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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칼럼]

나를 지치게 하는 것들

이강윤  2001.01.20 13:04: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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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강윤 국민일보 수도권팀 기자





1. 충북 청주 외곽. 비닐하우스에 낮이고 밤이고 촛불과 전구를 켜놓고 있다. 며칠 전 폭설 때 하우스가 눈을 이기지 못하고 내려앉아 겨우 일으켜 세워놨더니 이제는 한파로 딸기가 얼어죽을 지경인데도 농어민용 면세 기름값이 작년보다 두배로 올라 난로조차 피워주지 못하는 형편에서 조금이나마 살려보려는 처절한 몸짓이다. 초는 부근 절에서 얻어왔다. 그러나 딸기는 이미 냉해를 입어 상품가치를 상실했다. 말 그대로 '언 발에 오줌누기'다.

2. 전남 신안. 농어 양식장에 인근 도시 횟집 주인들이 몰려들었다. 농어니 숭어니를 평소의 10분의 1에도 미치지 못하는 헐값에 사고들 있지만 즐겁지만은 않은 표정이다. 하루 전만 해도 펄떡펄떡 뛰던 농어와 숭어 수백톤이 밤새 '급속 냉동 횟감'으로 변해버렸다. 양식 어민은 인건비는커녕 먹이값도 건지지 못하고 횟집 주인 좋은 일만 시켰다. 추산 피해액 17억 5000만원.

3. 강원도 철원. 밤새 송아지까지 얼어죽었다. 청주 어디서는 사람도 죽었다는 데 거기 비하면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1년 잘 키워 팔면 목돈이 얼만데…' 하는 꿈 - 물론 언제 소값이 폭락할지 전혀 알 수 없는 '폭탄돌리기 게임'이긴 하지만 - 은 물론 사료비다 뭐다 본전을 따져보는 것조차 사치스러운 일이다.

4. 서울 광화문 한복판 어느 초밥집. 한 끼에 1인당 7∼8만원은 족히 나오는 이 집은 12시 40분이 지나도록 입구에 손님들 몇팀이 줄지어 서있다. 물론 예약을 못한 탓이다(이런 데 오면서 예약도 안 하다니 '세련'되지 못했군…). 비슷한 시각 신촌 대학가. 이 동네에서는 흔히 보는 평범한 카페에 학생 차림의 젊은이들이 그득하다. 이 집에서 제일 싼 커피가 한 잔에 6천원, 주스는 1만원 안팎. 손님들은 거의 다 십수만원 하는 영국제 체크무늬 머플러를 '유니폼'처럼 두르고 있다. 지난해 학생들 사이에 '명품 구입 계'가 유행이었다더니 이탈리아 유명 브랜드 핸드백도 심심찮게 눈에 띈다.

5. 서울 세종로 정부종합청사. 폭설? 한파피해 보도자료 만들기에 바쁠 뿐 당장 필요한 지원조치는 '절차'에 따라 계선상의 책상을 돌고 있다. 도장 찍고 결재 받느라 세월 다 보낸다. IMF 때 그렇게 떠들었던 사회안전망 확충도 나아진 게 별반 없다.

6. 여의도 국회의사당. 안기부 돈 1천수백억을 선거판 실탄으로 써놓고 잘했니 잘못했니입씨름이 한창이다. 한쪽에서는 면세유살 돈이 없어 촛불이라도 밝혀보는데 한쪽에서는 나랏돈 꺼내다 돈 선거, 타락선거 하라고 나눠준 걸 놓고 '강경투쟁' '정권퇴진'…. 배짱도 좋다.

하긴 이건 비단 어느 하루만의 '일'이 아니라 매일 되풀이되는 '일상'이다. "그게 세상이지 뭐. 사람 사는 게 다 그런 건데 뭘 새삼…. 날도 추운데 빨리 집에나 들어가라구." 그렇지? 얘깃거리도 못되는 일상인데 싸구려 감상에 빠지는 건 허탈함만 곱절로 키우는 거겠지?

여름에 큰 물이 져도 그렇고 엄동설한 한파가 몰아쳐도 그렇다. 늘 약자들만 피해를 본다. 그래서 그들은 계속 '약자'로 머문다. 이건 공동체가 아니다. 정부나 국가는 더더욱 아니다. 문명 이전 단계인 '정글'일 뿐이다. 정글서식 동물답게 오늘의 수렵이 끝났으니 빨리 동굴로 기어들어가 사냥감을 나눠 먹고 몸을 눕혀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