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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정보도’를 위한 싸움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국정원 시국회의가 지난 6일 여의도 KBS 본관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KBS와 MBC의 국정원 대선 개입 사건 보도 행태를 규탄하는 구호를 외치고 있다. (사진=언론노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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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찍히면 죽음” 파업 참가자 음지·불참자 양지
“가슴 아파서” 자기 회사 뉴스 안보는 기자들
“한국 언론의 비극적 현실” 울분 속 내일은?“지금, 행복하십니까?” 한국의 양대 공영방송 KBS와 MBC 기자들에게 이런 질문을 한다면 어떨까. 공정방송을 복원하겠다는 외침은 잦아들고, 냉소와 자조가 두 공영방송에 먹구름을 드리우고 있다. 여기저기서 피로와 무력감을 호소한다. 지친 동료들은 하나둘 정든 일터를 떠난다. 총파업이 직접적인 사유가 됐건 아니건 남은 동료들에게는 상처가 된다. 떠난 자들이 말한다. ‘당신들’을 믿는다고. 남은 자들이 묻는다. “다시, 희망을 이야기할 수 있을까.”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전쟁이나 대형 사고와 같은 끔찍한 경험 후 겪게 되는 정신적 불안 증세다. 지난해 170일간의 파업 이후 MBC 구성원들은 이와 비슷한 혼란과 심리적 고통을 겪어야 했다. 퇴로 없이 달려온 파업의 긴 레이스는 그들에게 깊은 상흔을 남겼다.
지난해 파업은 MBC 역사상 어떤 파업과도 달랐다. 불과 2년 전에도 39일간의 긴 파업이 있었고 이근행 당시 노조 위원장이 해고되는 등 대량 징계가 발생했지만, ‘평 조합원’들에까지 불이익이 가해지진 않았다.
그런데 지난해 파업이 끝난 뒤에는 참가자 전원이 인사평가에서 최하 등급을 받고 ‘교육명령’이란 이름 아래 회사 밖으로 쫓겨나거나 한직으로 밀려났다. 파업 당시 회사 편에 섰던 이들은 승승장구했다. 파업이 낙인이 되어 조직은 둘로 갈라졌다. 보도를 바꿔보자고 파업을 했는데, 보도만 빼놓고 모든 것이 다 바뀌어 버렸다.
KBS의 시계는 2008년 8월 8일에 멈춰 있다. KBS 구성원들에게 그날은 치욕의 역사다. KBS에 18년 만에 공권력이 투입되고, 정연주 사장이 정권에 의해 강제 해임된 날. 그 날 이후 모든 것이 바뀌었다. 노조가 갈라서고, 조직 내 소통의 통로는 꽉 막혀 버렸다. 뉴스 시청률과 영향력은 항상 1위라는데, 기자들의 자괴감은 컸다. 보도를 바꿔보겠다고 지난해 90일간 파업을 벌였으나 아무것도 바뀌지 않았다.
MBC의 A 기자는 ‘뉴스데스크’를 안 본지 꽤 됐다. “가슴이 아프고, 마음이 가지 않아서”다. 주위 동료들도 마찬가지다. 요즘 MBC 대다수 기자들은 “회사를 가도 내 회사 같지 않고, 뉴스를 봐도 내 뉴스 같지 않다”고 토로한다.
최근 SNS 상에서 ‘오늘의 MBC 뉴스데스크’라는 제목의 만화가 떠돌았다. 대충 이런 내용이다. ‘해운대 피서객 절정-동해안 식인상어 출몰-매미 소음 대책-모기가 없는 이유. 끝’ 울컥하지만 반박할 수 없다. 사실이니까.
지난 8일자 뉴스데스크를 보자. 이날 울산이 관측사상 최고 기온을 기록했다는 소식으로 시작해 8번째 리포트까지 전부 날씨 관련 뉴스로 채워졌다. “날씨 뉴스”니 “어설픈 VJ특공대”니 하는 조소가 내부에서도 터져 나온다. 전국언론노조 MBC본부(MBC노조) 김병헌 민실위 간사는 “뉴스가 생활정보프로그램으로 전락했다”며 “나가야 할 뉴스가 못 나가고 자극적이고 말초 신경을 자극하는 뉴스가 핵심부에 배치되는 상황”이라고 비판했다.
일상적으로 벌어지는 방송 사고와 오보에 기자들의 자괴감은 더 커지고 있다.
뉴스데스크는 지난 6월 28일 톱뉴스를 두 번 내보내고 제목과 리포트 내용이 맞지 않는 기사를 방송하는 등 “사상 최악의 방송사고”를 냈다. 그러나 이는 언론에 회자조차 되지 않았고, MBC 내부에선 아무도 처벌받지 않고 넘어갔다. 지난달에는 류길재 통일부 장관이 긴급 기자회견을 열었는데 MBC만 현장 중계를 하지 못한 일도 있었다. 담당 기자가 한 시간 전에 공지된 기자회견 일정을 확인하지 못한 탓이었다.
