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본홍씨가 YTN 후배 기자들을 해직시킨 것은 그 스스로 언론인으로서 생명을 해직시킨 것이다.”
1980년 MBC 기자 해직 사건을 구씨와 함께 겪은 MBC 출신 한 언론인은 그의 YTN 기자 해직에 대해 정면으로 비판했다.
민주화의 봄 당시 언론자유 수호와 유신언론 청산을 주장했던 ‘청년 기자 구본홍’이 해직의 칼날에서 살아남은 뒤 승승장구, 낙하산 사장 논란 속에 언론인 해직의 주역이 되는 과정을 지켜보며 MBC 출신 해직 언론인들은 구본홍 사장에 대한 안타까운 심정을 감추지 못했다.
MBC 기자 해직 사건은 3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79년 10·26 사태 이후 MBC 기자들은 ‘통합 기수 모임’을 결성한다. MBC 기자들은 통합 기수 모임 주도로 11월에는 보도국 기자총회를 열어 ‘유신 언론 청산, 언론 자유 수호’를 결의했다.
이듬해 신군부의 정국 장악으로 민주화 시위가 이어지던 5월12,13일 MBC 기자들은 보도국 기자총회를 다시 개최해 검열의 전면 거부를 포함한 결의문을 채택했다. 5월14일 오후9시 ‘뉴스의 현장’에는 이 같은 기자들의 결의가 방송되기도 했다. 엿새 뒤인 5월20일에는 ‘제작 거부 투쟁’ 결의에 이른다.
그를 기억하는 동료들은 구 사장이 이 과정에서 주도적 역할을 했다고 입을 모았다. 한 해직 언론인은 “통합기수 모임의 간사는 1기인 김 모 기자였으나 소극적으로 일관해 동기인 구본홍씨가 실질적 간사 역할을 했다”며 “구씨는 보도국 기자 총회의 사회를 보기도 했으며 유신 언론 청산에 대해 강경한 발언을 한 것으로 기억한다”고 말했다.
이후 신군부가 주도한 언론인 해직 사태에서 MBC 기자들도 전국적으로 1백50명이 일터를 떠났다. 이 때 구 사장은 자신을 포함, 5명의 동기 중 2명이 해직되는 과정에서도 살아남아 입방아에 오르기도 했다.
구 사장의 한 선배 기자는 “후배들 사이에서는 ‘앞장섰던 구본홍씨가 해직 명단에서 어떻게 빠졌느냐’며 설왕설래가 있었다”면서 “그 배경에 갖가지 추측이 난무하기도 했다”고 술회했다.
MBC 해직 기자들 대다수가 복직하는 데는 그로부터 7~8년이 걸렸다. 해직 기자들은 “문 밖도 제대로 나다니지 못할 정도로 심각한 고초를 겪었다”고 말했다.
실제로 한 해직 기자는 화병을 얻어 세상을 떠나기도 했다. 복직자들 사이에서 살아남은 자들에 대한 불만이 더 컸던 것도 이 때문이었다.
MBC 해직 기자들은 동료들의 참담함을 지켜본 그가 30년 만의 ‘언론인 대량 학살’의 주역이 됐다는 사실에 한목소리로 개탄했다. 또 다른 해직 기자는 “해직은 가정을 송두리째 파탄 내는 일이다. 언론인의 길을 가고자 한다면 누가 봐도 해서는 안 되는 일”이라고 했다.
다른 동료 기자는 “우리는 8년간 혹은 그 이상의 말로 할 수 없는 고통을 겪는 동안 구본홍씨는 정치부 기자로 승승장구한 것을 기억한다”며 “나와 다른 인생을 살아온 사람에게 특별히 할 말이 없다”고 냉소적으로 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