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찰문건 세상에 공개되다>
2012년 3월27일 오후 대법원 민원실.
“이 자료는 지금 대법관실에 올라가 있는데, 글쎄요. 찾는데 시간이 걸릴거예요. 두 시간 뒤쯤 다시 오시죠”
다시 초조해졌다. 총리실의 민간인 불법 사찰 사건을 취재한지 한 달. 재판기록에 첨부된 CD를 찾기 위해 대법원을 찾았지만 민원실 직원의 말을 듣고 나니 힘이 쭉 빠졌다. 불길한 예감을 애써 억누르며 법원 앞 찻집에서 시간을 때웠다.
“이거 맞나 확인해 보세요. 복사해갈 공 CD는 가져 오셨나요?”
증거 제 133호, 바로 그 CD였다.
9부 능선은 넘었다. 하지만 CD안에 어떤 문서가 들어 있는지는 확신할 수 없었다. 뛰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잰걸음으로 민원실을 나왔다. 주차장까지 걸어가는 그 짧은 순간, 마음속으로 수십 번은 ‘제발’을 외쳤다. 차에 올라 타자 마자 노트북을 켰다. 유난히 길게 느껴지는 부팅시간, 다시 한번 ‘제발’을 되뇌며 노트북에 CD를 밀어 넣었다. 그리고 2600여건의 사찰 문건이 세상에 공개됐다.
<민간인 사찰 피해자는 김종익씨 뿐?>
2008년 9월. 국민은행의 자회사인 KB한마음의 대표였던 김종익씨에게 날벼락이 떨어졌다. 몇 달 전 자신의 인터넷 블로그에 무심코 올린 동영상 한편 때문이었다. 일명 ‘쥐코 동영상’이라고 불리는 이 영상은 이명박 대통령의 대운하 정책 등을 비판한 것으로 김씨가 만든 것도 아니었다. 당시 200만 건 가까운 조회수를 기록할 정도로 인터넷에 널리 퍼져있던 것을 블로그에 올려 뒀을 뿐이었다.
총리실 공직윤리지원관실 점검 1팀은 영장도 없이 KB한마음의 사무실을 수색했다. 명백한 불법이었다. 또 회사의 목줄을 쥐고 있는 국민은행도 찾아가 협박했다. 사찰팀은 김씨를 촛불집회의 배후세력이나 민주당 이광재 의원의 후원자로 낙인 찍고 철저하게 무너뜨렸다. 김종익씨는 회사와 직원들을 살리기 위해 대표직에서 물러났다. 그리고 가지고 있던 회사 지분까지 모두 처분했다. 평범한 시민이던 김씨는 이렇게 회사를 빼앗기고 실업자가 됐다. 하지만 김씨의 고통은 철저히 은폐됐다.
묻혀 버렸던 이 사건은 2010년 6월 민주당 의원의 폭로와 MBC PD 수첩을 통해 세상에 알려졌다. 군부 독재 정권에서나 있을법한 사건에 국민들은 경악했다. 여론에 밀려 검찰이 수사에 착수했다.
검찰수사는 형식적이었다. 민간인 불법 사찰 피해자는 김종익씨 한 명으로 결론짓고 청와대의 개입 여부도 밝혀내지 못했다. 검찰은 이인규 공직윤리지원관 등 총리실 직원 7명만을 기소했고, 다시 사건은 잊혀졌다.
<해적방송 ‘리셋 KBS뉴스’, 진실을 캐다>
2012년 3월초 전국언론노조 KBS본부(KBS 새 노조)가 파업을 시작하면서 기자들은 ‘리셋 KBS 뉴스팀’을 꾸렸다. 총리실 장진수 주무관의 양심고백이 막 터져 나온 뒤라 언론관심은 온통 장진수의 입에 쏠려 있었다.
총리실의 민간인 불법사찰은 크게 두가지 흐름으로 사건이 전개됐다. 총리실이 권한을 남용해 민간인을 뒷조사한 불법 사찰과 검찰 수사를 앞두고 컴퓨터 하드디스크를 파괴해 증거를 인멸한 사건으로 나뉜다.
장 주무관은 총리실 공직윤리지원관실이 2008년 검찰 수사에 대비해 어떻게 증거를 없앴는지를 상세히 밝히고, 그 지시를 청와대로부터 받았다고 폭로했다. 이는 ‘윗선은 없다’던 검찰 수사결과를 뒤집은 것이었다.
장 씨의 등장으로 잊혀 갔던 민간인 불법사찰 사건은 다시 뜨거운 의제로 떠올랐고 시민들은 분노했다. 하지만 정작 불법 사찰의 규모와 내용은 여전히 베일에 가려져 있었다.
과연 검찰이 발표한 대로 민간인 사찰 피해자는 김종익씨 한 사람 뿐이었을까. 취재진은 너무도 당연한 이 의문을 붙들고, 증거 인멸과 함께 사라져버린 불법 사찰 그 자체를 주목했다.
