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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다시 전철을 밟아서는 안 된다

[특별기고] 정일용 6.15 남측위원회 언론본부 공동상임대표

정일용 6.15 남측위원회 언론본부 공동대표  2011.12.20 17:4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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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일용 6.15 남측위원회 언론본부 공동상임대표  
 
“손바닥을 들여다 볼 수는 있으나 심장 속을 들여다 볼 수는 없다.”


19일 정오 북측이 김정일 노동당 총비서 사망 소식을 발표했다. 발생 51시간 30분만이었다. 17년 전 1994년 7월 9일 정오에 김일성 주석 사망을 북측이 알렸다. 이 때는 34시간 만이었다. 북쪽 땅 전역을 손금보듯 샅샅이 훑고 있다는 미국의 정보력도, 거금을 들여 일거수일투족을 추적하는 일본의 그것도, 북에 대해서 만큼은 인적 정보자산(휴민트)이 있노라고 큰소리쳐왔던 한국의 정보력도 손바닥은 들여다볼지언정 심장 속은 알 수 없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백일하에 드러냈다. 나날이 첩보수집 기술이 진보할 터인데 이번에는 오히려 20시간 가까이 더 늦었다.


김 주석 사망 당시와 비교해 흡사해 보이는 게 한두 가지가 아니다. 북측은 이번에도 하루 만에 부검을 실시했고 그 결과를 공개했다. 어떤 이는 이 부검이 ‘이례적’이라며 예의 음모론적 시각으로 접근하지만 ‘위대한 수령’ 김 주석 때도 북측은 그렇게 했다. 그러니 어쩌고 저쩌고 떠들어대는 건 부질없는 짓이다. 영정을 환한 미소를 띈 모습으로 만든 것도 참으로 흡사하다. 북녘 동포들이 애통해 하는 모습도 똑같고 외국 조문단을 받지 않기로 한 것도 이례적이 아니다. 김 주석 때도 그렇게 했다.


똑같은 것은 이뿐만이 아니다. 남쪽에서 군 경계태세를 강화하고 전 공무원에게 비상대기를 명령하고 후계체제 불안, 체제 붕괴 가능성 점증 등 갖가지 부정적 전망을 제시하는 것도 똑같다. 1994년 당시 대북 전문가들이 마치 입이라도 맞춘 듯 ‘3개월, 3년 내 붕괴’, 조금 과장하면 3일도 못 간다고 장담하던 장면이 눈에 선하다.


시간이 흐르면 일부나마 사실이 드러나게 마련이다. 당시 김 국방위원장의 후계자로서의 지위가 외부에서 봤던 것 이상으로 강고했다는 건 이제 상식에 속한다. 일부에서는 ‘김 총비서는 준비된 후계자’, ‘김정은 후계자는 온실의 화초처럼 자라난 어린 왕자’로 비교하지만 이 말이 맞아들어갈지는 두고봐야 알 일이다. 김정은 후계자는 불과 2, 3년 전 등장했다. 이름 석자마저도 최근에야 알 정도로 베일에 싸여 있다. 그러니 섣부른 예단은 금물이다.


되돌아 보면 김 주석 사망 이후 남쪽의 최대 오판은 북측 체제의 내구력을 저평가한 점이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5, 6년 동안 해마다 자연재해까지 계속 되자 붕괴론은 더 힘을 얻었다. 그러나 북녘 동포들은 흙에다 나물을 섞은 대용식량까지 만들어내는 등 말로 표현하기 힘든 참상을 겪으면서 버텨왔다. 오히려 ‘고난의 행군’ 와중에 인공위성을 쏘아 올려 또한번 ‘이해 불가의 나라’로 세상을 깜짝 놀라게 만들었다.


이제는 내년 2012년 강성대국 진입을 목표로 하고 있다. 심각한 식량난, 경제난에 허덕이는 약소 빈국이 강성대국 반열에 오른다니 참으로 이해 난망이지만 북측 설명을 들어보면 전혀 꿈만은 아니다.


기계를 만드는 기계인 공작기계를 컴퓨터 수치 제어화해 정밀기계의 대량 생산이 가능해졌고, 코크스를 쓰지 않는 제철법을 개발했는가 하면 석탄을 가스화해 비료를 만들어 내고, 10여 동안 멈춰세워놓아야 했던 2·8비날론 연합기업소를 정상화했다. 북측이 전력난 해소에 큰 기대를 걸고 있는 희천발전소는 내년 김 주석 생일께면 가동을 시작한다고 한다. 북측 표현대로라면 ‘이제는 허리를 펴게 됐다’는 것이다.


당, 정, 군, 의회의 공동명의로 된 김정일 총비서 부고에는 향후 남북관계, 대외관계에 대한 기본 입장도 밝혀져 있다. 남북 공동선언을 철저히 이행하며 자주 평화 친선의 기존 대외관계 원칙을 고수하겠다고 강조했다. 남북관계, 대외관계에서도 기존 방침에서 벗어나지 않는 예측 가능한 행보를 보였다.


이는 현 남북관계의 향방이 북쪽이 아니라 남쪽 손에 달려 있음을 의미한다. 아니면 말고 식의 ‘북한 점치기놀음’은 그만 두고 한반도 평화 정착에 이니셔티브를 쥐고 있는 남측 당국이 북측의 손짓에 화답하도록 촉구해야 한다. 이것이 1994년의 전철을 밟지 않는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