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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일보는 1979년 6월14일자 1면 머리기사로 ‘방황하는 농촌’ 기획기사를 실었다. ‘가축 사료가 되는 보리/ 대풍마늘등 노변 방치’라는 제목으로 참담한 농촌실태를 고발한 기사였다. 그러나 당초 10회 예정이던 이 기획기사는 중정의 압력으로 1회만 나가고 중단됐다. (조선일보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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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촌실태 보도 불순한 의도 캐물으며 철야조사
주재기자 각 지부로 소환…연재 1회로 중단돼두 사람은 말이 없었다. 달리는 차창 안으로 바람 소리만 가득했다. 가로수들이 뒤로 계속해서 밀려났다. 6월도 중순으로 접어들면서 연초록 가로수들은 하나 둘 진초록으로 옷을 갈아입고 있었다. 신동호는 최준명의 얼굴을 흘끗 쳐다보았다. 최준명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멍하니 창밖을 응시하고 있었다.
“최준명 기자시죠?”
“네, 그런데 누구….”
“중정에서 나왔습니다. 알아볼 게 있는데, 같이 가시죠.” 낯선 두 사내는 그의 손을 잡아끌었다. 1979년 6월15일 오후 5시30분께 조선일보 경제부 최준명 기자는 중정 요원들과 함께 조선일보 편집국을 나왔다. 편집국장 신동호는 걱정하지 말라는 눈빛을 보냈고, 기자들은 안타까운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그날 최준명이 연행된 곳은 중앙정보부(현 국가정보원) 남산 지하실. 수사관들은 조사실에 도착하자 그의 허리띠를 풀고 회색옷으로 갈아입힌 뒤 취조를 시작했다. 수사관들은 조선일보가 6월14일자 1면 머리기사로 내보낸 ‘방황하는 농촌’ 기획기사에 대한 취재 동기와 과정, 사실 여부 등을 신문했다. 이 기사는 공업단지 주변의 마을이 공해로 시들고 이농이 잇따라서 농가마다 늙은 일손만 남았다는 참담한 농촌실태를 보도한 것이었다.
수사관들은 번갈아 들어왔고 그는 똑같은 말을 수없이 되풀이했다. 조사 받고, 반성문 쓰고, 또 조사 받고 반성문 쓰고…. 시간이 흐를수록 심문 요지는 불순한 의도를 갖고 기사를 쓴 저의가 무엇이냐는 쪽으로 집중됐다. 산업화에 밀려 어려워진 농촌을 돌아보자는 취지로 썼다는 말에 수사관들은 콧방귀만 뀌었다.
중정 수사관 “불순한 의도 있었지!”책상 하나와 철제 침대가 덩그러니 놓여 있는 지하 조사실은 촉이 낮은 백열등으로 어두웠다. 창문 하나 없이 사방이 꽉 막혀 낮인지, 밤인지 분간이 안 되는 곳에서 최준명은 몸과 마음이 지칠 대로 지쳐갔다. 없는 사실을 지어낸 것도 아니고, 여러 차례 똑같은 진술을 했는데도 수사관들은 집요했다.
‘이 ××, 개전의 정이 있는 줄 알았더니 아니잖아, 불순한 의도를 갖고 썼다고 말해!’라고 소리를 지르고 책상을 내리치는 수사관이 있는가 하면 ‘사실 요즘 농촌이 이래’라며 동조하는 말로 은근히 떠보는 사람도 있었다. 5년 전 백기범, 신홍범 기자의 복직을 주장하며 신문제작을 거부하다 파면된 사실을 거론하며 위협하기도 했다.
“내가 쓴 기사와 주재기자들이 취재해 올린 내용이 일치하는지 등을 조사하더군요. 심문내용이 상당히 구체적이었어요. 그래서 ‘조사를 어느 정도 끝냈구나’라고 생각했죠. 기사를 대표 집필한 사람으로서 동료들이 피해를 입지 않도록 진술해야겠다는 마음뿐이었습니다. 각서를 쓰고 풀려난 날, 편집국장이 차를 가지고 입구에서 기다리고 있더군요.” 최준명은 말했다.
