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천안함 침몰 원인을 놓고 어느 정부 관계자의 코멘트가 보도됐다. “(발견된) 합금 파편이 중국, 러시아, 독일 제품인지를 정밀 분석 중”이라면서 “북한이 자신들의 소행임을 감추기 위해 한국에서 사용하는 독일제 어뢰를 사용했을 가능성에 주목하고 있다”는 것이다. 머리카락이 제자리에 있든, 없든 부인의 외도가 기정사실이 되는 것처럼 파편이 중국제이든, 러시아제이든, 독일제이든 상관없이 천안함 침몰은 북한의 만행이 되는 것이다.
자신이 믿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진실이라 생각하는 ‘트루시니스(Truthiness)’가 대한민국을 휩쓸고 있다. 천안함 침몰 원인을 놓고 “북한이 아니면 누가 이런 짓을 하겠느냐”는 사람들과 “북한이 했다는 증거가 어디 있느냐”는 사람들의 주장이 맞서고 있다. 어느 쪽도 결정적인 증거가 없다 보니, 많지 않은 단서들과 온갖 정황들을 놓고 제각각 자신의 트루시니스에 끼워넣어 해석하고 있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일반 사람들이야 자기 생각을 기탄없이 얘기할 수 있겠지만, 진상 규명과 후속 대응의 책임을 지고 있는 군 당국과 정부가 이런 트루시니스에 매몰돼 있는 것은 극히 위험스러운 일이다.
그런데 조사결과 발표에 이어 대통령의 대국민담화, 국방부의 대북성명 등이 잇따를 것이라는 보도가 1주 전부터 나오고 있다. 결론도 나기 이전부터 특정 대상을 겨냥한 성명이 예정되는 것은 상식에 맞지 않는다. 반대로 벌써 결론이 나 있었다면 발표 시점을 1주 이상 늦춰 타이밍을 조절하는 것을 의미한다. 조사결과 발표에 대통령담화, 대북성명까지 이어지면 6월2일 투표일이 맞아떨어진다. 1987년 대선 때도 투표 하루 전날 KAL기 폭파범 김현희씨를 국내로 압송해 TV와 신문에 큼지막하게 얼굴을 내보냄으로써 유권자들의 ‘안보 불안 심리’를 자극했다.
천안함 조사결과 발표를 앞두고 그동안 기자들이 보도의 ABC를 제대로 지켰는지 묻고 싶다. 많은 기사들을 쏟아내면서 설득력있는 근거를 얼마나 제시했는가? 기사 속의 ‘○○관계자’들이 흘리는 무수한 말을 앞 다퉈 전달하면서 그 말이 얼마나 근거가 있는지 파헤치고 추적했는가. 기자는 국민을 대신해 당국자들에게 궁금한 것을 물어보고 추궁하는 존재이지, 익명의 당국자를 대신해 무책임한 가정들을 국민에게 단순 전달하는 존재가 아니다.
천안함 조사결과가 ‘북한 소행’으로 나올지, ‘북한 무관’으로 나올지는 지켜볼 일이다. 그러나 어떤 결과가 나오든 국민이 납득할 만한 결정적인 증거가 제시돼야 한다. 그래야만 논란을 끝낼 수 있다. 별다른 근거도 없이 추정과 가정이 복합돼 무리하게 결론을 내리려 한다면 군인들의 안타까운 희생을 정치적으로 악용했다는 비난을 피할 수 없게 된다. 부디 언론도 이번 조사결과 만은 당국의 발표를 단순 중계하지 말자. 국민을 대신해 근거를 요구하고, 당국이 내놓는 근거가 얼마나 설득력 있는지를 검증하고, 설명이 부실한 부분은 신랄하게 비판하는 기자의 ABC를 보여주자. 그럴 때 국민 속에서 기자의 위상도 높아지리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