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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에게 크레파스는 사 주지 말자

한국기자협회 온라인칼럼[엄민용의 우리말글 산책]

엄민용 경향신문 엔터테인먼트부 차장  2011.07.29 17:0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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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엄민용 경향신문 엔터테인먼트부 차장  
 
“어젯밤엔 우리 아빠가 다정하신 모습으로 한 손에는 크레파스를 사 가지고 오셨어요. 그릴 것은 너무 많은데 하얀 종이가 너무 작아서 아빠 얼굴 그리고 나니…”

여러분도 잘 아시는 노래 <아빠와 크레파스>의 시작 부분입니다. 아마 다들 한 번쯤은 이 노래를 불러보셨을 듯합니다.

하지만 저는 이 노래를 무척 싫어합니다. 누가 옆에서 부를 때에는 한 글자를 고쳐 부르게 합니다. 물론 그렇게 하면 ‘노래맛’이 뚝 떨어지기는 합니다.

바로 ‘크레파스’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이 그저 단순히 외래어로 생각하는 ‘크레파스’는 일본에서 만들어진 일종의 신조어입니다. 더욱이 그것은 어떤 제품 자체를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막대기 모양의 화구(畵具)’를 나타내는 상표명이었습니다.

이 말을 처음 쓴 일본인은 프랑스 말 크레용(crayon)에 파스텔(pastel)을 결합해 ‘kurepasu’를 만든 후 [구레빠스]로 소리 냈습니다. 그것을 그대로 빌려다가 좀 더 ‘빠다(→ 버터)’를 발라놓은 것처럼 쓰는 말이 ‘크레파스’입니다.

이 말에 대해 국립국어원은 “안료(顔料)를 연질유로 굳힌 막대기 모양의 칠감. 크레용과 파스텔의 특색을 따서 만든 것으로, 색깔을 덧칠하거나 섞어 칠할 수 있다”고 풀이해 놓고 있습니다. 하지만 일본에서 만들어진 말임도 함께 밝히고 있습니다.

일본말이라고 무조건 배척하자는 얘기가 아닙니다. 크레용(서양화의 데생에 쓰이는 콩테나 파스텔 같은 막대기 모양의 화구)으로 쓰면 충분한데, 그리고 실제로도 그렇게 쓰는 사람이 많은데, 그런 ‘크레용’을 놓아두고 일본 어느 회사의 상표명인 크레파스를 쓸 이유가 없다는 것이지요.

어차피 둘 다 우리말이 아닌데, 이렇게 쓰든 저렇게 쓰든 무슨 상관이냐고 되묻는다면 할말은 없습니다.

다만 다른 나라의 말을 그대로 적을 수 있는 위대한 문자 한글을 가진 우리가 남의 나라 말을 온전히 전하지 못하는 일본의 문자를 빌려 쓰는 것은 정말 부끄러운 일이라는 얘기는 할 수 있습니다.

아무튼 ‘크레파스’의 예에서도 보듯이 우리가 쓰는 말 중에는 일본의 어두운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진 게 꽤 많습니다.

<엄민용 경향신문 엔터테인먼트부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