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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압거부 80시간 철야농성…자유언론실천 기폭제

<6> 한국일보 기자 민주언론 수호 선언

김성후 기자  2009.02.25 15:0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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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와 관련, 장강재 사장과 김경환 편집국장이 연행되자 이 문제의 사실보도를 요구하며 윤전기 앞에서 농성하고 있는 한국일보 기자들.(74년 10월25일)  
 
중정, 월남 기사 문제 삼아 발행인·편집국장 연행
기사 게재 요구 사측 거부하자 기자들 윤전실 시위
민주언론 수호 결의…2년차 유신정권에 비수 꽂아


1974년 10월25일 0시30분. 서울 종로구 중학동 한국일보사 4층 사장실은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장강재 사장과 기자 대표 3인(박실 김기경 김환겸)이 모여 회합을 갖고 있었다. 기자들은 25일자 신문에 사장과 편집국장의 중앙정보부 연행 사실과 기자총회 결의문을 신문에 게재할 것을 요구했다.

“오늘은 반드시 게재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을 경우 제작을 거부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번 사태는 불행한 일입니다. 나도 이번 사태 당사자 중 한사람입니다. 그러니 회사를 믿고 기다려 주세요.”
“윤전실에서 농성 중입니다. 윤전기가 돌아가면 모래를 끼얹어버리겠다는 기자도 있습니다. 기자들의 의지가 확고합니다. 용단을 내리십시오.”
“의사 표시는 그 정도로 충분합니다. 회사 입장도 이해해주세요. 신문이 안 나오면 정보부에서 문제 삼을 것이고 그러면…. 곤란해집니다. 왜 모르세요?”

장강재는 피곤한 듯 눈을 감았다. 잠시 침묵이 흐르고 기자 대표들은 몸을 일으켰다. 경기판, 서울 시내판 인쇄시간이 점점 다가오고 있었지만 결론은 나지 않았다. 이날만 네 번째 회합이었다.

편집국이 술렁이기 시작한 것은 사흘 전인 22일, 김경환 편집국장이 기관원 2명의 손에 이끌려 중앙정보부로 연행되면서부터. 그의 연행사실이 알려지자 3판 제작을 마친 편집국 기자들이 견습 25, 26, 27, 28기를 중심으로 철야농성에 들어갔다. 김경환이 그날 통금시간인 밤 12시가 넘도록 귀사하지 않자 기자들은 총회를 열어 연행사실을 23일자 지면에 보도하기로 결의하고 야간국장에게 게재를 요구했다. 야간국장이 기사 게재를 거부하자 기자들은 2층 정판부로 내려가 서울 시내판 마감시간인 새벽 3시까지 기사를 게재하라고 야간국장을 압박했다. 그러나 기자들의 요구는 실현되지 않았다.

견습 25~28기 중심 철야농성 시작
다음날인 23일 낮 12시께 더 놀라운 뉴스가 기자들에게 전해졌다. 이날 오전 11시께 귀사한다던 편집국장은 귀사하지 못한 채 장강재 사장과 이상우 종합편집부장이 임의동행 형식으로 중앙정보부에 연행됐다는 것이다. 이들의 연행은 기자들의 분노를 더욱 부채질했다. 세 사람이 연행된 것은 한국일보 10월 22일자 3면 ‘국제초점’란에 실린 ‘반정 절정…티우의 고민’이라는 홍순일 순회특파원의 분석기사 때문이었다. 이 기사는 홍 특파원이 베트남 구엔 반 티우 대통령 인터뷰 기사를 10월18일자 1면 머리기사로 보도한 지 나흘 뒤 실은 베트남의 정치상황을 다룬 해설기사였다.



   
 
  ▲ 김경환 편집국장 등 편집 간부들이 편집국장실에서 수권위원들과 만나 의견을 교환하고 있다. (74년 10월24일)<한국일보 제공>  
 
중정이 이 기사를 문제삼은 것은 ‘보좌관들 부패는 바로 티우의 부패’, ‘광범한 개혁 요구에 체제 위협 우려’라는 제목을 붙인 것이 박정희 정권의 심기를 건드렸기 때문.

세 사람을 연행 조사한 이유는 국가정보원이 2007년 펴낸 ‘국정원 진실위 보고서’에서 더욱 분명하게 드러난다. 중정은 그해 10월26일 작성한 ‘한국일보 월남사태 특집해설기사 보도경위조사보고’에서 “발행인 장강재, 편집국장 김경환 및 편집부장 이상우 등은 문공부 당국의 보도한계지침 내용을 소홀히 취급함으로써 반정부적 학생 및 종교인 등을 자극 선동하는 보도를 한 데 대하여 본 조사를 통하여 그와 같은 보도가 국내 사태를 더욱 혼란케 하였다…”고 썼다.