MBC노조 관계자는 “정상적인 상황이라면 상상도 못할 일”이라며 “경험 있는 기자들이 외곽으로 돌고 시용기자 출신이나 간부들 눈치만 보는 기자들이 중요한 자리에 배치되면서 이런 문제가 끊이지 않고 있다”고 지적했다.
기자들이 팔짱만 끼고 있는 것은 아니다. MBC노조 민실위는 수시로 보고서를 내어 보도 문제점을 비판하고 있다. 노조 관계자는 “전혀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는 걸 알지만 역사를 기록하는 차원에서 보고서를 내고 있다”며 “우리 뉴스가 원래 이렇지 않았다는 것을 상기시키려는 의도도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보도국 간부들은 오히려 “왜곡”이라며 발끈한다. 최근에는 민실위의 기자게시판 아이디를 일방적으로 삭제했다. KBS 보도국 간부들은 아예 성명을 내어 국정원 대선 개입 문제와 관련해 공정하고 객관적으로 보도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지난 7일 KBS를 항의 방문한 민주당 의원들에게는 “국정원 건은 정파적 사안이라 균형점을 찾기 힘들다”고 항변하며 “그럼에도 노력 중”이라고 밝혔다.
이에 대해 지난 2월 KBS를 퇴사한 김용진 뉴스타파 대표는 “정확한 팩트가 있어도 정치적 이슈의 유불리만 판단하며 정치적 공방으로 몰아가는 그들이야말로 정치적”이라며 “부끄러운 짓을 하고도 자각하지 못하는 자들이 KBS라는 중요한 기관에 책임자로 있다는 것이 한국 언론과 우리 사회의 비극적 현실”이라고 말했다.
김용진 대표는 그 현실을 참다못해 KBS를 뛰쳐나왔다. 그를 따라 최경영 기자가 나왔고, 최근엔 김경래 기자까지 KBS를 떠났다. 남은 동료들은 그야말로 ‘멘붕’이었다.
기자들은 “이럴 때일수록 역량 있는 기자들이 남아서 KBS를 지켜줘야 한다”며 “다 떠나면 KBS는 누가 지키냐”며 극구 만류했다. 하지만 더는 잡을 ‘명분’이 없었다. KBS의 B 기자는 KBS를 난파선에 비유하며 “배가 가라앉고 있는데 빨리 탈출해야 하지 않겠나”라고 말했다.
MBC에서도 지난 2월 최일구 앵커를 시작으로 오상진 아나운서, 문지애 아나운서, 나경은 아나운서 등이 차례로 사표를 던졌다. 하지만 퇴사한 이들 외에도 원래의 자리로 돌아오지 못하는 이들이 많아 빈자리는 더 크게 느껴진다. 법원이 지난 3월 파업 이후 비제작부서 등으로 발령 받았던 기자, PD, 아나운서 등의 원직 복직을 판결했으나 실제 제작 현장에선 배제되는 사례가 허다하다. MBC노조는 “법원의 명령으로 복귀하기는 했지만 ‘파업 참가자들에게는 가급적 일을 주지 않는다’는게 아나운서국의 불문율”이라고 지적했다.
파업은 여전히 낙인이다. MBC의 C 기자는 “파업 당시 ‘사측’이었냐 아니었냐가 인사의 잣대가 된다”며 “파업 참가자는 한직으로 내몰리고 사측이었던 이들에게는 보상과 특혜가 주어진다”고 꼬집었다. 현재 MBC 보도국의 정치·경제·사회 등 주요 부서는 시용기자 출신이나 파업에 참가하지 않은 기자들이 주축을 이루고 있다. 이들은 대형 오보를 내도 처벌 받기는커녕 오히려 ‘영전’하고, 뉴스 앵커, 해외 특파원 등의 자리를 꿰찬다. 지난해 파업 도중 뉴스 진행에 복귀해 논란을 일으켰던 모 아나운서는 한 달 동안 “개인 사유”로 휴가를 다녀오고도 정상적으로 뉴스에 복귀하고 인사 평가에서도 전혀 불이익을 받지 않았다. 노조 관계자는 “전례가 없는 일”이라며 “이러니 신상필벌이 될 수 있겠나”라고 지적했다.
파업 투쟁을 이끈 노조 지도부에게도 트라우마가 남았다. 이 때문에 노조의 행보도 더욱 조심스러워질 수밖에 없다. 하지만 언제까지 ‘숨고르기’만 하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당장 MBC는 내년 3월 김종국 사장의 연임이냐 새 사장 선임이냐 하는 국면을 맞게 된다. 그 전에 김재철 전 사장이 해지한 단체협약을 새로 체결해야 하는 과제가 있다. 사측은 “공정방송 관련 조항 백지화”를, 노조 측은 “공정방송 제도 강화”를 주장하고 있어 또 한 번의 전면전이 불가피할 전망이다. 쉽지 않으리란 것은 노조도 각오하고 있다.
최승호 MBC 해직 PD는 “할 수 있는 것을 해야 한다”면서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도 이해해주지 않는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