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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폭행 사건 언론사별 보도준칙 만들어야

[기고]이충재 한국일보 논설위원

이충재 한국일보 논설위원  2012.09.12 18:1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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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충재 한국일보 논설위원  
 
오마이뉴스가 올해 1월1일부터 지난 6일까지 네이버에서 성폭행 키워드로 검색된 기사건수를 헤아려 보니 2만885건이었다고 한다. 언론들이 그야말로 쉴새 없이 성폭행 기사를 쏟아냈다. 신문과 방송 뉴스 보기가 두렵다는 독자와 시청자들의 항변이 나올 만도 하다.

 언론의 성폭행 보도는 국민의 알 권리 충족과 범죄 예방 효과라는 공익적 차원에서 이뤄진다. 하지만 요즘의 언론 보도 양태를 보면 선정성과 상업주의 색채가 도를 넘은 듯해 심히 우려스럽다. 공익을 가장해 대중들의 호기심과 관음증 충족에 일조하고 있는 것 아니냐는 생각마저 든다.


대표적인 사례가 조선일보의 나주 성폭행 범인 사진 오보 사건이다. 조선일보는 오보 다음날 사과문을 통해 “새벽까지 경찰과 주변인물 등 10여명에게서 범인이 맞다는 증언을 확보해 게재했다”고 밝혔다. 그만큼 나름대로 치밀하게 검증 과정을 거쳤다는 설명이지만 역설적으로 얼마나 특종을 하기 위해 매달렸는지를 보여준다. 그 사진 한 장 싣는 것이 국민의 알 권리 충족을 위해 그토록 화급한 일이었을까.


비단 조선일보만이 아니다. 거의 모든 신문과 방송이 피해자와 그 가족들의 인권을 고려하지 않았다. 진보나 보수언론 별반 차이가 없었다. 한 진보언론은 성폭행 피해 초등생의 일기를 1면에 큼지막하게 실었다. 범인의 이동 경로를 보여준답시고 항공사진을 넣은 화려한 그래픽으로 피해자 집과 폭행당한 장소를 알려준 신문도 있다. 방송 뉴스에서는 피해 아동의 집 내부를 구석구석까지 촬영한 화면을 보여줬다. 일부 언론은 피해 아동의 상처부위와 정도, 수술과정을 시시콜콜 묘사했다.


국민 누구도 알 권리 보장을 위해 이렇게 세세한 내용까지 알려달라고 하지는 않는다. 이런 보도는 오히려 독자들에게 심리적 거부감을 주고 여성과 어린이들을 공포와 충격에 몰아넣는다. 범죄 발생의 사회적ㆍ구조적ㆍ병리적 원인 등에 대한 진단과 대책 마련 등은 뒷전에 밀리기 십상이다. 과도한 보도가 사회 불안을 조성해 극단적인 대책과 부당한 사회 통제를 정당화하는 도구로 이용될 수 있다는 우려도 있다. 불심검문 부활과 물리적 거세법 발의, 사형제 존치와 집행 재개 여론 등이 그런 예다.


문제는 이런 뉴스들이 제작 과정에서 별다른 의식이나 고민 없이 취재되고 보도된다는 데 있다. 현장기자들은 자신이 취재하는 성폭행 사건이 사회에 얼마나 큰 파장이나 영향을 미칠지 심각하게 고민하지 않는다. 관행적으로 팩트를 챙기고 기사요건에 맞춰 송고할 뿐이다. 마감시간에 쫓긴 탓도 있겠지만 선배나 데스크로부터 성폭행 사건 취재 시 주의해야 할 사항을 제대로 교육받은 기자가 얼마나 되겠는가.


근본적으로는 대부분의 언론사에 성폭행 보도에 대한 준칙이 없기 때문에 생기는 일이다. 일부 언론사에 범죄 관련보도 준칙이 있긴 하지만 극히 원론적인 수준인데다 그나마도 취재기자나 데스크들이 내용을 제대로 숙지하고 있지도 못하다.


가장 먼저 부닥치는 흉악범 얼굴 및 실명 공개부터가 그렇다. 언론사별로 제각각이고, 기준도 명확하지가 않다. 그때그때 사건의 비중과 반향 등에 따라 판단하는 곳도 여럿이다. 흉악범 얼굴 공개는 2009년 연쇄살인범 강호순 사건 때 보수언론들이 ‘국민의 알 권리와 공익’ ‘흉악범 인권보다는 사회 안전망이 우선’이라는 이유를 들어 사진을 게재하면서 시작했다. 그 후 일부 진보언론을 제외하고 거의 모든 신문과 방송이 뒤를 따랐다.


이런 현실에 따라 한국신문방송편집인협회가 신문윤리실천요강을 개정해 얼굴 공개를 언론사 자율에 맡겼지만 결국 조선일보 오보사건 같은 사달이 벌어졌다. 언론사들은 최근의 과도한 성범죄 보도에 대한 사회적 비판을 성찰의 계기로 삼아야 한다. 더불어 성폭력 등 흉악범죄 보도준칙과 가이드라인을 만들어 시행해야 한다.


교육부 출입 당시인 1998년 기자단은 과열 입시경쟁 보도의 부작용을 줄이자는 취지에서 ‘대학입시 보도강령’을 만들었다. 대학의 수석합격자와 수능 수석, 수능 점수대별 지원가능 대학 예상 표, 고교별 대학 합격자수 등을 보도하지 않기로 약속한 것이다. 한동안 잘 지켜지던 이 강령은 국민의 알 권리를 내세운 일부 언론의 강령 파기로 흐지부지됐지만 일류대 중심의 입시 보도를 완화하는 효과를 거뒀다. 범죄 보도를 담당하는 사건기자들을 지휘하는 시경출입기자단 차원에서 이를 참고해 논의해보기를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