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 조선일보 고문의 방에 들어서니 커다란 그림 한 점이 눈에 띄었다. 친구인 재불화가 김인중 신부의 작품이라고 했다. 여리면서도 거친 붓의 궤적이 애무해놓은 온갖 색채가 기묘히 얽혀 있었다. 저 그림은 찬사와 비난, 양 극단의 파동을 개의치 않아온 ‘보수 논객’의 45년 이력과 어떤 세계를 이루는 것일까. 생각을 몇 발자국 옮기지 못한 채 인터뷰에 들어갔다. 마흔여섯번째 생일을 앞둔 한국기자협회와 지난 6월 근속 45년을 맞은 김대중 고문. 한 살 차이 동년배의 대화는 그렇게 시작됐다. -기자로서 근속 45년을 맞이하기 쉽지않습니다. ‘기자 김대중’은 어떻게 기록되기를 원합니까.한 직업을 오랫동안 가진 사람은 많습니다. 45년도 꼭 길다고 볼 수는 없죠. 굳이 말하자면, 한 직장에서 그 세월을 일했다는 게 특이하다면 특이하죠. 신문기자 말년이 되면 ‘매니지먼트’ 쪽으로 갈 것인가, ‘라이터’로 갈 것인가 선택의 갈림길에 서기 마련입니다. 나는 주저없이 라이터의 길로 갔기 때문에 지금이 있는 것 아닌가 싶습니다. 글 쓰는 직업을 그대로 유지한다는 것에 자부심을 갖고 산 겁니다.
-1972년부터 6년여 동안 워싱턴 특파원을 지냈습니다. 미국은 우리 사회에서 뜨거운 화두죠. 대한민국에 미국이라는 나라는 무엇입니까.우리나라 5천년 역사 동안 대부분 중국, 후반 와서는 일본과 두 나라 사이에 끼어서 굴종하며 살아야 하는 환경에 있었어요. 어찌 됐든 1945년 광복 후 미국을 매개로 세계로 나갈 기회를 잡은 것이죠. 미국은 어차피 한반도에 영토적 욕심을 가질 수 없어요. 시대적으로 식민지가 횡행하던 시대를 넘어섰고 국제적으로 용납이 안 되죠.
명암이 있으나 우리는 미국을 철저히 이용하면 됩니다. 그들은 전략적 필요성에 따라 군대 주둔도 하는 거죠. 박애주의자라서 가난한 나라를 먹여 살리는 나라도 아닙니다. 제국주의건 상업주의건 우리가 하기 나름이라고 판단합니다. 미국을 일방적으로 몰아붙이는 건 우리가 약세일 때 하는 얘기입니다. 난 ‘반미’나 ‘친미’가 아니라 ‘용미’를 생각하는 사람이에요.
-1975년 조선투위(조선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 사건 때는 워싱턴 특파원으로 근무 중이었는데요. 1989~1990년 편집국장 재임 시엔 원상복직 문제를 놓고 직접 협상도 벌였죠.
우선 기자들의 노조 활동을 생각해보면요. 우리는 권력에 탄압받으며 기사도 제대로 못 쓰는 어려운 시기를 거쳤어요. 기자들이 정부에 끌려가고 남산에 잡혀가도 기자조직이 활동하는 게 없었어요. 기자협회도 그때 데모라도 제대로 한 적이 있던가요? 권력에 아무 말 못할 때 신문사 내부에는 말 못할 사정이 있었고 고통이 많았는데 그런 것에만 노조가 집중하는 건 안타까웠어요. 정태기씨(1975년 해직, 이후 한겨레 사장 역임)는 내가 정말 좋아하는 후배인데 그 사람들과 같이 일도 못하게 됐잖아요. 그 분은 특파원 할 때 미국 우리 집에 찾아오기도 하던 사이였어요. 그 때문에 신문사도 손해를 보고 여러 가지 불행한 일이 있었죠.
그래서 그런 고통을 어떻게든 해결 해야겠다 생각했죠. 편집국장 할 때 사건 당시 현장에 없었던 내가 제일 적임자라고 봤어요. 합의가 거의 됐는데 그 내용을 신문에 써야 한다는 게 그쪽 요구사항이었어요. 그걸 활자화한다면 남은 사람은 반민주세력이라는 이분법이 되는 거죠. 그래서 성공하기가 어려웠어요. 그래도 그 분들이 신문사의 고민을 많이 이해해주셔서 고맙게 생각해요.
