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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진숙 민주노총 지도위원이 85호 크레인에서 고공농성을 시작한 지 2백일째 되는 지난달 24일, 부산 한진중공업 영도조선소 앞에서 시민사회 각계 인사들에 의해 시국회의가 열린 가운데 김 위원이 손을 흔들고 있다. (연합뉴스) | ||
“이 회사에 들어온 지 만 21년. 그런데 한달 기본급 1백5만원. 세금을 공제하고 나면 남는 것은 80 몇 만원인데…, 보수언론들은 입만 열면 노동조합 때문에 나라가 망한다고 난리니 노동자는 다 굶어 죽어야 한단 말인가.”
2003년 10월17일, 크레인 고공 농성 1백29일 째 자살한 김주익 한진중공업 노조위원장의 유서 한 대목이다. 그가 목을 맨 곳은 한진중 영도사업장 85호기 크레인. 지금 김진숙 민주노총 부산본부 지도위원이 2백일 넘게 정리해고에 반대하는 농성을 벌이며 ‘희망버스’의 물결을 불러온 바로 그 곳이다.
최근 한진중 사태를 면밀히 보도하는 진보언론의 대표격인 한겨레와 경향의 당시 보도를 살펴보자. 한겨레 지면에 김주익 위원장의 자살 관련 기사는 18일자 4면 사회면 두 꼭지에 그쳤다. 경향신문 역시 사회면인 18면 기사 두 꼭지에 불과했다. 보수언론이 관성대로 ‘강성 노조’를 비판하고 있는 사이 진보언론들은 김 위원장의 자살 뒤 잠시 관심을 보였으나 때는 늦었다는 평가였다.
2003년의 한진중 사태가 2011년보다 덜 한 것은 아니었다. 당시 한진중 문제는 사회적 이슈였다. 사용자의 노조에 대한 손해배상·가압류 등 ‘신종 노조탄압’이 쟁점이 되던 시기였다. 김 위원장이 자살한 다음 달에는 노조원인 곽재규씨가 투신해 잇달아 목숨을 끊었다.
최근 큰 이슈가 됐던 반값 등록금 문제도 다른 단면을 보여준다. 교육과학기술부의 자료에 따르면 노무현 정부 임기 동안 사립대 등록금은 35.0%가 인상됐다. 김대중 정부 시절 인상률은 29.1%다. 이명박 정부 이후에는 정부가 물가인상 억제를 위해 등록금을 관리했기 때문에 4.5%에 그쳤다. 대부분 진보언론이 현 정부의 반값 등록금 공약 번복과 경찰의 등록금 시위 과잉진압을 집중적으로 보도했으나 60% 이상 등록금이 오른 지난 10년간 문제제기 수준은 어느 정도였는지 짚어볼 필요가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두 사건을 예로 차이를 찾는다면 “어떤 정부 때 일어났느냐”다. 고 김주익씨는 개혁세력의 지지로 탄생한 노무현 정권 첫해에, 김진숙 지도위원은 보수세력의 지지로 들어선 이명박 정권 말기에 크레인에 올랐다. 쌍용자동차 사태와 최근 한진중 사태의 핵심인 비정규직과 정리해고 문제도 지난 정부 10년 동안 합법이 돼 본격화됐다는 지적이 나온다. 용산참사를 잉태한 뉴타운개발 관련법안 역시 열린우리당이 다수를 차지했던 17대 국회에서 통과됐다. 서민들이 가장 고통스러워하는 현안에 제도권 진보언론들이 일관성 있게 진보적 논조를 유지했는지, 정치공학적 보도를 한 것은 아닌지 묻게 되는 이유다.
“한겨레는 좋게 봐서 중도보수”
여기서 나타나는 반응은 두 갈래다. 보수세력과 보수언론은 역공의 근거로 삼는다. 지난달 10일자 동아일보의 한 칼럼은 ‘반값 등록금’을 적극 추진하는 민주당의 김진표 원내대표에 대해 “2005년 5월 27일 교육부총리로서 ‘국립대도 사립대 수준으로 등록금을 올릴 필요가 있다’던 그가 지금은 ‘지금 등록금이 워낙 빠르게 오르니 국공립대 반값 인하정책을 과감하게 실천해야 한다’고 주장한다”고 힐난했다.
또 다른 방향은 ‘제도 진보언론’ 자체에 질문을 던지는 급진적 방식이다. 한겨레21이 8백호 특집으로 실시한 정치·사회 인사 52명에 대한 정치성향 분석 지표에서 가장 좌파적이라고 평가받은 문화평론가 김규항씨는 희망버스가 출발한 지난달 자신의 트위터에 다음과 같은 글을 올렸다.
“‘문제는 자본이며 제도정치 제도언론에 대한 기대를 접고 우리정치 우리언론을 모색하자’는 말에 비현실적이라 미간 찌푸리던 사람들이 담담하게 ‘정치도, 공권력도, 언론도 자본의 하수인일 뿐’이라고 말하는 아침. 부산발 혁명.”
그는 노무현 정부 초기 한 주간지에 쓴 칼럼에서도 지적한 적이 있다. “제도언론의 경우…맨 왼쪽인 한겨레의 이념 역시 좋게 보아 중도보수쯤이다. 한겨레에 진보적 기사가 적게 실리는 것은 ‘한겨레가 변해서’가 아니라 그것이 그 신문의 이념이기 때문이다.…제도 언론이란 기본적으로 지배계급의 선전수단이다. 제도언론이 담을 수 있는 진보성의 최대치는 그 사회 지배계급이 허용할 수 있는 진보성의 최대치와 같다.”
