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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년 늦여름, 남산에서 보낸 58시간은 김충식 기자의 운명을 바꾸었다. 그 다음해인 86년 그에게 프레스카드가 발급되지 않았다. 당시는 정부가 발행하는 프레스카드를 소지해야만 정부 부처를 출입할 수 있었던 시기. 동료기자들은 ‘너는 정부로부터 찍힌 놈이다. 해고대상 1순위다’라고 농담으로 말했지만 웃을 수만은 없었다.
심리적 압박이 컸던 시기, 고인이 된 이상하 정치부장은 대학원 진학을 권유했다. “회사를 떠나 먹고 살기 어려우면 학보사 주간이나 해서 먹고 살아야 하지 않겠느냐. 야간에 대학원이나 다녀라.” 중앙대 신문방송대학원에 다니며 석사학위를 받았다. 대학원 진학은 그가 대학에 관심을 갖는 계기가 됐고, 현재 가천대에서 초빙교수를 하는 자산이 됐다.
남산의 경험은 한편으로 그의 베스트셀러 ‘남산의 부장들’을 쓴 백그라운드가 됐다. 그는 3공화국 실세였던 중앙정보부장들을 소재로 한 ‘남산의 부장들’을 89년부터 2년 2개월간 동아일보에 연재했다. 이 연재물은 ‘남산의 부장들’이라는 세권의 단행본으로 나왔다. “남산의 고문을 생각하며 기획안을 냈다. 김중배 편집국장이 선뜻 수용하더라. 그렇게 연재가 시작됐다”고 말했다.
85년 8월 30일 안기부에 연행된 것과 관련해 그는 “전두환 권위주의 정권이 마지막 발악을 한 것”이라고 말했다. “정부발표 이전에 기사화했다는 것은 구실이고 사실은 동아 보도에 대한 누적된 불만에 대한 보복이자 다른 기자들에 대한 본보기였죠.”
그는 기사에 대한 소스를 추궁하며 가한 모진 고문을 견뎌냈다. ‘죽을 때까지 부채를 지고 사느니 차라리 고생하자’고 속으로 다짐했다. 심문은 잔인했다. 끌려올 때 신고 온 구두를 입에 물게 하고 떨어뜨리면 팬다고 협박했다. “개와 다름이 없었어요. 패고, 심문하고, 패고, 심문하고…. 빨리 나가고 싶다는 생각밖에 안들더군요.”
남산에서 풀려난 후 고 김상만 회장에게서 받은 격려전화 한 통을 잊을 수가 없다. “풀려난 당일이었어요. 김 회장한테서 전화가 왔어요. 당시 전화는 모두 도청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이렇게 말씀하시더군요. ‘나쁜 놈들이야, 나쁜 놈들이야. 고생했네. 푹 쉬게, 걱정 말고 푹 쉬어’.”
그는 당시는 지금 잣대로 설명할 수 없는 시대였다고 말했다. “말이 그렇지 편집국장, 정치부장, 정치부 기자 세 사람을 데려다 두들겨 패고 심문하고…. 그야말로 몰상식한 광기의 시대에 미친개에게 물린 것이었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