-5공 때 우여곡절을 많이 겪었다고 들었습니다.정치부 기자 때 우리 청와대 출입기자를 청와대 쪽에서 바꾸라고 했어요. 그래서 나를 포함해 젊은 기자들이 사표를 내고 배수진을 쳤죠. 결국 우리 뜻대로 됐어요. 1986년 영국 연수 간 것도 전두환 정권 때죠. 당시 문화공보부 장관이 사주를 만나서 나를 그만 두게 하라고 했어요. 결국 출판국장에서 논설위원 겸 현대사연구소장으로 발령이 났는데 신문에는 ‘현대사연구소장 겸 논설위원’으로 나온 거예요. “이게 어떻게 된 거냐”고 물었더니 회사에서 그 정도로 이해해달라고 하더군요. 그럼 어차피 글도 못쓸 거 외국에 나가겠다고 했어요. 그때 청와대는 ‘김대중’이란 글자만 봐도 싫었나 봐요.(웃음)
북한 문제에 관한 한 극우라 해도 받아들여-진보 진영에서는 ‘극우논객’이라고 평합니다. 적군과 아군이 분명하고 이념성 강한 글 때문인데요.나는 그런 용어 자체를 반대합니다. 모든 분야, 즉 빈부 문제, 기회균등 문제나 재벌 위주 사회·자유기업만이 지상 최고 가치라고 여기는 것 정도가 돼야 극우라고 하는 거죠. 테러리즘에 대한 경도도 가능하고요. 하지만 북한 문제는 분명해요. 북한 문제에 관한 한 우파라는 걸 인정합니다.
예전에 한 탈북자가 저에게 처절하게 한 말이 큰 영향을 줬어요. “제발 북한을 도와주지 마세요. 내 아들딸은 굶어죽을지도 모르지만 그 이후 세대만이라도 제대로 살아야 합니다.” 북한의 지배구조는 달라져야 해요. 난 ‘반 김정일’이지 북한이 망해야 된다는 게 아니에요. 북한 동포를 살릴 지도자와 체제가 나와야 한다는 겁니다. 중국 덩샤오핑 체제 같은 것도 있잖아요. 그걸 극우라고 하면 당연히 받아들이겠습니다.
-기자로서 8명의 대통령을 겪었는데 각각 어떻게 평가합니까.박정희 대통령은 한 번도 가까이서 본적이 없어요. 그 시대 기자를 시작했지만 특파원을 오래했고 돌아온 해 박 대통령은 살해됐죠. 최규하 대통령은 외무장관 때 내가 외무부 출입을 해서 자주 봤지만 대통령은 길게 못했죠. 개인적으로 가까웠던 건 김영삼 대통령이에요. 취재를 오래 했으니까요. 김대중 대통령에겐 애증이 가장 크죠. DJ가 1972년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을 땐 같이 차타고 다니면서 취재했어요. 나도 “DJ가 대통령이 돼야 한다. 박정희는 타도돼야한다”고 생각했던 젊은 기자 중 한 사람이었어요.
개인적으로 노태우 대통령은 저평가됐다고 봅니다. 그는 더 이상 군부 정권이 이어지는 것도, 하루아침에 민간정부로 바뀌면 일어날 처절한 반목도 막는 역할을 한 거죠. 그게 3당 합당(1990년 민주자유당 창당)이었던 겁니다. 또 한국이 국제무대에 살아남기 위해서는 데탕트를 무시해선 안 된다고 봤어요. 중국, 소련과 국교 문제를 항상 염두에 두고 노력했죠. 이후 돈 문제 때문에 너무 저평가됐어요. 정치인들은 다 돈 때문에 망하더라고.(웃음)
-정치권에서 제의를 자주 받았던 걸로 아는데요.김영삼 대통령은 “들어와서 나 좀 도와주면 안되느냐”고 했죠. 나는 “밖에서 도와 드려야죠”라고 했어요. 사실 내 재능이 필요해서라기보다 신문사에 있으면서 글 쓰는 것을 막는 게 목적이란 걸 알았기 때문이죠.
김대중 대통령은 당선 직전 측근과 셋이서 식사를 한번 했어요. 그 측근이 도중에 나갔고, 나중에 전화를 걸어서 “DJ가 무슨 오퍼 안 하더냐”고 묻더군요. 나중에 들은 이야기로는 “김 주필에게 자리를 오퍼하려고 했는데 둘이서 이야기해보니까 안 먹힐 거 같더라. 그래서 이야기를 안 꺼냈다”는 거예요. 당시 김 대통령이 조각할 때 이북 출신에 보수적인 강인덕씨를 통일부 장관에 앉혔죠. 그게 DJ 인사의 특징이에요. 실제 일은 다 본인이 하면서 우파인 JP 업고 박태준씨까지 끌어들인 것도 그의 스타일입니다. 대북문제에서 조선일보를 동반자로 끌어들여 걸림돌을 제거하려 했던 게 아닌가 봐요.
