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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협회보는 한국 언론사의 물줄기를 증언해왔다. 사진은 기자협회보 1964년 창간호의 1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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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자유 수호.권익 향상이 우리의 임무”
기자협회보가 2010년 1월20일자로 지령 1500호를 맞았다. 1964년 11월10일 지령 1호가 나온 이래 46년만이다. 1975년과 1980년 군사정권의 폐간 조치 등 시련을 딛고 맞은 결과다. 기자협회보의 분기점이 된 1호와 100호, 500호, 1000호 지면을 통해 역사를 짚어본다.
기자협회보의 역대 1면을 보면 한국 언론사(史)의 물줄기가 보인다. ‘사상 최초의 한국기자협회’. 1964년 11월10일 기자협회보 창간호의 1면 머릿기사 제목이다. “한국 언론 사상 최초인 한국기자협회는 지난 8월17일 그 역사적인 발족을 보았다. ‘스스로의 자질 향상과 권익 옹호’의 기치를 높이든 일선 기자 2백여명은 이날 하오 2시 서울시내 신문회관에서 뜻깊은 결성대회를 열고…” 이 기사는 기자협회의 초심과 역사적인 출범을 벅찬 어조로 전달하고 있다.
‘기협 첫 과업은 반 언론법 투쟁’이라는 기사도 눈에 띈다. 당시 박정희 정권이 ‘언론윤리위원회법’ 처리를 강행하자 기자들은 기협을 결성, 성명을 17회 발표하고 법폐지청원을 내는 등 적극적인 반대운동을 벌였던 기록이 남아있다.
63호부터 시작된 기자협회보의 사설 격인 ‘우리의 주장’은 1969년 10월3일 지령 100호의 머릿기사로 게재됐다. 제목은 ‘기협회보는 일선기자의 거울이다-지령 백호를 기록하는 우리의 자세’. ‘우리의 주장’에는 “한국기자협회의 가장 큰 임무는 언론자유의 수호와 기자들의 권익향상이며…우리의 임무를 충실히 할 수 있었던 것은 오직 3천명 우리 회원의 뜨거운 정열과 언론자유를 위해 애쓰는 많은 사람들의 성원 없이는 이룩될 수 없는 일이며 이 정열과 성원에 보답하기 위해서도 우리 협회보의 책임이 한층 무거움을 통감한다”고 나와있다.
500호는 다소 늦은 88년 7월1일자였다. 75년 폐간 뒤 복간되면서 주간에서 월간으로 전환됐고, 80년부터 9개월간 폐간되는 등 우여곡절을 겪었기 때문이다. 6월 민주항쟁 이후인 88년 5월에는 다시 주간으로 전환돼 500호를 맞았다. 500호의 머릿기사는 ‘언론관계법-기협 대공청회 개최’로 5공 군사정권 하에서 제정된 각종 언론악법의 계폐를 위한 대공청회를 알리는 것이었다. 이 공청회의 패널로 박권상 전 동아일보 논설주간, 김우룡 한국외국어대 교수, 한승헌 변호사, 이철 국회의원, 정경희 당시 한국일보 논설의원 등 낯익은 인물들이 참석한다는 내용도 있다. 김중배 당시 동아일보 논설위원이 지령 500호 특별기고로 쓴 ‘진흙탕 속의 청초한 연꽃이기를’과 당시 이춘발 기협 회장과 민정?민주?평민?공화당 대변인이었던 김중위, 이상수, 서청원, 김문원 의원이 참석한 특별 좌담회도 눈길을 끈다.
‘한국언론사상 첫 편집권 독립 인정’이라는 2면 머릿기사는 당시 한국일보 노사가 편집권 독립?공정보도 보장을 명시한 단체협약에 극적으로 합의했다는 소식이 실려있다.
역사적인 1000호는 99년 5월10일 발행됐다. 김대중 당시 대통령이 1000호 기념으로 19명의 기자협회 임원단을 면담한 내용과 서면인터뷰 기사가 나와있다. 김 전 대통령은 “기자협회보는 발행부수가 적을지 모르나 엄혹했던 군사독재 시절에도 민주주의를 위해 누구도 부인못할 중요한 역할을 하고 정론을 펼쳐온 대표적인 언론”이라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