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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 납치 내가 했다" 보도 막으려 강제 인쇄 중단

기자와 필화 (10) 1987년 신동아·월간조선 제작방해 사태

김성후 기자  2011.08.18 09:4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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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7박8일에 걸친 철야농성 투쟁 끝에 발행된 신동아 10월호를 들고 기뻐하고 있는 동아일보 출판국 기자들. (장행훈씨 제공)  
 
안기부·문공부, 이후락 인터뷰 기사화 저지 인쇄소 점거
기자들, 7박8일 끈질긴 저항…정부, 비난 여론에 굴복


1987년 9월20일 오후 8시30분쯤 서울 구로구 독산동 동아인쇄공업 윤전실에 국가안전기획부 수사과 요원 7명이 황급히 들이닥쳤다. 이들은 신동아와 월간조선 10월호 인쇄를 준비 중이던 윤전기 담당자에게 “잡지 내용 중 단 1장이라도 인쇄되어 나간다면 담당자를 구속하겠다”고 협박하며 강압적으로 인쇄와 제본을 중단시켰다.

그 시각, 동아일보 출판국장 장행훈은 신동아 마감이 끝난 터라 저녁 무렵 퇴근해 집에서 쉬고 있었다. 그런데 밤 10시쯤 전화벨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국장님, 큰일 났습니다. 안기부 요원들이 인쇄소 윤전실을 점거해 신동아 인쇄가 중단되고 있습니다.” 수화기 건너편에서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장행훈의 머릿속에는 마감 직전에 찾아온 출판국 담당 안기부 직원의 말이 떠올랐다. “꼭 내시겠습니까. 인쇄를 강행하면 수사 요원을 인쇄소에 파견, 인쇄를 중지시킬 수밖에 없습니다.”



   
 
  ▲ 김대중 납치사건의 가해 당사자인 이후락 전 중앙정보부장의 증언이 실린 1987년 월간조선 10월호 기사 첫 장.  
 
이종각 기자, 이후락씨와 운명적 인터뷰

안기부와 문화공보부 홍보조정실은 제작 1주일 전부터 김대중 납치사건에 관한 이후락 전 중앙정보부장의 증언 기사 게재 불가를 통고했다. 기사 게재를 강행하면 인쇄 중단 사태가 발생할지 모른다고 협박하거나 일부 내용 수정을 제의했다. 지인을 통해 인터뷰를 취소해 주도록 요청해왔던 이후락씨는 동아일보 사장과 신동아 출판국장에게 자필 편지를 보내왔다. “공식취재를 거부하고 객담한 내용을 갖고 10월호에 기사화한다는 소식이 들리는데, 이는 심히 유감스러운 일로 중지시켜 주기 바란다”는 내용이었다.

이씨의 증언은 당시 김대중 민주당 고문이 1987년 신동아 9월호에 납치사건과 관련해 자신의 이름으로 쓴 글(김대중이 폭로하는 ‘납치’ 전후, ‘박대통령이 나에게 부통령 제의했다’)에서 “이런 비극에 종지부를 찍기 위해서도 당시 사건의 총책임자였던 이후락씨는 사건의 전모를 공개적으로 밝혀야 한다”고 요구한 데 대한 응답 성격이었다. 이씨는 그해 8월 말부터 9월 초에 이르는 3주간 매주 수요일에 자신이 머물고 있는 경기도 광주군 초월면 도평리에 있는 도평요에서 신동아 이종각 기자와 인터뷰했다. 또 그 무렵 월간조선 오효진 기자와 만나 김대중 납치사건에 대해 이야기했다.

이씨가 신동아 이종각 기자와 15시간에 걸쳐 진행한 인터뷰에서 털어놓은 증언 요지는 “김대중씨 납치는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가 아니고 자신이 지휘했고, 처음부터 김대중씨를 살해하려는 계획이 아닌 납치가 목적이었으며 미국의 개입은 없었다”는 내용이었다. 이씨는 월간조선과의 인터뷰에서도 “이건 내 책임이다. 어떤 사람들이 어떻게 이 일을 했는가에 대해서는 더 많은 문제가 파생될 수 있기 때문에 더 이상 밝히기 어렵다”고 말했다. 김대중 납치사건의 열쇠를 쥐고 있던 이씨는 14년 만에 “김대중 납치를 내가 지시했다”고 인정했을 뿐 박 대통령 지시 등 그동안 알려졌던 사건의 핵심을 대부분 부정했다.

국정원 과거사건 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진실위)는 2007년 10월24일 ‘김대중 납치사건’에 대한 최종 조사 결과 발표에서 “이후락씨가 중정 공작부서에 납치공작을 추진하도록 지시했다”고 확인했다. 진실위는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 여부에 대해 여러 증언이 엇갈리고 있고 이를 확인할 수 있는 직접적인 증거 자료는 발견하지 못했다”고 밝혔다. 그러나 이후락 부장이 이철희 차장보의 반대에 부딪치자 “나는 하고 싶어서 하는 줄 알아”라며 역정을 냈다는 등의 정황, 박 대통령이 사건 직후 관련자들을 처벌하지 않았고 당시 김종필 총리를 파견해 일본과 마찰을 수습하도록 한 점 등을 종합 분석해 볼 때 “박 대통령의 직접 지시 가능성과 더불어 최소한 묵시적 승인이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라고 밝혔다.



   
 
  ▲ 신동아·월간조선 제작 방해 사태에 대한 기사가 실린 1987년 9월23일자 동아일보.  
 