-이명박 대통령은 4대강 등에서 잡음이 많은데요.우리의 강은 정비해야 합니다. 그래서 4대강은 일단 꼭 필요한 한 곳만 해보고 하자고 내가 칼럼도 썼죠. 무엇하러 임기 중에 모든 거 다 마무리하려 하느냐. 하나 해보고 국민 반응이 좋으면 나머지 하는 방식이 좋지 않겠느냐는 거죠. 이 대통령은 욕심이 많은 사람 같아요. 자기 치적을 쌓고 싶어서 그런지. 청계천도 그렇고 물을 좋아하는 거 같아요.
신문은 죽지 않는다, 거품이 사라질 뿐이다
-신문산업이 쇠락하고 있습니다. 신문의 미래를 어떻게 전망합니까.라디오 방송이 처음 나올 때 신문이 망할지도 모른다고 했습니다. TV방송, 컬러TV, 인터넷 나올 때마다 신문은 죽는다고 했죠. 다소 부침은 있지만 활자매체는 여전히 살아남을 겁니다. 다만 활자매체가 정리되는 상황이 오지 않을까 합니다. 거품이 꺼지는 거죠. 미국도 뉴욕에는 뉴욕타임스, 이런 식으로 결국 대도시에 한 신문이 남는 방식으로 갔습니다. 활자매체 종사자들은 거품에 휩쓸리지 않도록 하는 게 가장 중요하죠. 또 너무 젊은 세대를 의식해서 신문을 만들려는 경향이 있어요. 미국에서도 젊은 사람은 뉴욕타임스를 안 봅니다. 사회 진출해서 일정한 자리에 올라 신문을 안 읽으면 화제에 못 끼는 연배가 되면 읽습니다. 전 세계 스무살에서 예순살 사람까지 다 좋아하는 신문을 어떻게 만듭니까? 사람이 사회에 나아가 자기 몫을 시작하면 보지 않을 수 없는 신문을 만드는 게 낫죠.
-그런데 신문사들은 방송 진출에 나서고 있죠. 조선일보도 종편을 하려고 하잖습니까.방송은 언론계의 시대적 유행 같아요. 신문사들이 유행에 뒤떨어지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거죠. 그런데 한정된 시장에서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 솔직히 잘 모르겠어요. 매체의 혼돈 상태가 정리되는 역사적·시대적 과정일 수도 있고요. 기존 시장으로도 어려운데 앞으로 참 힘든 경쟁이 될 거라는 생각도 들죠.
-문화 방면에 관심이 많다고 들었습니다. 원래 미대 지망생이었고 형님도 전위예술가인 무세중(본명 김세중)씨인데요.우리 집안 DNA에 그런 기질이 있다고 볼 수 있죠. 학생 때는 그렇잖아요? 생 텍쥐페리 소설에 심취해 주머니에 꼽고 다니고 할 때가 있는 거죠. 서울고 시절엔 미술반을 했어요. 그림이 굉장히 좋아서 미대에 가고 싶었는데 아버지가 법대를 원했어요. 대학 선택은 아버지 뜻대로 하자고 해서 법대를 간 거예요. 아버지가 송사 때문에 고생을 많이 하셔서 자식은 판사가 됐으면 하신 거죠. 그런데 대학 2학년 때 돌아가셨어요. 그래서 고시를 안 봤어요.
문화부장도 하고 싶었죠. 1984년 정치부장할 때 당시 편집국장이 날 LA올림픽 취재단장으로 보냈어요. “당신이 영어를 잘하니까 가라”는 거였는데 세상에 운동경기를 영어로 하나, 몸으로 하지.(웃음) LA 다녀오니까 문화부장을 하겠느냐고 해요. 난 정말 잘됐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정치부 후배들이 반대했어요. 그게 단순히 사내 사정 때문에 옮기는 게 아니었기 때문이죠. 결국은 못 갔지만 해보고는 싶었어요.
-아드님도 기자(동아일보)입니다. 조언은 자주 합니까.그런 건 전혀 없어요. 서로 분야도 다르고. 사실 직접 말은 안하고 가끔 와이프한테 “걔 기사가 요새 눈에 잘 안 띄어”라고 할 때는 있지.(웃음)
-현역 칼럼리스트로 언제까지 활동할 계획입니까.얼마 전에 신문들이 다 ‘48세 총리’를 대서특필했죠. 데이비드 캐머런 영국 총리와 비교하는데 그 사람은 당원, 당수 과정을 다 밟아서 올라왔어요.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게 아니죠. 나이가 중요한 게 아니에요. 더 이상 칼럼 소재 고르기가 어렵고 칼럼이 재미가 없다, 내 나름의 네트워크가 그런 반응을 보이면 그만 둘 겁니다.
대담=김신용 편집국장
정리=장우성 기자 jean@journalist.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