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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주언 전 한국기자협회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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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정부와 세계시민의 전쟁이 시작됐다.’ 위키리크스의 설립자 줄리언 어산지가 성폭행 혐의로 영국 런던에서 구속된 이후 어산지의 수감에 항의하는 세계시민의 사이버 공격과 시위를 둘러싸고 벌어지고 있는 초유의 사태를 두고 이르는 말이다.
위키리크스가 미국 외교문서를 폭로한 뒤 미국 정부는 어산지를 간첩혐의로 수배했고 인터넷업체와 금융기관에 압력을 넣어 위키리크스의 서버를 차단했고 후원계좌를 동결시켰다. 한술 더 떠서 스웨덴은 어산지를 성폭행 혐의로 수배했고 영국은 어산지를 체포해 수감했다.
이에 대해 어산지를 옹호하는 해커들은 금융기관 등에 대한 사이버공격을 감행했다. 위키리크스를 복사한 수만개의 미러 사이트를 만들었다. 해커(hacker)와 액티비즘(activism)을 결합시킨 ‘핵티비즘’(hacktivism)이란 신조어가 탄생한 배경이다. 또한 세계 곳곳에서는 어산지의 석방을 요구하는 시위가 빗발치고 있다.
그렇다면 세계정부와 세계시민의 전쟁에서 승자는 누가 될까. 이들 간의 전쟁은 아직 진행 중일 뿐더러 확산일로에 있기 때문에 섣불리 승자를 가려내기는 어렵다. 그러나 세계국가로 불리는 미국은 이제까지 공개된 외교문서만으로도 치명타를 입었다. 더구나 어산지는 앞으로 25만건의 ‘최후의 심판’(doom's day) 파일을 공개하겠다고 공언하고 있어 미국을 더욱 곤혹스럽게 하고 있다.
게다가 위키리크스와 어산지의 폭로저널리즘을 옹호하는 세력은 더욱 더욱 불어날 것이다. 어산지가 수감돼 활동을 못하더라도 영화 ‘브이 포 벤데타’의 브이들처럼 또 다른 수많은 어산지가 나타나 활동할 것이다. 어산지는 새로운 ‘영웅 신화’를 창조할 것이고 위키리크스는 ‘언론의 십자군’으로 부활할 것은 뻔한 이치이다. 따라서 본격적인 싸움이 벌어지기도 전에 이미 승자는 정해져 있는 셈이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위키리크스는 수많은 세계시민의 힘을 빌어 인터넷 상에 새로운 백과사전을 만들어내는 위키피디어를 벤치마킹한 것이다. 이명박 정부 출범 직후 서울광장을 수놓았던 ‘촛불의 힘’을 일궈냈던 집단지성이 일궈낸 업적 중의 하나인 것이다.
내부고발자와 위크리크스
위키리크스는 국가폭력의 실상을 세상에 폭로하는 내부고발자(whistle blower) 집단이 만들어냈다. 양심세력으로 일컬어지는 ‘집단 내부고발자’는 가공되지 않는 기밀문서를 세상에 공개함으로써 위키리크스를 최고의 언론으로 우뚝 세웠다. 역대 어떤 언론기관도 할 수 없었던 저널리즘의 최고봉을 성취한 것이다. 그동안 위키리크스를 통해 세상에 알려진 몇 가지 사례는 이를 잘 말해준다.
위키리크스는 이라크전 당시 미군의 바그다드 민간인 공습 영상을 공개해 미국의 이라크 침공에 대한 비난여론을 고조시켰다. 미군 아파치 헬기 조종사가 비무장 민간인에게 기관총을 난사하는 장면이 담긴 비디오 영상을 폭로하여 전 세계적으로 미국에 대한 비난이 빗발쳤다. 미군의 무차별 공격으로 2명의 아이와 로이터 통신 기자를 포함한 20여명의 민간인이 크게 다치거나 사망했다.