세계적 석학 노엄 촘스키는 제도 언론의 한계와 여론조작을 분석했다. 그는 ‘기업으로서 언론’이 사실을 왜곡하는 과정을 해부한다. 그의 ‘프로파간다 모델’은 언론사의 상품은 구독자이며 시장은 광고주라는 전제에서 시작된다. 사회 의제를 주도하는 주요 언론들은 구독자(시청자)를 다른 기업에 광고영업을 통해 판매한다는 것이다. 특히 구독자를 ‘오피니언 리더’로 고급화하는 흐름 아래 언론들은 지배계층과 광고주의 이해에 입각한 기사들을 제공하게 되며 이는 ‘뉴욕타임스’ 등 미국의 대표적 제도권 진보 매체에도 적용된다는 분석이다.
기업 광고 의존 절대적인 제도 언론
제도언론이 근원적으로 자본과 권력에서 벗어나기 힘들다는 주장은 몇 가지 국내 통계 수치에서도 유추될 수 있다.
미디어경영연구소의 지난 2008년 분석 결과에 따르면 우리나라 전국단위 일간지의 광고수입 대 구독수입의 비중은 76.3% 대 23.7%로 나타났다. 특히 경제지는 광고 84% 대 구독 16%의 비율을 보였다. 또한 신문발전위원회의 2009년 발표를 보면 국내 신문의 총매출액에서 광고수입의 점유율은 2005년 41.6%, 2006년 42.4%, 2007년 43.0%로 계속 증가 추세이고 3년간 평균 점유율은 42.4%였다. 반면 구독수입의 총매출에서 3년간 평균 점유율은 10.9%로 나타났다. 가판 판매에 의존하는 스포츠지를 제외하면 우리나라 신문의 광고·구독 비율은 심하게는 9대 1, 나은 경우가 7대 3이라는 말이 거짓이 아닌 셈이다.
상대적으로 낫다는 방송도 광고에 의존하기는 매한가지다. 방송통신위원회의 ‘2010년 방송사업자 재산 공표 상황’ 자료에 의하면 지난해 국내 지상파 방송사의 총매출액 중 광고수입이 차지하는 비중은 60.7%였다.
언론사가 절대적으로 광고에 의존하는 구조에서 거대기업, 자본에 대한 감시는 위축될 수밖에 없다는 분석이다. 많은 전문가들은 언론사의 수입구조 다각화를 대안으로 내세우지만 돌파구는 보이지 않는다. 구독수입 비율이 높아지는 것 또한 정답은 아니어서 딜레마는 계속된다. 구독 비중이 커지면 이제는 “독자에게 읽히는 기사”를 써야 하는 현상이 뒤따른다.
제도권 진보언론 역시 저널리즘의 공공성을 추구하지만 이윤을 창출해야 하는 기업이라는 이중성에 직면해 있다. 한 중앙 신문사의 중견 기자는 “이 같은 문제는 개별 기자들에게 ‘기자정신 각성’만 촉구한다고 해결되지 않는다”라고 말했다.
진보언론의 ‘진보’는 무엇인가
제도권 진보언론의 기업으로서 한계가 진보성을 제한하는 한 축이라면, 나머지 축은 정치적 이념이라는 지적이다. 진보언론이 표방하는 ‘진보’ 역시 모호하다는 것이다. ‘정권 교체’를 대의로 추진되는 민주당, 국민참여당 등 ‘자유주의 야당’과 민주노동당, 진보신당 등 ‘진보 정당’의 야권통합 논의는 이러한 단면일 수 있다.
한겨레는 대선 승리를 위해 야권에 ‘대동단결’을 촉구하고 있다. 지난달 20일자 칼럼 ‘아침햇발’은 “민주당은… 대통합을 위한 협상과 토론을 앞장서 요구해야 한다.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 국민참여당에도 당신들만의 소통합에 안주할 생각을 버리라고 당당하게 말해야 한다”며 민주당의 분발을 강조했다. 26일자 사설은 시민단체 지도자들이 결성한 ‘희망 2013·승리 2012 원탁회의’의 출범에 주목하며 모든 진보정당을 포함한 야당들에 야권통합 논의 지지부진의 책임이 있다고 비판했다.
그러나 진보를 표방하는 언론이라면 ‘대동단결’에 앞서 그 내용을 지적해야한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무엇을 위한 단결이며, 정권교체냐는 것이다. 이른바 ‘묻지마 정권교체’에 대한 비판이다. 단순히 보수세력의 집권을 막기 위해서라면 이는 1988년부터 4차례의 대통령선거에 걸친 자유주의 세력의 반복된 논리라는 반론을 피하기 힘들어 보인다.
더 나아가 이를 제도권 진보언론의 한계만이라고 보기 어렵다는 근본적 문제제기도 있다. ‘독재와 반독재’ ‘민주 대 반민주’ 등의 20세기형 구도 이상의 상상력을 보여주지 못하는 국내 진보세력의 현실이 언론계에 그대로 나타나고 있다는 말이다.
김상봉 진보신당 상상연구소 이사장(전남대 교수)은 “우리는 김대중·노무현 정부 10년을 통해 자유주의 세력이 집권해도 노동자·민중의 삶은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는 것을 배웠다. 단순한 민주화에서 전진해 자본주의 자체에 대한 새로운 진보담론을 제시해야 할 때”라며 “진보세력이 할 일을 못한 채 자유주의 세력에 포섭되면서 이것이 언론에도 투영되고 있다”고 토로했다.
이탈리아 사상가 안토니오 그람시의 말이 떠오르는 대목이다. “과거의 것은 죽어가는데 새로운 것은 아직 나타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