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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향신문 편집국은 1985년 7월25일 학원안정법 특종기사로 편집국 간부 및 기자들이 안기부에 연행되자, 손광식 편집국장 주재로 대책회의를 열었다. (경향신문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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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共, 대학 운동권 제압 위해 1985년 7월 일명‘허문도법’ 제정 추진
민주화 열망·언론보도에 의해 무소불위 권력 무릎 꿇은 첫사례1985년 7월25일 석간 1판 마감을 마친 경향신문 손광식 편집국장과 강신구 사회부장 등은 한 일식당에서 점심식사를 하던 중 청와대로부터 다급한 전화 한 통을 받았다.
“그건 사실이 아니다. 신문사가 숙고해서 결정하라”는 식의 협박성 전화였다.
1면에 나온 사회부 김현섭 기자가 쓴 ‘「學園安定法」제정 추진’과 정치부 김지영 기자가 송고한 ‘盧총리·盧대표 대책협의’라는 기사가 5공화국을 자극한 것.
‘학원안정법’은 운동권 학생을 영장 없이 체포해 구금하고 교육시킬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데모가 자주 발생할 경우 교수들도 공동책임을 지게 하는 내용 등을 주요 골자로 한 그야말로 ‘악법 중 악법’이었다. 한마디로 80년대 삼청교육대의 연장선장에서 비롯된 발상이었다.
이 때문에 이날 1판 배달을 위해 출발했던 발송차량들은 고속도로 입구에서 제지당한 채 회사로 되돌아왔다.
당시 언론사 사내에는 ‘남산에서 온 손님’(안기부 직원)이 제집 드나들듯 한 ‘암흑의 시대’였다.
손광식 국장과 홍성만 정치부장, 강신구 사회부장 등은 청와대 대변인 출신의 정구호 사장 모르게 가판 마감 직전 이 기사를 1면에 넣었다. 경향만 하더라도 실질적인 인사권과 소유권을 청와대가 쥐고 있던 시기였다.
이들은 올 것이 왔다는 듯이 회사로 돌아와, 김현섭 기자를 도피시키는 한편 김지영 기자를 회사로 불러들였다. 김현섭 기자는 몰라도 김지영 기자까지 취조대상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홍성만 정치부장은 중앙청 경향신문 전용전화를 통해 김지영 기자에게 “회사로 들어오라”는 말을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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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향신문의 단독보도로 학원안정법이 만천하에 알려졌다. 사진은 7월25일자 지면. (경향신문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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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와 다른 부장의 목소리를 의아하게 생각한 김지영 기자는 “무슨 일입니까”하고 다시 물었으나 재차 “일단 들어 와보라”는 대답만 되돌아 왔다.
영문도 모른 채 회사로 온 김지영 기자는 편집국 회의실 안에 기다리고 있던 안기부 직원과 이날 1면을 봤을 때 비로소 분위기를 파악할 수 있었다.
80년 ‘서울 봄’은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으로 끝났지만 85년은 민주화 열기가 다시 움트기 시작한 해였다. 반면 5공 입장에선 위기감이 감돌던 시기였다.
85년 2·12총선에서 신민당과 민한당 등 신당 돌풍이 불면서 민정당은 이들보다 전국 득표율에서 14%포인트나 뒤처졌다.
이 같은 민주화 열망을 등에 업고 3월 재야세력이 재결집해 ‘민주통일 민중운동연합’을 결성했다. 4월에는 대학의 운동권 학생들이 각 대학 학생회를 중심으로 ‘민족통일·민주쟁취·민중해방특별위원회’라고 불렀던 ‘삼민투위’를 결성, 그해 5월 서울 미문화원 점거농성사건을 일으켰다.
그때서야 김 기자는 이날 오전 노신영 국무총리와 노태우 민정당 대표, 이규호 청와대 비서실장, 장세동 안기부장, 허문도 청와대 정무제1수석비서관 등 ‘6인 회의’멤버들이 비밀리에 회동을 가진 의도를 파악할 수 있었다.
얼마 전부터 정치부 동료들 사이에선 “정부나 민정당에서 무언가 학원대책을 심각하게 준비하는 것 같다. 잘 챙겨보자”고 서로를 독려했고, 타사 기자들 역시 이런 기류를 느낀 것은 마찬가지였다.
또 정부 핵심 관계자도 기자들을 만나, 학원안정법과 같은 취지의 법안을 만들어야 한다는 말을 공공연히 하고 다녔다. 설마 언론에서 이를 쓸 수 있겠느냐는 오만방자에서 비롯된 것이다.
안기부 수사요원 2명은 이날 1차로 홍성만 정치부장과 김지영 기자를 연행했고 이어 손광식 국장과 강신구 사회부장, 이실 정치부차장도 남산 지하 취조실로 끌고 갔다.
남산 안기부 뒷문에 들어서자마자 욕설과 구타가 시작됐다. 안기부 직원은 취조에 앞서 저항하는 김지영 기자를 벽에 세워놓고 “안경을 벗어”라는 말이 떨어지게 무섭게 주먹을 무차별하게 날렸다. 본능적으로 막았지만 속수무책. 나중에 조사관 2명을 더 동원해 각목까지 휘둘렀다.
이날 주된 취조 내용은 “김현섭이 어디로 갔느냐”와 “고위당정대책회의를 한다는 얘길 누구한테 들었느냐”였다.
