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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시 언론 중 유일하게 장준하 선생의 사망 원인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 1975년 8월19일자 동아일보 사회면 톱기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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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준하 선생이 사망한 이틀 뒤인 1975년 8월 19일, 동아일보는 사회면 톱으로 ‘장준하씨 사인에 의문점’이라는 기사를 내보냈다. 당시 언론 중 유일하게 장 선생 사망에 의혹을 제기한 보도였다.
동아일보는 이 기사에서 “검찰이 경찰의 수사 결과에 의문을 품고 최종 목격자인 김용환씨를 두 차례 소환하는 등 다시 조사를 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동아는 “△추락사고 지점은 산이 너무 험해 젊은 등산가들도 마음대로 오르내리지 못하는 경사 75도 길이 12m의 가파른 절벽인데 장(준하)씨 혼자서 아무런 장비없이 내려오려 한 점 △사고 현장 벼랑 위에 오를 때는 멀리 등산코스를 돌아 올라갔는데 내려올 때는 등산로 코스도 아닌 벼랑을 내려오려 한 점 △사고 직후 (목격자) 김(용환)씨가 장씨의 시계를 차고 있던 점” 등을 들어 ‘실족사’에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검찰이 목격자인 김씨가 사고 직후 경찰에 신고하지 않고 군부대에 신고한 점도 미심쩍게 보고 있다고 덧붙였다.
당시 동아가 보도한 이 같은 의문점은 현재까지도 명쾌히 풀려지지 않은 상태로 남아 있다.
그러나 동아의 이 특종 보도가 나온 날, 검찰은 서둘러 기자회견을 자청해 “동아일보의 보도는 사실과 다르다”며 이 사건을 실족사에 의한 사망으로 단정했다. 목격자 소환도 의례적인 것일 뿐이라고 해명했다.
검찰은 기자회견이 끝나기 무섭게 이 기사와 관련해 한석유 지방부장, 장봉진 의정부 주재기자, 성낙오 편집부 기자(현 대한언론인회 편집주간)를 소환 조사했다. 이 중 성 기자는 긴급조치 제9호 위반 혐의로 구속되기까지 했다. 열흘 간 갇혀 있다가 검찰의 기소유예 처분으로 풀러났으나 ‘진실의 대가’를 치러야 했던 것이다. 동아일보는 이 구속 소식 보도까지 막으려던 정부기관의 압력 속에 이를 단신 처리해 내보냈다.
이후 영남일보 사장을 지낸 성낙오 대한언론인회 편집주간은 당시 검찰이 조사 과정에서 “왜 제목을 이렇게 뽑았느냐”, “왜 이렇게 크게 다뤘느냐”, “의도가 있는 것 아니냐”고 추궁했다고 회상했다.
성 주간은 “기사를 사회면 톱으로 뽑으면서 (정권이) 틀림없이 문제를 삼을 것이라고 예감했다”며 “당시 기자들은 민주화를 위해 독재정권에 맞서는 정신을 갖고 있었다. 각오를 하고 신문을 냈다”고 말했다.
당시 동아일보는 장 선생이 사망한 다음날인 18일 역시 단신 처리한 다른 신문과 달리 1면, 3면, 7면 등을 할애해 비중있게 보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