그만 중정에 연행된 것은 아니었다. 경제부 최준명 이외에 사회부 유정현, 정운성 기자, 사진부 민경원 기자도 연행됐다. 그들은 ‘방황하는 농촌’ 기획기사를 위해 조선일보가 꾸린 농촌실태특별취재팀원으로, 그해 5월20일부터 6월5일까지 15일간 전국을 돌며 농촌실태를 취재했다. 그들의 취재와 주재기자들이 보고한 내용은 6월14일자 1면 머리기사 기획시리즈 ‘방황하는 농촌’ 첫 번째 편으로 보도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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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퇴계로 쪽에서 바라본 남산 중앙정보부 본청 전경. 왼쪽 안테나가 솟은 수사국 건물 밑이 그 유명한 ‘지하실’이다. 1964년 6월 중순 당시 사회부 기자였던 유정현을 태운 중정 차량은 남산 1호 터널 톨게이트 옆으로 난 길을 따라 수사국 건물로 향했다.(동아일보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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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가에 버려진 양파를 망연자실하게 바라보는 한 농촌 아낙을 클로즈업한 사진을 가운데 실어 참담한 농촌실태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그 기사의 첫 문장은 이렇게 시작한다. “농촌의 시름이 크다. 잇따른 이농으로 부족한 일손, 허물어진 축산기반, 판로가 없는 대풍 원예작물…. 영농의욕을 앗아간 시름들이 겹겹이다….” 그러나 전국 취재망을 동원한 이 연재는 1회만 나가고 말았다. 중정의 압력 때문이었다.
중정, 보도 다음날 보고서 작성중정은 기사가 나간 뒤 곧바로 대대적인 조사에 착수했다. 기사가 나간 다음날 오후부터 본사 기자 4명을 ‘남산’으로 연행해 조사를 벌였고, 방우영 사장과 신동호 편집국장도 한때 연행했다. 또 인천 주재기자 신원철을 비롯해 춘천, 충주, 금천, 포항, 부산, 순천 주재기자 7명을 중정 각 지부로 소환해 조사했다.
“기사가 나간 당일(6월14일)로 기억해요. 그날 오후 인천시청 기자실에 있는데, 중정 요원들이 왔어요. 지하실 독방에 가둬 놓고 취재 동기, 취재원 등에 대해 몇 번씩 쓰라고 하더군요. 고압적으로 나왔던 수사관들이 시간이 지나면서 ‘식사는 무얼 드시겠느냐’, ‘빨리 끝내고 갑시다’ 등 유화적으로 바뀌었어요. ‘본사 고위층이 중정과 채널을 가동했는가 보다’라고 생각했죠. 밤샘 조사를 받고 다음날 새벽에 풀려났어요.” 당시 인천 주재기자였던 신원철은 말했다. 그는 사회부장 김대중의 지시로 인천과 가까운 경기도 시흥군 수암면 등에서 농촌실태를 취재해 본사에 전달했다.
중정은 기자들에 대한 조사내용을 문건으로 작성해 청와대에 보고한 것으로 국가정보원 과거사위 조사결과 확인됐다. 국정원 과거사위에 따르면 중정은 보도가 나간 다음날인 15일 ‘조선일보 보도내용 현지확인 결과’ 보고서를 작성했다. 이 보고서는 “보도내용 중 주요부문 20개 항목을 각 지부에 확인한 결과 △13개 항목은 보도내용과 거의 일치하고 있고 △6개 항목은 사실과 일치하지 않고 있으며 △1개 항목은 확인 중에 있다”면서 “보도내용은 대체로 없는 사실을 보도한 것은 아니나 농촌의 어두운 면만을 집약 부각시켜 1면 머리기사로 취급함으로써 민심을 자극할 우려가 있다”고 돼 있다.
