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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기부, 쇠망치·장도리로 편집국 유린

기자와 필화 / <3> 안기부, 한겨레 편집국 난입

김성후 기자  2008.10.21 13:4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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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경원 방북사진·윤재걸 취재수첩 요구하며
백골단 등 경찰 8백여명 동원 편집국 유린


1989년 2월 어느 날, 헝가리 부다페스트 포룸호텔. 김대중 평민당 총재가 묵고 있던 3층 스위트룸 주변이 국회의원들로 북적였다. 한겨레신문 기자 윤재걸은 예상치 않은 부산함에 무엇인가를 직감했다. 김 총재는 의원 20여명과 함께 긴급회의를 열고 있었다. 스위트룸에 들어가려고 했지만 한 당직자가 제지했다. 5분쯤 지났을까. 김 총재가 상기된 얼굴로 나왔다. “어이, 윤 동지, 여기 왜 있어?” “이렇게 중요한 회의를 하는데 기자인 제가 왜 나갑니까?” 당시 윤재걸을 포함해 국회 출입기자 25명은 취재단을 꾸려 김 총재의 북유럽 5개국 순방을 동행 취재 중이었고, 그날 기자들은 시티투어를 하느라 모두 외출 중이었다. “윤 동지, 헝가리 대사가 만나자는데 어떻게 하면 좋겠어?” 김대중이 말한 헝가리 대사는 북한대리대사 정모씨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총재님, 만나시면 안됩니다. 귀국하시면 큰 사단이 벌어집니다”라고 하자 김대중은 “윤 동지, 윤 동지 뜻대로 하기로 했소”하며 성큼성큼 지나갔다.



   
 
  ▲ 1989년 7월12일 새벽 한겨레 사원들이 스크럼을 짜고 온몸을 던져 편집국 압수수색을 막고 있다. <한겨레신문 제공>  
 
“윤형, 이 손이 어떤 손인줄 알아”

김 총재를 따라 나오던 국회의원 서경원의 얼굴에는 실망하는 빛이 역력했다. 그는 호텔 6층 윤재걸 방까지 따라왔다. 그는 조명원 베를린대 교수와 함께 김 총재와 정 대사의 만남을 주선했는데 만남이 성사되지 않자 낙담해했다. “윤형, 한겨레 기자만 있어 다행이야. 정 대사가 12시에 온다고 하는데 윤형이 좀 만나주면 안돼?” 윤재걸은 정 대사가 자기 호텔방에 온다는 조건으로 정 대사와 만남을 수락하고 인터뷰 항목을 써내려갔다. ‘첫째, 김일성 주석 인터뷰, 정 대사가 요청해서….’ 서경원은 윤재걸이 써내려가던 메모를 보면서 대뜸 이렇게 말했다. “윤형, 나 이 손이 어떤 손인줄 알아” “뭔 손이요, 일 많이 해서 참 아름다운 손이구만.” 농사꾼 출신이던 서경원의 손은 투박하고 거무튀튀했다. 서경원은 자랑스러운 듯 “김일성 주석과 두 번이나 악수한 손이야”하며 오른쪽 검지를 코에 대면서 ‘쉬~’했다. 윤재걸은 서경원의 느닷없는 고백을 곧이곧대로 믿지 않았다. 서경원은 일본에서 열리는 국제심포지엄에 참석한다며 미국으로 떠나 독일 프랑크푸르트, 체코를 거쳐 북한에 들어갔다고 했다. 그의 말을 반신반의하면서 정 대사를 기다렸다. 하지만 정 대사는 오지 않았다.