총리실은 지극히 비상식적이고 무리한 방법을 동원해 증거를 없앴다. 다급했고 숨겨야 할 것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런만큼 어딘가에 사찰의 실체를 밝혀줄 흔적이 남아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갖고 원점에서부터 취재를 시작했다.
하지만 장진수씨 외에 다른 사건 관계자들은 모두 입을 다문 상태에서 총리실 사찰팀의 행적을 취재하기가 쉽지 않았다. 다른 방법이 필요했다.
실마리는 판결문에 있었다. 판결문을 꼼꼼하게 읽어 내려가다가 ‘2008년 하명사건 처리부’라는 문건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이 문건을 검찰이 법원에 증거로 냈다면 이를 통해 불법 사찰의 전모를 확인 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갖게 됐다. 그 즉시 증거기록과 공판기록을 구했다.
기대했던 대로 ‘2008년 하명사건 처리부’는 증거기록에도 문서로 첨부돼 있었다. 그런데 문제가 있었다. 검찰이 내용을 가리고 법원에 제출해 구체적인 사찰 내역을 확인할 수 없었다. 제목만 남아있는 빈껍데기의 문건이었다.
취재는 난관에 봉착했지만 의혹은 더 커졌다. 검찰은 왜 수많은 증거기록 가운데 유독 하명사건 처리부만 내용을 가리고 법원에 제출했을까. 당연히 세상에 알리기 곤란한 내용이 적혀 있을 것이라는 의심을 할 수밖에 없었다.
다시 15000 페이지에 이르는 증거기록과 공판기록을 한장 한장 넘겨 가며 분석했다. 다행히 성과가 있었다. 검찰이 법원에 증거기록을 내면서 ‘2008년 하명사건 처리부’등의 문서 파일이 담긴 CD도 함께 제출한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번에도 기대는 반반이었다. 이 CD에도 빈 껍데기 뿐인 문서만 담겨 있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방법은 하나였다. 대법원에 증거 열람복사 신청을 해 직접 CD를 확인 해야 했다.
결과는 기대 이상이었다. 먼저 온전한 형태의 ‘하명사건 처리부’가 있었다. 의심했던 대로 여기에는 김종익씨 이외에 다른 민간인과 공기업 임원들에 대한 사찰 내역이 기록돼 있었다. 하명의 주체는 청와대(Blue House)를 뜻하는 ‘BH'로 표기돼 있었다.
이 뿐만이 아니었다. KBS와 YNT 등 언론기관에 대한 사찰문건 등을 포함해 불법 사찰로 의심되는 문건들이 쏟아져 나왔다.
이렇게 공개된 문건은 빙산의 일각이다. 총리실 사찰팀은 이미 검찰 수사에 앞서 컴퓨터 10대의 내용을 모두 삭제했고, 종이문서 4만5천장을 파쇄해 버렸다. 그런데 운이 없게도 한
수사관이 usb 메모리를 검찰에 압수당했고, 그 안에서 일부 사찰 문건이 드러난 것이다.
<부조리한 권력과 부역하는 검찰>
국민을 보호해야할 국가가 초법적인 권한으로 국민을 감시했다. 이것이 총리실의 민간인 불법 사찰이다.
해산됐던 총리실의 공직윤리지원관실이 다시 만들어진 때는 광우병 파동에 이은 촛불집회가 확산된 뒤였다. 당시 서울 거리를 가득 메운 촛불은 미국산 쇠고기 수입을 둘러싼 정부의 굴욕적인 대미 외교 정책에 대한 국민들의 분노가 폭발한 것이었다. 촛불의 촉발제는 광우병 파동이었지만 촛불의 의미는 여기에 그친 것이 아니었다. 이명박 정권의 소통 부제에 대한 국민들의 준엄한 경고였다.
하지만 이명박 정부는 촛불의 참 뜻을 헤아리지 못했다. 아니 애써 외면했다. 힘으로 촛불을 끌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이명박 대통령의 사태인식을 잘 보여주는 유명한 일화가 있다. 청와대 민정수석실이 촛불집회에 대해 보고하자 이 대통령은 “만명의 촛불은 누구 돈으로 샀고, 누가 주도했는지 보고하라”고 격노했다고 한다.
아래로부터의 민주주의를 스스로 경험해보지 못한, 오너의 지시와 복종에 길들여진, 그리고 효율과 성과만이 정의인 곳에서 살아온 사람의 비뚤어진 시대인식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바야흐로 공포정치의 시작이었다.
총리실 공직윤리지원관실 점검 1팀은 철저히 영포라인 인맥으로 꾸려졌다. ‘완장’을 찬 사찰팀의 위세는 대단했다. 권력 유지에 조금이라도 방해가 되는 사람은 모두가 사찰대상이었다. 민간인뿐만 아니라 전 정부에서 임명된 공기업 임원, 심지어 대통령의 통치철학을 비판한 여당 의원들까지 뒷조사를 했다. 김종익씨 사건이 폭로되기까지 약 2년 동안 총리실 사찰팀은 그야말로 거칠 것이 없었다.