또 중정 수사국은 기사내용과 관련, 해당지역 주재기자에 대해 구체적으로 조사 규명해 기한 보고를 지시했고, 각 지부들은 6월16일 관련 내용을 본부로 보고한 것으로 밝혀졌다. 조사 내용은 ‘인적사항, 취재경위, 사실을 왜곡 취재 송고한 경위, 농촌의 어두운 면만을 부각 취재한 저의, 기타 참고사항’ 등이었다.
박정희 “농촌이 시름에 빠졌다고?”중정은 수사결과를 바탕으로 6월18일 최종 보고서를 작성했는데 내용은 이랬다. “사실과 상이한 내용을 취재보도한 본사 최준명, 민경원 등 2명과 인천주재기자 신원철 등 각 지역주재기자 7명 도합 9명의 행위는 대통령 긴급조치 9호 1가(유언비어 유포) 위반이나 사안이 경미하고 신문사 측에서도 사장 방우영, 편집국장 신동호 등이 사전 기사내용을 확인치 못한 과오를 시인, 향후 자숙하여 이러한 사례가 없을 것임을 서약했고, 본인들도 잘못을 깊이 뉘우치고 있으므로 각서 징구 후 엄중 경고 방면한다.”
중정이 조선일보 기사를 과장보도로 규정하고 10여명이 넘는 기자들을 연행해 조사하고 청와대에 보고한 데는 다른 이유가 있었다. 그것은 대통령 박정희의 노여움 때문이었다. 박정희는 조선일보 ‘방황하는 농촌’ 보도를 보고 노발대발했다고 전해진다. 대통령이 격노했다는 소식에 중정은 비상이 걸렸고, 중정은 본부는 물론 각 지부까지 동원하며 동시다발적인 조사를 진행했다.
“나중에 들은 얘기인데, 박 대통령이 기사를 보고 당시 청와대 경제특보였던 남덕우, 박진환에게 화를 냈다고 해요. ‘나는 농촌 출신이다. 농촌에 대한 애정을 갖고 농정을 펼쳤다. 새마을운동을 벌여 보릿고개도 극복하지 않았느냐. 그런데 농촌이 시름에 빠졌다고…. 조선이 이런 기사를 쓸 수 있는가, 기사를 믿을 수가 없다. 조선이 거짓말을 했거나 아니면 공무원들이 농촌을 살리기 위한 노력을 게을리했거나 둘 중의 하나일 것이다.’” 최준명은 비화를 털어놨다.
1970년대 후반 한국 농촌은 조선일보가 보도한대로 ‘산업화 물결이 이농을 부채질하고 쇠고기 수입으로 축산기반은 무너져 내리고 영농비 부담은 커지는 반면 소득은 떨어지는 시름의 농촌’이 돼가고 있었다. 농업농촌은 공업화를 기치로 한 성장제일주의 정책에 밀려 찬밥 신세였다. 도시와 농촌 간 소득 격차는 확대되고, 대량 이농이 잇따르면서 농촌은 활력을 상실하고 농촌사회는 공동화됐다.
“취재하러 다니면서 농민들을 여럿 만났는데, 생활이 이만저만 어려운 것이 아니었어요. 마늘, 양파값은 폭락하고 보리는 사료로 쓰이고…. 기사가 잘못된 내용이었다면 쉽게 풀려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중정은 민심이반 운운하는데 나는 있는 사실을 그대로 쓴 죄밖에 없어요.” 당시 사회부 기자로 무안, 함평 등 전라도 일대를 취재했던 유정현은 말했다.
결국 조선일보가 전국에 취재망을 동원, 작심해서 기획했던 ‘방황하는 농촌’ 시리즈는 1회만 나가고 연재가 좌절됐다. 급속한 산업화로 피폐화된 농촌에 대한 정책적 지원이 필요하다는 언론의 메시지를 박정희 정권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리고 그 정권은 5개월도 안된 그해 10월26일 궁정동에 울린 여러 발의 총소리로 종말을 고했다.
참고자료
△국정원 진실위 보고서-언론·노동편
△‘한국의 언론통제’ (김주언 지음, 리북)
△조선일보 70년사 제2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