최근 일부가 공개된 미국의 외교문서에는 힐러리 미국 국무장관의 반기문 유엔사무총장에 대한 생체인식자료 수집 지시와 푸틴 러시아 총리에 대한 경멸적인 조소가 담긴 민감한 내용이 담겼다. 미국이 각국에 파견된 외교관을 활용해 중요한 외교기밀 등을 수집해 본국에 보고한 것들이다. 외교관들을 통해 첩보와 정보를 수집한 것은 간첩질이나 다름없다. 더구나 일부 국가에서는 대통령 선거에 관여한 정황이 드러나는 등 미국의 정치공작 실상이 밝혀지기도 했다. 따라서 미국 정부가 어산지를 간첩혐의로 수배한 것은 적반하장이나 다름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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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키리크스의 설립자 줄리안 어산지가 7일(현지시간) 영국 런던에서 스웨덴이 발부한 영장으로 체포됐다고 경찰 관계자가 밝혔다. 어산지는 지난 8월 스웨덴에서 여성 2명을 성폭행했다는 혐의를 받아왔으며 그가 설립한 위키리크스는 최근 미국 외교전문 등을 폭로해 논란을 일으켰다. 사진은 지난 11월 4일 어산지가 스위스 제네바의 제네바 프레스클럽에서 인터뷰하는 모습.(런던=AP/뉴시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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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리언 어산지는 한 인터뷰에서 “정부나 단체가 감추려고 하는 정보의 공개는 궁극적으로 세상의 변화를 가져온다”며 “감춰진 비밀을 폭로하는 것은 저널리즘의 역사와 궤를 같이 한다”고 밝혔다. 어산지의 말처럼 폭로 저널리즘은 역사의 물줄기를 바꾸기도 했다. 뉴욕타임스의 ‘펜타곤 페이퍼 사건’은 미국이 베트남전쟁에 개입하기 위해 통킹만 사건을 조작했다는 사실을 폭로함으로써 반전열기를 확산시켰다. 결국 미국은 베트남에서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최근 ‘딥 스로트’의 실존인물이 밝혀져 화제가 됐던 워싱턴 포스트의 ‘워터게이트 사건’도 닉슨 대통령의 사임을 이끌어내는 계기가 됐다.
한국 내부고발자보호법 법률 미비
한국에서는 전두환 독재정권 시절 윤석양 이병의 보안사 민간인 불법사찰 폭로, 이문옥 감사관의 대기업 비업무용 부동산 소유실태 폭로, 김병진씨의 보안사 고문 및 간첩조작 실태 폭로 등이 있다. 그러나 국내에서는 이들 내부고발자들은 엄청난 고초를 겪을 수밖에 없었다. 김병진씨는 아예 외국으로 망명하기도 했다. 미국 등 선진국처럼 국내에서는 내부고발자를 보호하는 법률이 체계적으로 마련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과거 폭로저널리즘이 몇몇 내부고발자에 의해 단독으로 이뤄졌다면 위키리크스는 집단 내부고발자가 만들어 간다는 점이 다르다.
어산지는 위키리크스라는 폭로의 장을 만들어주고 폭로내용의 진위여부를 파악한다. 물론 위키리크스의 운영에는 어산지 외에도 수많은 익명의 전문가들이 참여하고 어산지를 지지하는 세계시민의 후원으로 운영된다. 인터넷의 등장으로 폭로 저널리즘도 집단지성의 힘으로 진화하고 있는 것이다. 익명을 보장하는 인터넷은 정보공유의 장으로써 이제 극소수만이 독점했던 고급정보는 설 자리가 없어져 가고 있다.
물론 인터넷의 부작용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부작용을 과대 포장함으로써 인터넷의 올바른 기능을 위축시키려는 국가권력의 규제는 힘을 발휘하기 어려워질 것이다. 더 이상 국가권력의 음모나 폭력은 베일 속에 숨어 있는 영구비밀이 될 수 없다.
결국 국가권력도 민주사회에 걸맞게 투명한 정책운영을 통해 국민을 위해 봉사하는 공공기관으로 거듭나야 한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이명박 정부도 민간인 불법사찰이나 천안함 침몰, 4대강 비리 등 온갖 의혹이 만천하에 드러날 것이라는 점을 하루빨리 깨달아야 할 것이다.
위키리크스가 미국의 외교문서를 폭로한 뒤 나타난 미국 정부의 대응은 치졸하기 그지없다. 돈줄을 끊고 서버를 차단했다. 더 나아가 어산지를 간첩죄로 다스리겠다며 엄포를 놓았다. 한 통속인 스웨덴은 그를 성폭행 혐의를 뒤집어 씌워 전 세계에 수배했으며 결국 영국 런던경찰에 의해 검거돼 수감됐다. 일부에서는 그에게 씌워진 성폭행 혐의가 미국 CIA의 공작에 의한 것이 아니냐는 의혹의 눈초리마저 보내고 있다. 눈엣가시인 어산지를 파렴치범으로 만들어 도덕적으로 매장시키려 한다는 것이다.
