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꺾어도 꺾이지 않는 절개로

경남일보, 15일 창간 1백주년 맞아
1915·1980년 두차례 폐간 아픔도

김창남 기자  2009.10.14 14:3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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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9년 10월15일 발행된 경남일보 창간호.  
 
지방지의 효시인 경남일보(회장 안병호)가 15일 ‘창간 1백주년’을 맞는다.
이는 대한매일신보의 후신인 서울신문이 2004년 7월18일 창간 1백주년을 맞은 데 이어 두 번째다.

경남 진주시에 위치한 경남일보는 1905년 11월 을사조약 강제 체결 이후 국권회복운동 분위기에 자극받아 1909년 10월 창간됐다.

영남을 중심으로 한 교남학회 회원들과 유생, 유지들의 뜻을 모아 1909년 2월 신문발행 계획을 세우고 창간 발기문을 내면서 창간에 속도를 냈다.
이어 같은 해 8월19일 내부인가를 받고 초대 주필로 ‘시일야방성대곡’을 쓴 이유로 황성신문 사장에서 물러난 장지연 선생을 초빙했다.



   
 
  ▲ 1954년 당시 경남일보 사옥.  
 
경남일보는 10월12일 주주총회를 개최하고 3일 뒤 창간호를 발행했다.
하지만 지방지라고 해서 지역소식만 전하지 않았다.
전국 소식은 물론 창간호 1면에서도 볼 수 있듯이 국외소식인 ‘외보’를 게재했다. 배포 역시 전국을 비롯해 중국 상하이, 일본 도쿄까지 다다랐다.

창간호는 타블로이드 4면으로 총 8천부가 발간됐다. 이 당시 황성신문이 3천부, 제국신문 2천5백부, 대한매일신보 국한문판과 국문판이 합해 8천부였던 점을 감안하면 적잖은 부수였다.
당시 신문 1부 대금은 1전이며, 1개월 구독료는 30전이었다. 또 우송료로 매월 13전을 별도로 받았다.

그러나 창간 이후 순탄한 길을 걸은 것만은 아니다.
심한 재정난을 겪을 뿐만 아니라 일제의 강제 폐간 조치로 급기야 1915년 1월 단 한 차례 폐간호 지령 887호를 발행한 뒤 광복 이후까지 빛을 보지 못했다.

그러다가 광복 이후 민주진영의 지도자이며 진주지역 상공계를 이끌어오던 허만채씨가 1946년 3월 1일 폐간 32년 만에 ‘중창간 1호’를 발행했다.

두 번째 폐간 아픔을 겪은 것은 신군부가 등장한 1980년. 신군부의 ‘1도 1사 원칙’에 따라 경남일보는 경남매일에 흡수된다.

하지만 들불처럼 일어난 민주화 요구로 ‘6·29선언’을 이끌어 낸 이후 복간 열망도 함께 일어났다.
1989년 1월 19일 문화공보부에 ‘경남일보’제호로 정기간행물 등록을 신청했으나 유사제호 금지라는 법률조항으로 인해 ‘신경남일보’로 제호를 바꿔 이해 11월17일 정식 등록했다.

마침내 11월 26일 지령 9343호로 신경남일보라는 이름으로 복간됐다. 신군부에 의해 강제 폐간된 지 9년 만이다.

끊임없는 제호 찾기 운동에도 불구하고 경남일보라는 이름을 되찾은 것은 그후로부터 11년 만인 2000년 1월1일자 지령 13691호로 제 이름을 되찾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