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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남은 엄기영'의 슬픔

경영진 교체 당하고 '식물사장' 전락
책임통감 자책하며 김 이사장에 반기

김성후 기자  2009.12.15 22:2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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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엄기영 사장은 방문진으로부터 재신임을 받았지만 혹독한 대가를 치르고 있다. 사진은 9일 MBC 본사를 나서는 엄 사장.(연합뉴스)  
 
15일 오전 8시10분쯤, 서울 중구 코리아나 호텔 정문 앞. 방문진 이사회 참석차 호텔 안으로 들어가려는 엄기영 MBC 사장을 이근행 노조위원장이 막아섰다. 이 위원장은 “사장님의 책임이 크다”고 따졌고 엄 사장은 “책임을 통감하고 있다. (후임 인사는) 내 생각대로 관철시키겠다”고 말했다. 



지난 7일 MBC 경영진 일괄사표 제출로 촉발된 일련의 소용돌이의 중심에 엄기영 사장이 있다. 방문진의 사퇴 압박이 거셌던 지난 8월31일 “MBC의 독립성과 구성원들의 자존심, 공영방송의 수장이라는 책무를 느낀다”고 말하며 사퇴 요구를 일축했던 그는 갑작스럽게 사표를 제출했다. 



‘뉴 MBC 플랜’ 이행 부진에 책임을 지고 자발적으로 사의를 표명한 것으로 알려졌으나 그대로 믿기는 어렵다는 게 일반적 관측이다. 여당 추천의 최홍재 이사는 “엄 사장이 사표를 제출할 당시 대부분 이사들이 외국에 있어 자세한 내막은 모른다”고 말했다. 대부분 이사들도 내막을 모를 정도로 사표 제출은 전격적으로 이뤄졌고, 그 과정은 철저히 베일에 싸여 있다. 



일각에서는 엄 사장이 김우룡 이사장을 사전에 만나 일부 본부장을 교체하는 선에서 뉴 MBC 플랜 이행 부진에 대한 책임을 묻는 것으로 합의했다는, 이른바 ‘엄기영-김우룡 밀약설’을 제기했다. 실제로 두 사람은 지난 4일 방문진 사무실에서 만난 것으로 알려졌다. 



어찌됐든 그는 재신임됐다. 하지만 그 대가는 혹독하다. 그와 한배를 탔던 김세영 부사장을 포함해 보도·제작·경영본부장이 교체됐다. 전투에서 부하들은 다 죽고 자신만 살아남은 꼴이 됐다. MBC 노조는 성명에서 “자신의 팔다리를 잘리고도 살아남기만 하면 된다는 굴욕을 선택했다”고 비난했다. 



임기가 1년이나 남았지만 그의 리더십은 급격하게 허물어지고 있다. 자신의 힘으론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식물사장’이 됐다는 얘기도 나온다. 방문진은 자신들이 임명한 경영진을 통해 보도와 프로그램 제작 등에 개입할 것이고, 무력해질 대로 무력해진 엄 사장은 지켜볼 수밖에 없는 구조로 재편될 가능성이 높다. 



엄 사장은 김 이사장에게 반기를 들었다. 그는 15일 김 이사장과 전날 자정까지 상의해서 만들었던 인사안을 폐기하고 새로운 안을 들고 나왔다. 안팎의 비판을 모면하기 위한 제스처인지, 이대로 밀릴 수 없다는 절박감에서 나왔는지 현재로서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늦은 감이 없지 않다. 



이근행 MBC 노조위원장은 “정연주 전 KBS 사장은 정권의 사퇴 요구에 맞서 수사를 받고, 인간적 수모까지 겪는 치욕을 당했다”며 “엄 사장이 공영방송 수장의 막중한 위치를 알았다면 무기력하게 자신의 거취를 맡겨선 안됐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