그해 3월27일 문익환 목사의 방북사실이 알려지면서 이해찬, 양성우 등 재야출신 몇몇 의원들에 대한 방북혐의가 유포되기 시작했다. 이날 국회 기자실에 앉아있던 윤재걸은 정치인들의 무용담 정도로 치부했던 포룸호텔에서 서경원의 말이 떠올랐다. 여의도 국회의원 회관 2동502호로 서경원을 찾아갔다. “서 의원의 열정에 찬 북한 방문기를 제가 써야겠습니다”라며 취재수첩을 꺼냈다. 서경원은 머뭇거렸다. 그는 이른바 ‘3각해법’, 김수환 추기경을 통한 정치권, 김대중 평민당 총재를 통한 정치권, 한겨레신문을 통한 언론권 등 3자가 동시적으로 서 의원의 통일열정을 담보할 때만이 사후의 충격을 최소화할 수 있다고 설득했다. 그렇게 인터뷰는 성사됐다. 서경원은 북한 방문 때 찍은 사진 21장과 일본에서 찍은 사진 8장, 북한 고려호텔 메모지 등도 주었다. 윤재걸은 점심을 먹자는 서경원의 제의를 뿌리치고 부랴부랴 회사로 돌아왔다. 편집위원장 장윤환, 편집위원장 대리 권근술, 정치부 편집위원 김명걸 등 간부진들에게 사건의 자초지종을 보고하고 곧바로 기사작성에 들어갔다. ‘현직 국회의원이 북한을 전격 방문해 정치권에 엄청난 파장이 예상된다’로 시작되는 스트레이트 기사를 포함해 파장에 따른 해설, 입북과정 스케치, 서경원 의원과의 인터뷰, 서 의원과 김일성 주석과의 인터뷰 등 모두 6꼭지였다. 윤재걸은 기사들을 김명걸을 거쳐 장윤환에게 넘겼고, 장윤환은 서경원이 농민운동가인만큼 ‘북한 농촌인상 편편기’를 연재했으면 좋겠다는 말을 덧붙였다.



   
 
  ▲ 1989년 7월10일 한겨레신문 임직원 3백여명이 편집국에서 언론자유수호결의대회를 열었다. <한겨레신문 제공>  
 
취재원 보호 차원에서 기사 보류 결정

하지만 다음날인 3월28일, 서경원 관련 기사는 한겨레에 실리지 않았다. 그리고 윤재걸은 서경원에게서 전화를 받았다. 두 사람은 양평동 한겨레 사옥 맞은편 한 식당에서 얼굴을 맞댔다. 서경원은 죽어가는 목소리로 기사 게재를 보류해달라고 했다. 가족들과도 전혀 상의를 안 했으니 신변을 좀 정리하기 위해서 한 3~4일만 참아달라고 했다. 거의 애원조였다. 윤재걸은 상부에 보고하고 사안이 사안인만큼 취재원 보호 차원에서 기사를 당분간 보류했으면 한다고 했다. 데스크와 편집위원장은 기다렸다는 듯 흔쾌히 동의했다. 기사가 출고된 지 한달이 넘어가도록 서경원은 기사보류를 거듭 요구해왔다. 윤재걸은 당시 제대로 걷지 못할 정도로 허리 통증이 심했다. 지난 1971년 서울대 내란음모사건의 배후조종자 혐의를 쓰고 심한 고문을 당한 후유증으로 군대에서 강제로 디스크 수술을 받은 이후 허리가 좋지 않았는데 그 무렵, 부쩍 견디기 어려웠다. 윤재걸은 어떻게 해서든 서경원 관련 기사를 마무리 짓고 수술에 들어갈 생각이었다. 서경원에게 수없이 독촉하면서 한편으론 장윤환과 김명걸에게 기사 게재 여부를 물었다. 5월15일 창간 일주년을 맞아서도 기사화할 가능성이 없어지자 병원에 수술스케줄을 요청, 6월2일 강남성모병원에 입원, 10일 수술을 받았다.

