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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협회보는 '신문의 신문'이었다"

인터뷰 이상우 기자협회보 초대 편집국장

장우성 기자  2010.01.19 21:5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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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협회보 편집국(실)이 독립된 것은 1968년. 기자협회보는 1964년 창간 당시는 조사분과위원회 소속 회원 기자들이 월간으로 제작하다가 68년부터 별도로 편집실을 두게 됐다. 그때 초대 편집국(실)장 겸 편집인으로 이상우 전 경향신문 기자가 취임했다.




   
 
  ▲ 이상우 기자협회보 초대 편집국장  
 


이상우 초대 국장은 사실상 ‘해직기자’ 출신이다. 경향신문 정치부에 근무하던 이 국장은 정부에 비판적인 기사를 주도한 편집간부를 몰아낸 신임 사장 퇴진을 주장하다가 안팎의 압박에 사표를 낼 수밖에 없었다. 당시 군사정권은 정부 비판적 논조를 보이던 경향신문이 은행 융자 상환을 연체하자 경매에 붙여 ‘정부 기관지화’를 꾀하고 있었다.


“신문사 발행인들이 모여 ‘이상우는 어느 신문사에서도 채용하지 말자’고 결의했죠. 문서로 남기자는 것을 당시 장기영 한국일보 회장이 ‘그렇게까지 해야 하느냐’고 반대했다고 합니다.”


청천벽력의 고난을 맞이했던 30대 초반의 가장에게 기자협회에서 편집인으로 와달라는 요청이 왔다. 기협 초대 조사분과위원장으로서 기협 강령 제정과 창간 때부터 협회보 제작에 관여했던 그는 이를 흔쾌히 수락하고 정진석(현 한국외국어대 명예교수)씨와 김수인씨 등과 함께 편집실을 꾸렸다. 그러나 그 뒤의 삶도 순탄치는 못했다. 서슬 퍼렇던 중앙정보부 남산분실에 숱하게 불려 다녔다. 모진 고문과 폭행은 통과의례였다.


“제가 편집실장으로 취임할 때 우리 기자사회는 정론지와 상업지 사이에서 고민이 깊어졌고 군사정권은 당근과 채찍을 병행하며 언론을 길들이려 했죠. 자연히 언론이 제 힘을 쓰기 어려웠죠. 기자협회보가 회원들의 목소리를 대신해 ‘신문의 신문’으로 역할을 해야 했습니다. 기자 초봉 월급이 1만원, 도시근로자 월 최저생계비가 2만2천원이던 시절이니 기자들의 권익도 형편없었죠. 언론사 노조도 없었으니 기자협회보가 할 일이 많았습니다.”


이른바 ‘차관’ 필화 사건은 당시 이 전 국장의 고투(苦鬪)를 말해준다. 68년 신동아 김진배 기자 등이 정부의 외자도입 정책을 심층 비판한 기사가 문제가 돼 중앙정보부에 연행됐다. 김 기자가 해고되고 당시 김상만 동아일보 부사장이 발행인 자리에서 물러났다. 그러나 어떤 언론도 이 사실을 보도하지 못했다. 심지어 이 문제를 다룬 국회 대정부질의 기사도 나오지 못했을 정도. 기자협회보는 유일하게 ‘줄기차게’ 기사를 썼다. 언론을 탄압하는 정부와 그 정부에 굴복한 경영진을 매주 질타했다.


이렇게 정권의 눈엣가시가 된 기자협회보의 편집실장인 그가 평안할 수 없었다. 정부의 끈질긴 압력으로 결국 71년 기자협회를 떠나 4년간 서울 신촌 대학가에서 맥주집을 경영하기도 했다. 국내 언론사에는 들어갈 수가 없어 일본교육방송(현 아사히TV)의 서울특파원으로 언론인 생활을 이어가다 92년 퇴직했다.


요즘도 기자협회보를 종종 찾아본다는 이 전 국장은 후배 기자들에게 당부했다. “‘정론’만 주장할 수 있는 시대는 사실 지났습니다. 그러나 기자의 뿌리인 ‘기개’ 만큼은 잃지 않았으면 합니다. 협회보도 나중에 봐도 후회하지 않을 지면을 만들어주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