장강재와 김경환, 이상우는 23일 밤 11시께 조사를 마치고 귀사했다. 철야총회를 진행 중이던 기자들의 박수를 받으며 편집국에 들어선 김경환은 “나의 신변을 염려해준 데 대해 충심으로 감사한다. 여러분이 나 자신의 문제만을 걱정한 것이 아니라는 것은 알고 있으나 사건을 더 이상 확대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고 말했다. 사실상 귀가를 종용하는 말이었다. 그러나 기자들은 귀가를 거부했다. 기자 1백여명은 박실 제2화요회장의 주재로 총회를 속개, 발행인 등 3간부의 연행조사 사실을 보도하기로 결의, 야간국장에게 개재를 요구했다. 야간국장은 연행됐던 당사자들이 이를 거부한다는 이유로 게재를 거부했다. 기자들은 24일 새벽 3시께 다시 정판부로 내려가 농성했지만 기사는 실리지 못했다. 기자들은 새벽 4시30분께 편집국에서 3차 총회를 속개, 앞으로 대책을 제2화요회 상임간사단에 일임키로 결정했다. 당시 한국일보에는 주로 평기자가 회원이었던 기자협회 지회를 대신해 국장급까지 회원 자격이 있는 제2화요회가 기자총회의 역할을 하고 있었다.

기자총회에 외신·타 신문도 모여들어
제2화요회 상임간사단은 24일 오후 6시에 소집됐다. 열띤 토론 끝에 ①기사 게재를 요구하되 관철되지 않을 경우 즉각 신문 제작을 거부할 것과 ②결의문과 행동지침을 채택하여 매듭짓는다는 최종 방안을 총회에 건의키로 결정했다. 밤 8시 편집국에서 제4차 기자총회가 열렸다. 총회는 상임감사단이 건의한 2가지 결의사항에 대해 무기명 비밀투표에 들어갔다. 개표 결과 찬성 63표, 반대 21표가 나와 건의 내용을 그대로 채택했다. 기자들은 밤 10시에는 ‘민주언론 수호 결의문’과 행동지침 4개항을 선언했다. 총회가 진행되는 동안 미국의 워싱턴 포스트, CBS, 일본의 NHK, 후지TV 등 외신기자들이 취재에 열을 올렸다. 타 언론사에서도 기자를 파견해 한국일보 편집국의 긴박한 움직임을 자사의 편집간부와 동료들에게 보고했다.



   
 
  ▲ 한국일보 기자들이 편집국에서 기자총회를 열어 발행인 등의 연행 사실을 보도하기로 결의했다. (74년 10월23일) <한국일보 제공>  
 
제작 거부에 들어간 기자들은 부별 대표 17명으로 수권위원회(위원장 박실, 부위원장 김기경 김환겸)를 구성하고 발행인 및 편집간부들에게 총회 결의사항을 전달했다. 기자들의 제작 거부에도 불구하고 밤 11시30분께 5판 신문이 3판 그대로 인쇄되자 기자들은 수권위로 하여금 “제작 거부는 발행 중지를 뜻한다”는 것을 간부진에게 통고하도록 하고 공장으로 모두 내려가 윤전기 앞에 연좌했다.

경기판과 서울판 인쇄시간이 다가온 25일 새벽 2시, 경기판 인쇄가 시작되자 기자들은 윤전기의 비상 스톱 스위치를 눌러 인쇄를 중단시켰다. 기사 게재를 반대해 온 장강재는 새벽 3시께 “윤전실에서 농성 중인 기자들이 편집국으로 올라오면 결정을 내리겠다”고 통보했다. 그러나 기자들은 윤전기 앞에서 물러나지 않았다. 기자들은 윤전기 접근을 막으며 자유언론 수호, 민주언론 실천을 외쳤다. “즉각 보도하라”는 외침이 차가운 새벽 공기를 타고 윤전실 안에 회오리쳤다.

