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 |
| |
▲ 엄민용 경향신문 엔터테인먼트부 차장 |
|
| |
가을입니다. 한낮에는 아직 열기가 가시지 않았지만, 아침저녁으로 귀밑을 스치는 바람에는 찬 기운이 배어 있습니다.
가을은 흔히 결실의 계절이라 부릅니다. 그래서 이즈음이면 신문이나 방송에서 꼭 나오는 얘기가 있습니다. “오곡백화가 만발하게 피었다”라거나 “가을 들녘에선 오곡백화가 익어 가고 있다”라고 하는 소리 말입니다.
그런데 ‘오곡백화’라고 하면 말 그대로 “다섯 가지 곡식과 100가지 꽃”입니다. 뜬금없이 꽃을 이야기하는 것이 좀 생뚱맞습니다.
물론 식용으로 쓰이는 꽃이 있기는 하지만, 그것으로 겨우내 배를 채우기는 좀 곤란합니다. 아무래도 꽃은 보기엔 좋지만, 가을의 풍요한 수확과도 어울리지 않습니다.
‘오곡백화’는 짝을 잘못 이룬 말입니다. 곡식이나 풍요한 수확과 어울리려면, 그것은 꽃이 아니라 과실이어야 합니다. ‘오곡백화’가 아니라 ‘오곡백과’라는 소리지요.
이때의 ‘오곡’은 좁게는 쌀·보리·조·기장·콩을 말하고, 넓게는 모든 곡식을 이릅니다. 또 ‘백과’는 100가지 과일, 즉 갖가지 과실을 뜻합니다. 따라서 가을의 풍성함을 얘기할 때는 “온갖 곡식과 과실”을 뜻하는 ‘오곡백과’라고 해야지 ‘오곡백화’라 해서는 안 됩니다. 사실 가을에 피는 꽃은 그다지 많지도 않습니다.
이즈음 많이 쓰면서 자주 틀리는 말로는 ‘나락’도 있습니다.
“나주지역은 나락 한 가마(40㎏)에 대해 5만원 지급을 약속했으며…”(연합뉴스일) “지역 농협과 협상하기 위한 농민 대표를 선출하고 본격 나락 수확에 앞서 농민들의 힘을 모으기 위함이었지요.”(네이버 블로그)
따위 표현에서 보이는 ‘나락’ 말입니다. 하지만 ‘나락’은 ‘벼’의 강원·경남·전라·충청 지역 사투리입니다.
그런데 이 ‘나락’이 바른 표현으로 쓰일 때도 있습니다. 바로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 한다’라고 할 때의 ‘씻나락’ 같은 경우입니다. ‘나락’은 ‘벼’의 사투리고, ‘씻나락’은 ‘볍씨’의 사투리입니다. 하지만 속담에 들어 있는 사투리는 표준어로 고쳐 쓰지 않고 그대로 쓰는 것이 원칙이므로,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 한다’를 ‘귀신 볍씨 까먹는 소리 한다’로 쓰지는 않습니다.
“말복 나락 크는 소리에 개가 짖는다” 따위의 ‘나락’도 그냥 씁니다.
<엄민용 경향신문 엔터테인먼트부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