6월27일 안기부는 서경원을 국가보안법 위반혐의로 구속하면서 정치권과 재야단체에 대한 광범위한 수사를 진행했다. 7월2일 안기부는 윤재걸의 자택과 입원 중인 병실에 대한 압수 수색을 벌였다. 서경원의 방북 사실을 알고서도 당국에 신고하지 않았으니 국가보안법상 불고지죄(국가보안법을 위반한 사람을 알고 있으면서도 고의로 수사기관이나 정보기관에 알리지 않은 경우에 해당하는 죄)에 해당한다는 게 수사당국의 주장이었다. 윤재걸은 7월3일 새벽부터 모두 8차례에 걸쳐 11시간50분 동안 조사를 받았다. 당시 그는 12주동안 더 입원치료를 받아야 하는 중환자였다. 안기부는 3일 저녁 10시30분께 한겨레 대표이사 송건호에게 대공과장이라고 신분을 밝힌 사람을 통해 전화를 걸어왔다. 윤재걸이 서경원으로부터 제공받은 북한 유적지 등을 배경으로 찍은 사진 3~4장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마크가 찍힌 메모지 5~6장, 그리고 취재수첩 등 수사자료를 안기부쪽에 제출해달라는 요구였다. 송건호는 “취재목적으로 입수된 자료는 언론인의 윤리상 보도 이외의 목적에 사용될 수 없다”며 거부했다.

쇠망치로 철문 부수고 편집국 진입

아무리 안기부라지만 공개를 거부한 취재 자료를 구하려고 편집국을 압수 수색하지는 못할 것이라는 게 세간의 중론이었다. 하지만 안기부는 7월10일 한겨레 편집국에 대한 압수수색영장을 발부받았다. 그리고 7월12일 새벽 6시, 세계 언론사상 유례가 없는 편집국에 대한 압수수색을 시작했다. 동원된 인원은 안기부 직원 70여명, 전경 4백50명, 사복체포조 3백여명 등 모두 8백20명에 이르렀다. 백골단이라 불리던 사복체포조는 그중 가장 정예부대인 서울시경 기동대 81중대와 84중대였다. 소방차 2대와 앰뷸런스 1대, 견인차 1대도 속속 도착, 블록으로 지은 2층짜리 공장 건물에 들어있는 한겨레 편집국을 외곽에서 에워쌌다. 포위가 끝나자 안기부 요원이 편집국으로 전화를 걸어 비상대책위원장인 이종욱을 찾았다. “압수수색하러 왔다. 7시 정각에 정문에서 만나자.” 편집국에 남아있던 사원들은 긴급히 대책을 논의했다. 사원들은 ‘몸으로 막되 절대 폭력은 쓰지 않는다’는 원칙을 확인했다.

아침 7시 정각. 이종욱은 신문사 구내로 들어서는 철제문 앞에 섰다. 안기부 수사과장은 압수수색영장을 가져왔으니 협조해달라고 말했다. 이종욱은 거절했다. 이때 긴급연락을 받고 달려온 사진부 편집위원 임희순이 나타났다. 그가 안으로 들어올 수 있도록 문을 잠시 여는 순간 사복체포조들이 양평동 사옥 앞마당으로 물밀 듯이 밀려왔다. 직원들은 곧바로 편집국으로 향하는 철제문을 닫았다. 그러자 경찰이 쇠망치와 장도리로 철문을 부수기 시작했다. 철문이 열리자 이번엔 유리문이 나타났다. 경찰이 대기시킨 열쇠전문가가 만능키로 쉽게 열었다. 직원들은 스크럼을 짜고 경찰의 앞을 가로막았다. 안기부 수사과장은 “영등포서장 어디 있어? 장애물 제거해야겠어”라고 소리쳤다. “언론탄압 자행하는 안기부를 해체하라”는 구호가 울려퍼졌다. “거부한다. 거부한다. 거부한다”라는 외침이 되풀이됐다. 사복체포조들은 곧바로 틈새를 비집고 들어와 스크럼을 짜고 있던 직원들을 한사람씩 연행했다. 7시16분께, 편집국 입구 유리 여닫이문도 열렸다. 안기부 수사과장을 선두로 안기부 요원 등 1백여명이 편집국 안으로 쏟아졌다. 편집국 안에는 야근자 및 취재기자 몇 명만 남아 있었다. 안기부 수사관들은 윤재걸의 철제파일박스를 뒤져 봉투 하나에 들어있던 자료를 끄집어냈다. 봉투 안에는 서경원이 북한에서 찍은 사진 21장, 서경원이 윤재걸과 인터뷰한 뒤 쓴 것으로 보이는 자필 서명 및 날짜(1989년 3월27일 11시)가 적힌 가로 세로 10cm 크기의 흰종이 1장 등이 들어있었다. 안기부 요원이 손을 치켜들고 외쳤다. “성공했다.” 이 소리를 신호로 안기부 요원들은 편집국을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7시25분께 안기부 요원들이 모두 떠난 뒤 경찰 병력도 철수하기 시작했다.