동아·조선, 사태 발생 사흘 뒤 지면 보도

안기부의 인쇄소 점거로 신동아와 월간조선 10월호가 발행 중단 상태에 빠지자 신동아·월간조선 출판국 기자들은 언론탄압 중지를 요구하는 성명을 내며 저항했다. 동아일보 출판국 기자 80여 명은 21일 오전과 오후 기자총회를 열고 “신동아 10월 초 정상 제작을 위해 출판국 전원은 모든 방법을 동원해 투쟁할 것”을 결의하며 무기한 철야농성에 돌입했다. 조선일보 출판국 기자 50여 명도 21~22일 이틀간 매일 오후 7시부터 자정까지 시한부 농성을 벌인 데 이어 23일부터 철야농성을 벌였다. 동아일보 조선일보 편집국 기자들도 각각 22일과 24일 기자총회를 열고 지지농성을 시작했다.

22일자 일본 마이니치신문을 필두로 이후락씨의 증언 내용과 신동아와 월간조선이 안기부의 방해로 제작이 지연되고 있다는 사실이 AP 등 해외 언론사를 통해 전파되고 기자들의 기사화 요구가 계속되자 동아일보는 23일자 사회면에 3단으로 ‘신동아 기자 등 80명 3일째 농성’이라는 제목과 ‘이후락씨 증언 기사 관련 당국 인쇄 저지 항의’라는 부제를 단 기사를 실었다. 조선일보는 24일자 1면에 1단 기사(‘월간조선 인쇄저지 민주, 당국비난 성명’)를 게재했다.

신문 지면을 통해 신동아·월간조선 사태가 공식화되자 문공부는 24일 “한·일간 외교문제를 야기해 국익을 해칠 우려가 있고 이씨가 재직 시의 일을 발설하는 것은 직무상 기밀 누설 등 실정법을 위반하는 것이며 그 내용을 게재하는 것 역시 위법이어서 제작을 저지했다”는 공식 입장을 발표했다. 문공부는 그전까지 동아·조선일보 고위층과 기사 수정 문제를 놓고 물밑협상을 벌이고 있었다.

“사건 발생 며칠 후 안기부 국장, 문공부 홍조실장, 나, 김종심 신동아부장이 남산 하얏트 호텔 지하 일식집에서 만났어요. 강압으로 안되니까 풀어야겠다고 생각했겠죠. 기사 내용을 완화하면 제작이 가능하다고 하더군요. 다음날 발행인이 호출해서 방으로 갔더니 홍조실 직원이 와 있었어요. 발행인이 원고 뭉치를 주며 ‘상의해보라’고 하더군요. 보니까 완전히 뜯어 고쳤어요. 이후락의 김대중 납치 부분을 모호하게 해놨어요. 화가 치밀더군요. ‘이따위로 하느냐. 알맹이가 빠진 기사 가지고 무얼 하라는 얘기냐’며 소리치고 나와버렸어요.” 장행훈은 회고했다.

대선 앞둔 정부, 악재 염려 인쇄 허용
문공부의 공식 성명은 사태에 불에 기름을 끼얹는 격이었다. 문공부가 주장한 실정법 위반 부분은 간행물 발행 이후의 문제로 안기부의 인쇄소 점거는 강압적 사전검열로 명백한 위헌이라는 반박이 사방에서 터져 나왔다. 민주당이 진상조사위원회를 구성하는 등 정치문제로 비화하고 출판문화운동협의회·민주언론운동협의회·국민운동본부·한국천주교정의평화위원회 등 재야단체를 비롯해 한국기자협회, 한국일보·중앙일보·MBC 등에서 지지성명을 발표하는 등 비난 여론이 높아졌다.

결국 민정당은 27일 정오 라디오뉴스를 통해 “정부의 공명정대한 처리를 요구한다”는 성명을 발표하고 다음날인 28일 이웅희 문공부 장관이 “이후락씨 인터뷰 기사는 언론사의 자체 판단에 맡긴다”는 요지의 공식 입장을 발표하면서 사태는 신동아와 월간조선의 승리로 끝이 났다. 이날 밤 9시쯤 서울 여의도 동아일보 별관 출판국과 중구 태평로 조선일보 출판국에는 신동아·월간조선 10월호가 잉크 냄새를 풍기고 도착했다. 8일간의 투쟁에 극도로 지친 기자들에게 심신의 피로를 단번에 날리는 단비였다. 다음달인 신동아 1987년 10월호 편집후기는 “정부와 대립하지 않고서는 알 권리는 확보되지 않는다는 것을 세계의 언론사는 가르치고 있다”고 썼다.

참고자료
△과거와 대화 미래의 성찰-국정원 진실위 보고서(국가정보원)
△동아일보 사보 ‘동우’ 1987년 10월호
△동아일보사史 5권(동아일보사)
△조선일보 70년사 3권(조선일보사)



김대중 납치사건은…
1973년 8월8월 당시 박정희 대통령의 유신체제에 반대하며 일본과 미국 등에서 반정부투쟁을 벌이던 야당 지도자 김대중이 중앙정보부 요원들에게 일본 도쿄의 그랜드팔레스호텔에서 납치돼 도쿄, 오사카, 부산, 서울 등으로 끌려다니다 8월13일 서울 동교동 자택 앞에서 풀려난 사건이다. 여러 증언과 문건을 통해서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의 지휘 아래 총 46명이 9개조로 나뉘어 조직적으로 저지른 범행임이 드러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