당시 김현섭 기자는 “기사가 문제가 됐으니 잠시 몸을 피해 있는 것이 좋겠다”는 강신구 사회부장의 지시에 따라 김학순 선배 집과 한국일보 신재민 기자(현 문화체육관광부 차관) 집 등으로 몸을 피한 상태였다.
김지영 기자는 대책회의의 경우 취재가 안돼 작문을 했다고 얼버무렸으나 행방이 묘연한 김현섭 기자에 대한 얘기는 몰랐고 굳이 알았다고 해도 말할 수조차 없었다.
취조는 계속 이어졌고 자술서 쓰기와 구타 등은 반복됐다.
강신구 부장 역시 3일 동안 취조를 당하면서 “정치적 음모가 있지 않느냐”고 캐물을 정도로 여권 내에서 민감하게 반응했다.
당시 안기부장인 장세동씨였고 학원안정법을 주도한 사람은 청와대 수석비서관인 허문도 씨였다. 학원안정법을 ‘허문도 법’이라고 알려질 것은 허씨의 과잉충성에서 비롯됐기 때문이다.
이 두 사람은 여권 내의 강경파였다. 장세동 씨와 2인자 경쟁을 벌이던 민정당 노태우 대표와 이종찬 총무는 상대적으로 온건파에 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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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향신문 보도 이후 정치권의 최대 쟁점으로 학원안정법이 부상했다. 야당뿐만 아니라 학생들이 반발하면서 학원안정법 제정기도는 무산됐다. 사진은 8월13일 김영삼, 김대중 당시 민주화추진협의회 공동의장이 개최한 ‘학원안정법 저지 공동회견’에서 김대중 연설 장면. (경향신문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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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이 사건은 여권 내 권력투쟁과 맞물려, 취조 상황이 시간대별로 청와대에 보고될 정도로 민감했다.
장세동 씨는 학원안정법에 대한 정보를 온건파가 언론에 의도적으로 흘린 것으로 짐작했던 것으로 보인다. 노태우 대표가 주범이 아닐까 생각했고 이를 계기로 노 대표를 권좌로부터 밀어낼 속셈이었다.
그만큼 이 문건에 대해 안 사람은 여권 내에서 소수였고 여권 핵심에서도 의견이 분분할 정도로 말이 많은 법안이었다.
그러나 이 문건은 엉뚱한 곳에 유출됐다. 김현섭 기자의 대전고 동기동창인 정재학 씨(현 국민일보 대전주재 부장)로부터 확인됐다. 정 기자는 당시 민정당 학원특위 위원장인 남재두 의원의 보좌관이었다.
당시 경향은 80년 언론기본법에 따라 문화방송과 결별해 ‘사단법인’형태로 분리됐다. 사단법인은 법적으로 문광부에 예산 보고와 감사를 받아야 하는 등 친정부적인 성향을 띨 수밖에 없었다.
기자들이 안기부에 연행되자 편집국은 밤샘 농성에 들어갔고 대책회의가 열렸다. 28일 사장과 감사 등 회사 내 주요 임원과 간부들이 참석한 대책회의가 또 다시 열리면서 “회사를 살리기 위해 취재원을 밝힐 수밖에 없다”는 주장과 “취재원을 밝힐 수 없다”는 입장이 팽팽히 맞설 때쯤, 안기부 직원들이 다시 관련자들을 연행하기 위해 찾아왔다.
이후 임원들과 회의를 통해 안기부 직원은 물러나고 이 과정에서 취재원에 대한 정보가 흘러나간 것으로 추측된다.
이후 경향신문과 기자들의 집 등을 감시했던 안기부 요원들은 철수하면서 진정국면으로 들어가는 듯했다.
5공은 학원안정법 공개파문 여부로 노태우 대표만 유임한 채 당 3역을 교체했다. 정부여당은 또 관변단체를 동원해 세미나를 열고 입법의 정당성을 홍보하는데 열을 올렸다.
그러나 학원안정법은 최대 정치 쟁점으로 부상하면서 정국이 경색됐다. 신민당은 학원안정법 입법추진을 포기하지 않는 한 국회의 정상적 운영에 협조할 수 없다는 입장을 발표했고, 학생들의 저항운동도 가세했다.
결국 전두환 대통령은 8월16일 이민우 신민당 대표와 영수회담을 통해 학원안정법 추진을 유보했고, 끝내 입법도 좌절됐다.
학원안정법이 추진됐다면 많은 학생들이 ‘선도’라는 명목 아래 법적 절차도 없이 마구잡이로 끌려가 격리돼 삼청교육대와 같은 인권탄압을 받았을지도 모른다.
이를 막아낸 첫 시발점은 경향신문 보도였다. 학원안정법 입법 좌절은 무소불위의 권력이 언론보도와 민중의 ‘민주화 열망’에 무릎을 꿇은 첫 사례로 평가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김지영 전 기자는 “민주화에 대한 국민적인 열기가 계속 뿜어져 나오자 군사정부 체제가 흔들리면서 무리수를 둔 게 학원안정법”이라면서 “그러나 당시 세계사적인 흐름이나 국민적인 수준으로 놓고 봤을 때 좌절될 수밖에 없는 법안이었다”고 말했다.
※참고자료
저널리즘 1994겨울호 ‘우리사 취재일화’
경향신문 50주년 사사
한국현대사 산책(강준만 지음, 인물과 사상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