   
 
  ▲ 1989년 7월12일, 안기부의 한겨레 사옥 압수수색이 끝난 직후, 송건호, 신홍범, 이종욱, 권근술, 임재경, 장윤환 등 신문사 간부들이 편집국 회의실에 침통한 표정으로 앉아있다. <한겨레신문 제공>  
 
공안정국 이용 한겨레 탄압


안기부가 휩쓸고 지나간 편집국은 폐허처럼 황량했다. 편집국을 쳐다보던 직원들은 망연자실, 넋 나간 꼴로 서 있었다. 누군가 어지러이 흩어진 의자 등 사무집기를 정돈하면서 직원들은 새벽의 광풍에서 깨어났다. 긴급임원회의, 비상대책회의 등이 잇따라 열렸다. 오전 9시20분 ‘언론자유 규탄대회’가 열렸다. 송건호, 언론노련 위원장 권영길, 부사장 임재경 등이 사상 초유의 압수수색을 규탄했다. 장윤환은 순서에 없던 개인성명을 읽겠다고 했다. “한겨레신문 편집국을 책임진 사람으로서 신문사의 심장인 편집국의 존엄성을 끝까지 수호하지 못하고 독재정권의 군홧발에 짓밟힌데 대하여….” 장윤환은 울먹였다. 힘차게 구호를 외치고 박수를 치던 편집국은 숙연했다. 비통한 심정으로 ‘선구자’를 합창한 뒤 임재경이 만세삼창을 제안했다. “한겨레신문 만세, 민주언론 만세, 민주주의 만세.”

그 무렵 정국은 소용돌이쳤다. 노태우 정부는 문익환 목사 방북(3월25일), 서경원 의원 밀입북 혐의 구속(6월27일), 임수경 평양 세계청년학생축전 참가(6월30일) 등이 이어지자 좌경세력 발본색원이란 명목하에 안기부와 검찰, 경찰로 구성된 공안합동수사본부(합수부)를 설치해 전면적인 수사를 진행했다. 재야와 노동계, 교육계, 대학가를 중심으로 대규모 검거열풍이 불었고 정치권에서는 제1야당이었던 김대중 총재를 소환조사하면서 정국은 꽁꽁 얼어붙었다. 노태우 정부는 한해 전인 88년 4월 13대 총선에서 패하면서 정국 주도권을 야당에게 넘겨준 상황에서 정국 반전이 필요했고, 그 카드로 공안정국을 활용했다. 정권의 눈엣가시였던 한겨레는 타깃의 중심에 있었다. 4월 방북 취재를 이유로 리영희 논설고문을 구속하고 임재경, 장윤환, 정태기 등 한겨레 간부들이 줄줄이 연행한 것은 탄압의 서곡에 불과했다.

한겨레는 편집국이 유린당한 다음날인 7월13일, 사설 ‘독재는 짧고 자유언론은 영혼하다’에서 “안기부와 경찰이 자행한 한겨레신문사 탄압은 어떤 이유로도 정당화될 수 없다. 이것은 단순히 한 신문사의 ‘봉변’이 아니다. 한국 언론 전체의 자유와 독립과 운명에 대한 도전이다. 수사기관이 온갖 구실을 내세워 신문사의 편집국이나 방송사의 보도국에 들어가 취재자료나 기록을 내라고 요구하는 것이 ‘관행’으로 굳어지면 자유언론이 설 자리는 없다”고 썼다.

김성후 기자 kshoo@journalist.or.kr




<참고자료>

‘희망으로 가는 길-한겨레 20년의 역사’ (한겨레신문사)

한겨레 1989년 7월13일 ‘언론심장 짓밟은 7·12 작전 80분/안기부원 사진 들고 “성공했다” 등

기자협회보 1989년 7월14일 ‘한겨레 난입은 언론탄압 만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