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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재용 KBS 시사보도팀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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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거 취재 거의 안 될 거예요, 재용씨.”
스포츠 분야 성폭력 취재를 시작하면서 어떻게 접근해야 할 지 앞이 깜깜했다. 그래서 여성계 취재 경험이 풍부한 동료 기자에게 조언을 구했다. 돌아온 답변은 한마디로 ‘사실상 취재 불가’였다.
성폭력 피해자의 신분이 노출되는 순간 그들의 용기를 찬양하는 대신 오히려 삐딱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우리 사회의 인식이 가장 큰 문제라고 했다. 더구나 2차 피해를 양산하는 반인권적인 수사 과정과 시대에 역행하는 수많은 솜방망이 판결에 대한 불신이 너무나 깊다고도 했다.
본격적인 취재가 시작되면서 예상했던 상황이 벌어졌다. 어떤 피해자와 가족들도 취재를 허락하지 않았다. 오히려 일부 부모들은 이제 간신히 살아가는 아이에게 또다시 상처를 주겠다는 거냐며 욕설을 퍼붓기도 했다. 인터뷰 약속을 하고서도 결국 현장에 모습을 드러내지 못한 피해자도 한두 명이 아니었다. 범죄 피해자이면서도 세상의 눈을 피해 살아가야 하는 그들의 고통이 너무나 아프게 다가왔다.
답답했다. 피해자 인터뷰가 없으면 방송은 불가능했다. 그러나 그냥 포기하기엔 상황이 심각했다. 무엇보다 문제의 원인이 잘못된 스포츠계의 제도와 시스템에서 시작됐기 때문에 그냥 놔두면 구조적으로 반복될 수밖에 없다는 데 사태의 심각성이 있었다.
결국 취재팀은 비밀리에 사건 관계자들과 피해자 주변 선후배 친구들을 접촉한 뒤 그들의 설득을 통해 피해자들에게 접근할 수 있었다.
정보를 제공해준 분들 모두 취재에 협조했다는 것이 알려지면 평생 살아 온 스포츠계를 떠나야 할 만큼 위험 부담이 큰 상황이었다. 취재팀을 믿고 위험을 감수해 준 그 분들의 협조가 없었다면 스포츠와 성폭력에 대한 보고서는 세상에 나올 수 없었을 것이다.
드디어 피해자들이 입을 열기 시작했다. 인터뷰가 끝날 때쯤이면 항상 같은 말이 이어졌다. “이건 아무것도 아니에요. ○○사건도 아시죠? ○○를 찾아가 보세요.”
한번 물꼬가 트이자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엄청난 사건들이 터져 나왔다. 연달아 터져 나오는 증언에 취재팀조차 입을 다물 수 없을 정도였다.
놀라운 것은 대부분 사건들이 거의 같은 형태로 벌어졌고 거의 같은 방식으로 덮여졌다는 점이었다. 오직 승리와 대학 진학, 취업을 위해 모든 것을 걸어야 하는 구조를 바꾸지 않는 한 문제 해결은 불가능하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방송 이후 정부와 여당은 학원 스포츠의 구조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학생 선수 최저학력제도’ 도입을 결정했다. 늦었지만 다행이 아닐 수 없다.
남은 과제는 이제 시작인 스포츠 개혁이 성폭력까지 유발했던 승리지상주의에서 벗어나 국민 모두에게 스포츠의 혜택을 나눠줄 수 있도록 지켜보며 감시하는 것이다. 그것만이 힘겹게 정보를 제공해준 분들과 피해자들에게 보답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