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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 사관학교'에서 '생존의 기로'까지

'1등 조간' 한국일보의 어제와 오늘

장우성 기자  2013.05.08 13:5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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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계에서는 ‘주인 없는 회사’의 문제를 지적하는 말들이 많다. ‘오너’가 없는 언론사일수록 의사결정이 늦고 책임지는 사람이 없다는 주장이다. 하지만 오너가 전권을 쥔 언론사 역시 명백한 리스크를 안고 있다. 한국일보가 이를 보여주고 있다.

‘기자 사관학교’로 불리던 한국일보의 쇠퇴는 언제, 무엇 때문에 시작됐을까. 여러가지 원인이 있지만 언론계에서는 신문시장 격변에 대한 전략 실패와 주변 환경의 악화, 장강재 전 회장 사후 장씨 일가의 리더십 분란 때문이라고 입을 모은다.

1987년 6·29 선언 이후 신문 설립이 허가제에서 등록제로 바뀌자 종합일간지는 급증했다. 6·29 전 30개였던 일간신문은 1년 사이 78개로 늘어났다. 조선일보가 1980년대 급성장하면서 한국일보는 ‘1등 조간신문’의 자리도 내주게 됐다.

이 상황에서 한국일보는 공격적 경영전략을 선택했다. 1989년 7월 제일 먼저 월요판 발행을 시작해 ‘휴일 없는 신문’ 시대를 열었다. 다른 경쟁 신문들이 다같이 따라오자 한국일보는 섹션의 효시인 ‘부록’ 도입, 매일 24면 발행 등으로 증면에 들어갔다. 최첨단 제작시설을 갖추는가 하면 영호남 지역에 인쇄공장을 세워 ‘전국 동시인쇄’를 감행했다. 1991년 12월에는 조석간 동시 발행이라는 초강수를 던졌다.

그러나 공격적 경영을 주도하던 장강재 전 회장이 1993년 8월 49세의 이른 나이에 별세하면서 한국일보에는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고 장강재 회장에 이어 셋째 동생인 장재국 대표이사 회장 체제가 시작됐지만 리더십 혼란의 ‘판도라의 상자’가 열렸다. 한마디로 ‘어린 세자와 선왕의 동생인 대군’ 사이에 권력투쟁이 시작된 것이다.

장강재 회장의 장남 중호씨는 설립자인 고 장기영-2대 장강재에 이은 장씨 일가의 후계자였지만 부친 별세 당시 20세의 약관으로 한국일보에 입사도 하지 못한 상태였다. 이에 한국일보는 명예회장에 재구(고 장기영 회장의 2남), 회장에 재국(4남), 사장에 재근(5남), 미주한국일보 사장에 재민(3남) 등 고 장강재 회장의 동생 4명이 분점하는 형태가 됐다. 후계자가 어린 상태에서 사실상 실권은 장재국씨가 쥔 셈이 됐다.

그러나 경영권 경쟁은 물밑에서 장중호-장재국-장재구로 나뉘어 전개되면서 내부 구성원 사이에 파벌까지 형성됐다. 세력 판도는 부침을 거듭하고 아군과 적군이 뒤섞이는 혼란 양상까지 초래했다. 이때 유능한 인력들이 하나둘 회사를 떠나고 충성심 위주로 인물이 등용되면서 한국일보는 속으로 곪아들어갔다는 지적이다. ‘한국일보 전성시대’의 원동력이었던 끈끈했던 팀워크는 옛말이 되기 시작했다.

급변하는 외부환경은 회사 정치가 안정되기를 기다려주지 않았다. 동아일보, 경향신문에 이어 중앙일보까지 조간신문 시장에 뛰어들며 거센 각축전이 전개됐다. 급기야 IMF 사태를 맞아 1999년 부채가 5000억원에 달해 부도 위기에 몰리면서 채권단이 ‘화의’를 결정하는 등 경영위기가 극단화됐다.

2002년에는 장재국 회장의 라스베이거스 거액 도박 파문이 터졌다. 이에 장재국 회장은 퇴진하고 구속까지 당하게 된다. 이때 채권단에 의해 완전 감자가 이뤄지면서 현 장재구 회장이 1대 주주로 등장해 회사 경영권을 맡는 대신 500억원 증자를 약속했다. 동생과 조카가 퇴장한 자리에 장재구 회장이 경영권 경쟁의 최후 승자가 된 셈이다.

권력투쟁은 끝났지만 한국일보의 위기는 끝내지 못했다. 누적 적자는 계속 늘어났고 부도설이 끊이지 않았다. 500억원 증자 약속은 장재구 회장이 취임한 지 3년이 지난 2005년이 돼서야 겨우 이뤄졌다. 여기에 한국일보 재기의 꿈을 부풀게 했던 중학동 사옥 재입주가 무산되고, 최근 전사적으로 매달려 성사 기대를 높였던 회사 매각도 결렬됐다. 그동안 자제해오던 한국일보 기자들의 ‘오너’에 대한 불신은 이제 안전핀이 제거된 상태다. 한국일보는 기자사관학교의 명예를 되살릴 수 있을까. 2013년이 중대 기로가 될 전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