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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만평 새 지평 열었다" 평가

고 김상택 화백 발자취

장우성 기자  2009.09.23 15:0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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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년 경향 도안담당으로 언론계 입문
권력 향한 해학과 비판으로 주목받아




   
 
   
 
지난 14일 타계한 고 김상택 전 중앙일보 화백은 한국 시사만화의 역사에 족적을 남긴 인물이다. 특히 김 화백은 신문 만평의 새로운 시대를 연 것으로 평가된다.

군사정권 시절 신문 만화는 네 컷 짜리 만화가 주도했다. 한 컷으로 모든 것을 보여줘야 하는 만평은 시대적 한계가 뚜렷했기 때문이다. 군사정권의 철혈 통치로 만평의 생명인 날카로운 풍자와 압축적인 표현은 불가능했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1987년 민주화 이후 신문 만평계에 두 스타가 등장했다. 한겨레의 박재동 교수(한국예술종합학교)와 경향신문의 김상택 화백이었다. 동면기에 접어들어 있던 신문 만평의 위력을 새삼 일깨워준 것이다.

충무로 영화계에서 조연출 생활을 하던 김 화백은 1983년 경향신문 도안 담당으로 ‘신문쟁이’의 길로 들어섰다. 88년 경향 노보에 그린 만평이 호평을 받으면서 일간지에도 ‘김상택 만평’을 연재하기에 이르렀다. 그는 가는 펜을 이용한 독특한 화풍에 권력의 심장부를 향한 주저없는 해학과 비판으로 일약 주목을 받았다. 경향은 일간신문 가운데 유일하게 1면에 만평을 넣을 정도로 그를 지원했다. 당시 경향은 김 화백의 자율권을 최대한 보장해주면서 외부의 압력에 기꺼이 방패막이로 나섰던 것으로 유명했다.

그의 만평이 얼마나 권력 비판적이었는지는 95년 6월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입건된 사건으로도 증명된다. 미군을 점령군으로 표현한 당시 만평은 아무리 ‘문민정부’ 시절이었다 해도 파격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던 김 화백은 1998년 경향에 사표를 냈다. 경향은 IMF 구제금융 사태 이후 한화그룹과 분리되는 등 격변기를 맞이한 상황이었다. 경향은 직원들이 연대 서명을 해 퇴사를 만류할 정도로 그를 붙잡았다. 이전부터 주요 일간지의 집중적인 스카우트 표적이 됐던 그는 1년의 은둔 생활 끝에 이듬해 3월2일자부터 중앙일보에 ‘김상택 만평’을 이어갔다. 여기에는 동향 출신의 중앙 임원이었던 K씨가 큰 역할을 했던 것으로 전해졌다. 중앙은 삼성과 계열 분리 이후 ‘독립언론’으로 탈바꿈해야 한다는 안팎의 요구에 직면한 때였다. ‘김상택 만평’은 그 기대감의 한 단편으로도 읽혔다. 그러나 중앙 이적 뒤 펜이 무뎌졌다는 비판도 뒤따랐다.

말수가 극히 적었던 고 김 화백은 중앙에서도 편집국 동료들과는 별다른 교류조차 갖지 않고 밥 먹는 시간까지 아낄 정도로 만평에 혼신의 힘을 기울였다. 지난달 중순 중앙에 사표를 냈을 때도 자신의 심각한 건강상태를 밝히지 않았다고 한다. 평소 그의 성품상 병세를 알리면 남아 있는 사람들에게 걱정과 폐를 끼치는 일이 된다고 여겼을 것이라는 게 주위 사람들의 생각이다.

독실한 불교신자였던 그는 임종 직전 가족이 지켜보는 가운데 20여 분간 홀로 불경을 외우며 편안히 눈을 감았다고 한다. 그의 시신은 화장돼 경북 안동 봉정사 주변의 산에 뿌려졌다. 평소 산과 석가의 가르침을 사랑했던 그를 위한 배려였다.

고 김대중 대통령의 최측근이었던 박지원 민주당 의원은 분향소를 찾아 문상을 하기도 했다. 박 의원은 김 화백과는 일면식도 없었던 사이. 김 화백의 부인 강혜경 여사가 “본의 아니게 마음 아프게 했을 수도 있는데 이렇게 찾아주셔서 감사하다”고 인사를 전하자 박 의원은 손사래를 치며 이렇게 말했다. “김상택 만평에 나오는 것 자체가 영광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