴 기자칼럼을 마지막으로 인용하며 이 글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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족쇄를 차고 북한으로 끌려가는 탈북자의 절망을 나는 안다. 직접 겪었기 때문이다.
죽음의 북송 길에 오르는 혈육을 지켜보며 가슴이 말라드는 가족의 고통을 나는 안다. 직접 경험했기 때문이다.
끌려간 가족과 영영 생이별한 아픔도 안다. 그건 바로 지금의 나이기 때문이다.

그 심정을 어찌 글로 옮길 수 있을까.
이달 14일 나는 중국 후진타오(胡錦濤) 주석에게 한국으로 오다 체포된 탈북자 31명을 석방해 달라는 편지를 썼다. 매일같이 관련 기사를 발굴해 끊임없이 탈북자 구명운동의 불길이 번져 나가도록 노력했다.

지금은 이 문제가 국제적 이슈로 커졌다. 그 덕분에 주위에선 쉽지 않은 일을 했다고 박수도 쳐주지만 고백하건대 정작 나는 너무 아프다.

이번 일은 사실 나의 신념을 거스른 행동이다. 지난 시절 나는 중국 내 탈북자 문제는 이슈화할수록 손해라고 여겼다.

대표적 사례로 과거 탈북자들이 중국 내 외국공관에 집단 진입을 하는 일이 수시로 벌어지던 때가 있었다. 성공한 수십 명은 살았지만 그 대신 중국의 탈북자 검거 선풍을 불러일으켜 수천 명의 탈북자가 체포돼 북송됐다.

한국으로 향하는 탈북자의 흐름은 얼음 밑 강물처럼 꾸준히 이어져야 한다는 것이 나의 신념이었다.

그런데 갑자기‘사고’를 친 이유는 무엇일까. 8일 선양(瀋陽)에서 한국행 탈북자 12명이 체포된 지 불과 몇 시간 뒤 나는 그들의 명단을 전달받았다.

10년 넘게 탈북자 문제를 다뤄온 경험은 이들이 결국 북송될 것이라고 말해주고 있었다. 물밑 석방 교섭이 끝내 결렬됐다고 현지 활동가들이 알려오기까지 엿새간 나는 끊임없이 자문자답했다. 묻어버릴까 터뜨려버릴까….

터뜨린다는 것의 의미를 나는 잘 안다. 중국의 탈북자 검거 선풍을 불러와 잡히지 않을 수 있었던 탈북자들이 체포돼 북송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북한도 더욱 강경해질 것이다. 수십 명이 될지, 어쩌면 수백 명이 될지도 모를 목숨들이 내 선택에 달린 것이다.

하지만 끝내 나는 터뜨리는 길을 택했다. 김정은 체제 이후 더 나빠질 수 없을 정도로 가혹한 탈북자 처벌과 삼엄한 국경 경비, 더는 좋을 수 없는 북-중 밀월 등으로 탈북의 흐름은 이미 꽁꽁 얼어붙었다고 판단했다.

현재의 탈북 환경과 탈북자 처벌이 사상 최악이라는 데는 아무도 이의가 없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선 이번 일을 묻어버려 얻을 실리보다 국제사회가 주목해 얻을 실리가 더 클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결정적 이유는 따로 있다. 죽게 된 혈육을 제발 살려 달라고 애원하는 가족들의 애끊는 절규를 직접 맞닥뜨린 것이다. 그 앞에서 누가 어떤 계산을 할 수 있으랴. 내가 겪었던 아픔을 저들이 이어가리란 사실이 나를 흔들어 놓았다.

가족이 북송된 뒤로 나는 겨울에도 난방을 하지 않고 살았다. 얼어붙은 감방 속에서 추위와 공포에 떨 혈육을 생각하면 밤에 이불을 덮는 것조차 죄스럽다.

새우잠으로 밤을 보내고 아침이면 출근해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웃음을 지어야 하는 그 아픈 삶을 저들 또한 살아야 하다니.

결국 혹시 구명될지도 모른다는 실낱같은 희망을 여론에 걸어보기로 했다.
하지만 여론이 커질수록 강화될 단속과 처벌 때문에 피해를 볼 이름 모를 탈북자들에겐 나는 죄인이다.

오, 아픔 밖에 없는 선택이 나의 운명이라니…
이번 선택이 잘한 것인지 지금은 알 수 없다. 그 평가는 당장 내릴 수도, 남이 내려줄 수도 없다. 먼 훗날 오직 양심만이 나를 심판할 것이다. 부디 희생 보다 더 많이 구할 수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