사장이 윤전기 누르면 기자들이 정지시켜
새벽 4시30분께 장강재가 직접 윤전실로 내려왔다. 그는 경기판 인쇄를 위해 시동 스위치를 직접 눌렀다. ‘안됩니다’, ‘사장은 각성하라’는 외침이 여기저기서 터져나왔다. 누군가 비상 스톱 스위치를 눌러 윤전기 가동을 중단시켰다. 누르면 끄고, 누르면 중단시키고…. 기자들과 발행인 사이의 피 말리는 대치가 계속되었다. 결국 장강재는 윤전실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얼마 후 기사 게재를 결정했다는 회사 방침이 나왔다. 아침 5시가 조금 넘어선 시간이었다. 정판부는 곧 개판작업에 착수, 이 날짜 신문은 평상시보다 3시간 이상이나 늦은 6시35분에 발행이 시작됐다. 뒤늦게 가동된 윤전기가 민주언론수호 결의문 전문 등이 보도된 25일자 신문을 토해낼 때 기자들은 부둥켜안고 함성을 터뜨렸다.

“난리가 났다고 봐야죠. 끌어안고 만세를 부르고…. 그 길로 집에 갈 수가 있나. 다들 청진동 해장국집에 갔어요. 술이 거나하게 취했죠. 온통 그 얘기뿐이었어요. 당시는 신문을 몇 부씩 손에 쥐고 가는 것이 습관이었는데, 기자들은 기사를 읽고, 또 읽고, 또 읽었어요. 감격스러워하던 기자들의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당시 견습 27기로 철야농성 현장을 지켰던 김영호(현 언론개혁시민연대 대표)는 말했다.

10월25일자 한국일보 경기판과 서울판 1면에는 ‘한국일보 기자일동(記子一同), 민주언론 수호(民主言論 守護) 결의’라는 제목으로 3단 기사가 나왔다. 부제로는 ‘오늘 새벽 외부 간섭(外部 干涉) 배제 등 4개 지침 채택’이 달렸다. 철야농성 3일, 80시간이 넘은 투쟁 끝에 나온 역사적인 신문이었다.

이 기사는 박 정권에 대한 도전이었다. 1974년 1월부터 긴급조치를 남발하며 강압통치를 펼쳤던 박 정권의 심장부를 겨냥한 비수나 진배없었다. 한국일보 기자들의 3일간 철야농성은 24일 밤 동아일보 기자들의 자유언론실천선언과 함께 자유언론의 불을 지폈고 이 운동은 삽시간에 전 언론계에 번졌다.

그해 12월10일, 노조 창립대회
“당시는 엄혹한 시절이었다. 제대로 기사 한줄 쓰지 못했다. 1단이라도 권력의 비위에 거슬리면 연행해서 위협했고 걸핏하면 기자들에게 폭행을 가했다. ‘이러고도 내가 기자인가’라는 자책감이 많았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일보와 동아일보에서 시작한 언론자유수호운동이 기자들의 양심에 불을 지폈고, 그 불은 삽시간에 번졌다.” 당시 견습 28기였던 조성호(현 지역신문발전위원회 위원장)는 10·24선언을 이렇게 평가했다.

그러나 10·24 이후에도 지면은 달라지지 않았다. 그해 11월8일 동아방송의 노재성 기자가 연행된 사실이 초판에는 보도되었다가 다음 판에 빠졌고, 11월22일 동아일보의 제작거부 사건이 1면 1단으로 보도됐다. 이런 일이 잇따르면서 언론자유수호선언을 실천으로 옮기기 위해서는 기자들의 힘을 한데 모을 조직이 필요하다는 공감대가 형성됐다. 그런 가운데 10·24선언 주동자들에 대한 경영진의 보복 인사가 있었다. 한국일보는 그해 11월 말 10·24선언을 주도적으로 이끈 20여명의 젊은 기자들을 한국일보가 아닌 자매지 등지로 인사조치했다. 이 사건은 노조 결성에 불길을 댕겼다.

그해 12월10일 한국일보 기자 31명은 서울 서대문구 중림동 서울역 뒤편 신진식당에서 창립총회를 가졌다. 그러나 한국일보 노조는 이창숙 지부장이 당일 해고통지를 받고, 한달 후 노조설립신고를 반려당하는 등 고난의 세월을 보냈다. 철야농성 3일, 80여시간의 투쟁을 자양분으로 태어난 한국일보 노조는 법외 노조로 전전하다 1981년에는 간판마저 내리더니 1987년 10월29일에야 비로소 합법노조로 세상에 나왔다.


※참고자료
△‘유신치하 한국일보 기자노조 투쟁사-1974년 겨울’(한국일보 ‘74노조 출판위원회 지음, 미디어집)
△한국일보 30년사, 50년사
△‘한국의 언론통제’(김주언 지음, 리북)
△기자협회보 333호, 334호, 340호
△자유언론-1975~2005 동아투위 30년 발자취(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 해담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