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의 바른 길, 가슴 깊이 새기겠습니다.”
지난달 12일 정상 발행된 한국일보의 1면 첫 문구다. 58일간의 편집국 폐쇄 후 정상 발행된 지 24일이 지난 현재 한국일보가 “살아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석기 의원 녹취록 공개’ ‘댓글논객 좌익효수도 국정원 직원’ 등 굵직굵직한 특종을 터트리면서 지난 6월 편집국 폐쇄 이후 통신사 기사로 채워졌던 ‘짝퉁 한국일보’의 오명을 씻고 있다.
한국일보는 지난달 30일 ‘이석기 녹취록’을 단독 입수, 요약본 등을 보도해 사회적으로 큰 파장을 낳았다. 국가정보원과 검찰로부터 내란음모죄 및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수사를 받고 있는 통합진보당 이석기 의원에 대한 증거로 회자되던 녹취록이었다. 녹취록 입수는 한국일보 법조팀이 오래전부터 노력을 기울인 결과였다. 내부에서 수위와 방법에 대한 논의는 거쳤지만 주저하지는 않았다. 한국일보 한 기자는 “현 국면에서 녹취록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 독자나 국민들이 사태를 판단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고 봤다”며 “이후 국정원이나 통진당에 대해 균형을 잡고 보도하는 것은 우리 몫”이라고 말했다.
지난 2~3일자 신문에는 A4 62쪽 분량의 녹취록 전문을 4면에 걸쳐 공개했다. 한국일보는 2일자 1면에서 “전문 공개 요구가 높고 녹취록의 진위 및 내란음모 혐의 적용의 타당성 등을 둘러싸고 논란이 이어지고 있어 독자 여러분께 객관적인 판단 근거를 제공하기 위해 전문 공개를 결정했다”고 밝혔다.
한국일보는 동시에 녹취록에 대한 법조계의 시각 등 다양한 해석도 내놨다. 법조계 해석에 따르면 결정적 증거로 제시된 지하혁명조직의 5월12일 회합 녹취록 내용을 볼 때 법 적용이 잘못됐다는 지적이다. 즉 녹취록 내용으로는 ‘내란음모’ 적용이 어렵다는 분석이다. 한국일보 한 관계자는 “녹취록 내용을 충실히 전달하되 내란음모 혐의의 적용 타당성이나 근거 등에 의문을 제기하며 균형을 잃지 않으려 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밖에도 진보진영의 자성이나 이석기 의원 의정활동 행적 추적 등 전방위적으로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일부에서는 한국일보의 녹취록 공개가 국정원의 의도에 말린 것 아니냐는 주장도 있었다. 하지만 한국일보는 국정원 대선 개입 문제도 놓치지 않았다. 지난 2일자 1면에는 ‘댓글 논객 좌익효수도 국정원 직원’ 기사를 단독 보도하며 국정원과 검찰에 일침을 가했다. 한국일보는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폭동으로 규정하는 등 좌파, 호남, 여성을 비하한 글 3500건 가량을 인터넷에 올려 물의를 일으킨 아이디(ID) ‘좌익효수’ 사용자가 검찰 수사 결과 국정원 직원으로 확인됐다”고 밝혔다. 그동안 좌익효수는 국정원 대선 개입 의혹 수사과정에서 국정원 의심 아이디로 추정됐으나, 국정원은 “좌익효수는 국정원 직원이 아니며 국정원 직원이라고 유포한 사람은 수사 의뢰하겠다”고 반박해왔다.
국정원을 바라보는 ‘투 트랙’ 시각은 사설에서도 나타난다. 한국일보는 이석기 녹취록 공개로 본래 수사 중이던 국정원 대선 개입 의혹 사건의 축소를 경계했다. 2일 ‘내란음모사건에 묻혀 가는 국정원 개혁 이슈’ 사설에서는 “내란음모 사건이 아무리 충격적이라고 해서 주요 현안들을 도외시해선 안 된다”며 “특히 또 다른 국기문란 사건인 국정원의 정치개입 문제는 결코 덮어 둘 수 없다”고 밝혔다. 이어 “만약 적당히 넘어간다면 국정원이 자신을 향한 칼날을 피하기 위해 내란음모 사건을 터뜨렸다는 물타기 논란을 증폭시킬 것”이라며 “진상규명, 책임자 처벌, 국정원 개혁은 반드시 이뤄져야 한다”고 밝혔다. 한 기자는 “국정원 정치 개입 사건이나 개혁 요구가 있는 시기에 30년 만에 내란음모죄를 꺼낸 든 의도가 의심스럽다”며 “합리적인 의문을 제기하는 것”이라고 밝혔다.
이외에도 20여일 동안 크고 작은 단독 보도가 이어지고 있다. ‘북한 영변서 방사성 물질 제논 3차례 검출’, ‘카카오 경영진 3명, 미국 사정당국 수사 받아’, ‘전재용, 전두환 돈으로 오산 땅 샀다’, ‘라정찬 알앤엘바이오 회장 금품 수수’, ‘현무-3 미사일 국군의 날 첫 공개’ 등이 한국일보가 꼽는 기사다.
내부에서는 특종 등으로 일부 상기된 분위기가 있긴 하지만, 현재 기업회생절차를 신청해놓은 상황이라는 점에서 말을 아꼈다. 아직 지면이 안정화됐다기엔 경영 문제 등 남아있는 과제가 있기 때문이다. 인력부족 및 두달 여간의 공백 등 어려움도 있다.
다만 기자들이 한국일보 지면 정상화에 많은 이들의 지지와 성원이 있었던 만큼 한국일보의 기치인 중도적 입장에서의 공정한 균형자로 보답해야 한다는 공감대와 열의가 높다는 전언이다. 향후에는 ‘슬로우 콘텐츠’를 강화한 지면 개편 등도 구상하고 있다.
한국일보 한 기자는 “아직 경영이 정상적인 상황은 아니지만 사실에 근거한 균형감 있는 기사, 신문을 고민하고 있다”며 “기자들도 기사나 지면 방향에 대해 토론하고 자성의 이야기를 나누며 기존의 전통을 잃지 않고 한 걸음씩 나아가자는 생각”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