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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18광주민주화운동 31주년 기념일을 하루 앞둔 17일 광주시 북구 운정동 국립 5·18 민주묘지에서 유치원생들이 참배하고 있다. (광남일보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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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찬수 내일신문 편집위원5·18 광주민주항쟁 31주년이다. 시민들의 피로 물들었던 금남로는 평화를 되찾은 지 오래다. 그러나 역사의 현장을 목도했던 사람들의 귀에는 아직도 그날의 함성이 울려 퍼진다.
1980년 5월, 안찬수 내일신문 기자(편집위원)는 대학 1학년 신입생이었다. 꽃다운 청춘에게 캠퍼스는 낭만을 허락하지 않았다. 대신 역사의 처절한 교훈을 가르쳤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총성과 함께 사라진 뒤 밀려온 민주화 바람은 대학에도 찾아왔다. 어용 교수 퇴진 등 학원민주화 운동이 거셌다. 당시 전남대 인문계열 1학년이었던 안 기자 역시 강의실에 머무를 수 없었다. 농성과 투쟁의 대열에서 어깨를 걸었다. 대학은 비로소 해방구가 된 듯했다.
광주에 비극이 엄습한 것은 그때였다. 오랜 농성을 잠시 멈추고 오랜만에 어머니가 차려주신 저녁상 앞에 앉은 날, 비상계엄이 선포됐다.
이튿날 학교 정문은 굳게 닫혔다. 휴교령이 선포되고 무장한 계엄군이 캠퍼스를 점령했다. 시민들은 노도처럼 들고 일어섰다. 드디어 항쟁이 시작된 것이다. 그 거리에 안 기자도 있었다. “광주MBC에서 전남도청 쪽으로 진입하려는 시위대에 있을 때였어요. 저 너머 귀를 찢는 듯한 소리가 들리더군요. 처음엔 최루탄 소리인 줄 알았어요. 알고 보니 계엄군이 시민들에게 발포를 했더군요.”
시민들은 무장해 저항했다. 그러나 총칼과 군홧발에 밟힌 아스팔트는 붉게 울었다. 광주의 상처는 스무살 가슴에도 처참하게 얼룩졌다. 거적으로 가려진 시민들의 시체를 바라보며 비통했던 사람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살아남은 자들의 슬픔이었다.
“말로만 듣던 군사독재가 이런 거구나, 나라를 지키는 군인들이 시민을 죽일 수도 있구나. 정말 많은 것을 배우게 됐죠.”
그의 스무살은 그렇게 지나갔다. 세월이 흘러 광주에서 기자 생활을 하던 안 기자는 1998년 당시 민주화운동가 출신들이 주축이 돼 창간한 주간 내일신문으로 옮겼다. 일간지 기자가 창간 초기의 주간 매체로 옮긴다는 건 사실 모험이었다. 2000년 내일신문의 일간지 전환에 기여했다. “광주의 기억이 당시 그런 결정을 내린 한 이유가 됐다”는 안 기자. 이름 모를 밀알의 전사들을 기억하는 모든 세대들이 그렇듯 광주는 그의 여전한 삶의 선생님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