어쩌면 미국은 첩보영화에서 보듯이 어산지를 암살하려다가 포기했을지도 모른다. 그가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공개하겠다고 공언한 ‘둠스데이’ 파일에 어떤 내용이 포함돼 있는지 모르는 데다 그를 ‘순교자’로 만들어 추앙받는 영웅으로 만들 필요는 없을테니까. 더구나 그가 사라지더라도 또 다른 수많은 어산지가 나타나 활동한다면 혹 떼려다가 혹을 붙이는 사태를 만들지도 모른다. 아마 미국 정부로서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곤혹스런 지경에 빠져 있을 것이다. 자신들이 저지른 폭력이나 음모에 대한 반성은 관심 밖이다. 자신이 저지른 비리가 공개되지 않기를 바라는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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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줄리언 어산지의 지지자들이 11일(현지시간)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어산지의 석방을 촉구하는 시위를 벌이고 있다. (마드리드=AP/뉴시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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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은 수정헌법 제 1조에 언론의 자유는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신성불가침의 자유임을 명시하고 있다. 그래서 뉴욕타임스의 펜타곤 페이퍼 사건이나 워싱턴 포스트의 워터게이트 사건도 가능했다. 이들 사건에서 미국 연방 대배심은 언론의 손을 들어 주었다. 그러나 위키리크스의 외교문서 폭로에 대해서는 간첩죄로 다스리겠다고 강변한다.
그렇다면 위키리크스가 폭로한 민감한 외교정보를 1면에 보도한 뉴욕타임스나 가디언 등 세계 유수의 언론들은 어떻게 할 것인가. 이들 신문은 간첩혐의에서 자유로운가. 위키리크스의 행위는 미국에 대한 공격이고 뉴욕타임스가 보도한 것은 그렇지 않다는 것인가.
미국의 대응방식 전두환 정권과 닮아
미국의 대응은 국가폭력을 저지르는 모든 국가가 그렇듯이 치졸하다.
어산지를 간첩죄로 기소하겠다는 것은 한국의 악명높은 독재정권이었던 전두환정권이 보도지침 폭로사건을 다룬 것과 비슷하다.
보도지침 사건은 위키리크스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세계의 변방에서 있었던 조그마한 사건에 불과하지만, 온갖 죄목을 뒤짚어 씌워 국가폭력을 폭로한 고발자들을 감옥에 가두려 한다는 점에서는 너무도 닮았다. 동서고금 민주․독재정권을 가릴 필요없이 권력을 손에 쥔 자들의 속성은 다를 바 없다는 점을 웅변해주고 있다.
전두환 정권은 언론사에 하달한 보도지침을 폭로한 데 대해 국가보안법상의 국가기밀누설죄와 외교샹기밀누설죄 등을 걸어 필자를 비롯, ‘말’ 지 특집호를 발행한 김태홍, 신홍범을 구속했다. 9년여에 걸친 기나긴 법정 투쟁 끝에 이들은 무죄확정 판결을 쟁취했지만, 그동안의 고통은 이루 헤아릴 수 없었을 것이다.
미국 정부가 어산지를 간첩혐의로 수배하고 한 통속인 스웨덴 정부가 성폭행 혐의를 뒤짚어 씌운 것이나 영국 정부가 어산지를 수감한 것도 이와 다를 바 없다. 물론 전두환 정권처럼 미국 정부도 자신이 저지른 범죄행각에 대해서는 한마디 반성도 없다. 보도지침 사건의 변론을 맡았던 한승헌 변호사의 말대로 ‘불을 낸 자가 불 끌 생각은 하지 않고 화재신고를 한 사람을 잡아 가두는 꼴’이라고나 할까.
이들이 국가기밀이라고 강변하는 것도 유치하기만 하다. 전두환 정권의 보도지침 중에는 김대중 전 대통령(당시 미국 망명중)의 사진을 보도하지 말라는 내용이 포함돼 있다. 아마도 전두환 정권에게는 김대중 전 대통령의 사진이 국가기밀이었나 보다. 위키리크스가 공개한 미국 외교문서 중에는 푸틴 러시아총리를 ‘부패하고 비민주적인 관료국가의 알파독(우두머리 개)’으로 표현했다. 미국은 푸틴을 알파독으로 부른다는 사실을 국가기밀로 취급하고 있다고 시인한 셈이다.
이제 39살밖에 되지 않는 줄리언 어산지는 세계 언론사에 획을 긋는 인물이 될 것임에 분명하다. 인터넷이라는 새로운 미디어의 위력을 일찍이 알아차리고 이를 폭로저널리즘의 수단으로 만든 최초의 저널리스트이기 때문이다.
러시아 관리가 농담삼아 줄리언 어산지에게 노벨 평화상을 수여해야 한다고 말해 파문이 일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서방세계가 수여하는 노벨상이 아니라 세계시민이 수여하는 언론상을 받을 만한 인물임에는 틀림없다. 그는 세계국가의 폭력을 고발하여 세계시민의 공공복리에 크게 기여한 인물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