민간인 불법사찰이 폭로되자 검찰은 이미 드러난 것만 문제 삼고 사건을 마무리 했다. 진실은 은폐됐다. 이것은 검찰의 부실 수사다.
서울중앙지검이 특별수사팀을 만들어 수사를 시작한 것은 2010년 7월5일이다. 여론에 떠밀리다 총리실이 수사의뢰를 하자 마지못해 시작한 수사였다. 사건의 성격상 증거를 확보하는 것이 최우선이었다. 하지만 압수수색은 나흘뒤인 7월9일에야 진행됐다. 검찰이 시간을 벌어주는 사이 총리실 사찰팀은 대놓고 증거를 없앴다. 주말에 출근해 종이 문서를 파쇄기로 갈아 버리고, 컴퓨터는 하드디스크를 떼어내 영구적으로 복구가 불가능하도록 파괴했다.
장진수 주무관은 청와대 인사의 지시를 받고 증거를 인멸했다고 폭로했다. 또 이 과정에서 검찰과 조율이 끝났다는 말도 들었다고 했다. 검찰 내부에서도 민망할 정도의 봐주기 수사였다는 볼멘 소리가 터져 나왔다. 검찰 수뇌부는 눈과 귀를 닫았다. 그것으로 수사는 끝나는 듯 했지만 은폐된 진실은 하나씩 다시 밝혀지고 있다.
<대통령에게 ‘권고’ 하다>
검찰이 재수사에 나섰다. 이번에도 마지못해 한 수사였다. 결과는 역시나 실망스러웠다. 몸통은 빠지고 하수인들에게만 죄를 물었다.
검찰은 재수사를 통해 사찰 사례 500건을 추가로 밝혀냈다지만 이 가운데 단 3건만을 형사처벌 했다. 나머지는 사찰 내용이 단순 동향보고이고 위법 행위가 확인되지 않았다며 문제삼지 않았다. 검찰이 성역 없이 제대로 수사했다고 믿는 국민이 얼마나 될까.
이렇듯 검찰의 꼬리자르기식 재수사가 끝나고 다시 기억에서 조금씩 잊혀 가던 때 국가인권위원회가 이 사건에 대한 직권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2013년 2월7일, 이명박 정부의 임기를 보름 정도 남긴 때였다.
인권위는 보고서 서문에 KBS 새노조가 민간인 사찰 문건을 폭로한 것이 직권 조사의 배경이 됐다고 적었다.
인권위는 이 보고서에서 국무총리실 공직윤리지원관실이 조사한 불법사찰 사건은 모두 429건이며 이 가운데 다른 기관의 ‘하명’을 받은 것이 128건이라고 밝혔다. 여기에는 청와대 민정수석실의 하명 사건도 포함됐다.
민정수석실의 개입을 인정하기 어렵다던 검찰의 수사결과와는 대비되는 조사 내용이다. 강제 수사권이 없는 인권위도 밝혀낸 내용을 왜 검찰은 못한 걸까.
이같은 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인권위는 대통령에게 “국가기관에 의한 불법사찰이 더 이상 반복되지 않도록 국민들이 신뢰할 수 있는 조취를 취하라”라고 권고했다.
비록 강제성이 없고 정권 말기에 발표된 ‘뒷북 조사’라는 논란도 있지만, 국가인권위원회가 대통령에게 시정 권고를 한 것은 이례적이다.
<언론이 바로 서야 나라가 바로 선다>
공영방송인 KBS와 MBC가 동시에 파업을 했다. KBS 95일, MBC 170일, 유례없는 장기 연대 파업이었다. 여기에 국가기간 통신망인 연합뉴스도 가세했다. 무엇이 언론인들을 길거리에 나서게 했는가. 부끄러움이다. 왜곡보도 만이 부끄러운 것이 아니다. 보고도 모른 척하고, 지레 겁먹고, 부딪히기 보다는 피해가기에 급급했던 지난 몇 년이 못견디게 부끄러웠다. 열심히는 살았지만 기자로서, 저널리스트로서 치열하게 살지는 못했다.
한진중공업 김진숙씨는 자기 신념을 지키기 위해 309일 동안 고공투쟁을 했다. 쌍용자동차 해고사태 이후 희망퇴직한 노동자와 그 가족 20여 명이 죽었다. 서슬 퍼런 독재정권이 민주주의를 무너뜨리고, 살인적인 노동환경에 노동자들이 죽어가던 80년대의 일이 아니다. 총리실이 영장도 없이 민간인을 사찰하고, 검찰이 멋대로 정권에 면죄부를 주어도 되는 나라. 백번 양보해도 언론의 책임이 크다.
민간인 사찰 피해자 김종익씨에게 물었다.
“불법 사찰을 당한뒤 왜 곧바로 언론에 알리지 않았습니까?”
“믿어 주기는 할까. 말을 하면 오히려 더 큰 피해를 보는 것은 아닐까. 그때는 워낙 언론도 모두 할 말을 못 하던 때니까...”
그리하여 기자의 삶은 무겁다. 무거워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