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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정권 때부터 기자실 논란

역대 정권 언론통제 사건②

장우성 기자  2007.09.05 14:3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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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자협회는 1975년 3월13일 전국시도지부 확대회의를 개최, 정부의 언론탄압에 대한 대책을 수립하고 국민·정부·언론사주에 보내는 메시지를 채택했다. 사진은 회의후 신문회관 앞에서 ‘자유언론 만세’를 외치는 회원들.  
 
프레스카드제·언론통폐합·보도지침 등 ‘언론통제’ 교과서


장기집권을 꾀한 박정희 정권 시절 국가비상사태, 긴급조치 등이 발표될 때마다 언론을 통제하려는 시도는 계속됐다. 프레스카드제 실시는 물론 기자실 축소, 언론통폐합, 보도지침 등 이후 5공 정권이 펼친 ‘언론탄압’의 밑그림이 제시된 시기이기도 하다. 이 시리즈는 분량이 넘치는 관계로 애초 계획이었던 2회에서 1회를 늘려 다음호까지 연재한다.

박정희 대통령은 1971년 제7대 대통령선거에서 신민당 김대중 후보를 누르고 당선됐다. 그러나 정국은 혼란스러웠다. 대학가는 선거무효, 박정희 정권 규탄 투쟁으로 시끄러웠다. 박 대통령은 10.15 위수령과 12.6 국가비상사태 선언으로 맞섰다.

언론 통제도 한 단계 높아졌다. 정부는 국가비상사태를 선언한지 사흘 만에 사이비 기자 정화를 명분으로 언론사 및 단체에 ‘프레스카드제 실시’ 방침을 사실상 확정·통보했다. 한국신문협회는 12월17일 ‘언론자율에 관한 결정사항’을 발표했다. 자율적으로 실시한다는 모양새를 갖추기 위해서였다. 여기에는 프레스카드제 실시, 지방주재기자 대폭 감축 등의 내용이 포함됐다.

문공부가 당시 신문협회 등에 보낸 문서에 따르면 이 제도는 “신문·통신 등의 발행인과 방송국장이 취재 보도활동에 적합하다고 인정하는 자로 문공부에 기자명단을 송부하면 문공부가 프레스카드를 교부하고 연2회 각 기관에 통보한다”는 것을 뼈대로 하고 있다. 지방주재 기자는 중앙일간지의 경우 각 도, 시청소재지에 총 45명으로 제한했다.

프레스카드 실시 결과 전체 기자 수는 6천3백32명에서 4천2백69명으로 줄어들었다. 모두 일방적으로 해고됐다.

뒤이어 1972년에는 ‘1도 1사’ 원칙에 따라 11개 지방신문을 없애는 언론통폐합이 이뤄졌고, 각 부처의 출입기자실과 기자의 수를 대폭 제한하는 내용의 ‘정부출입기자대책’이 발표됐다. 각 행정부처의 기자실은 1부에 1개로, 출입기자도 1부에 1개사 1명으로 축소했다. 종전 47개였던 기자실은 18개가 됐다. 출입기자 수도 7백90명에서 4백65명으로 줄어들었다. 예산의 남용을 막는다는 게 기자실을 축소한 대의명분이었다.

당시 유신체제라는 살벌한 정치 상황에서 기자들은 적극적으로 저항하지 못했다. 오히려 각 언론사들은 ‘경영합리화’를 이유로 감원 등 구조조정에 박차를 가했다.

박정희 정권은 프레스카드제 실시와 언론통폐합, 기자실 축소 등으로 언론을 제압하고, 10월에는 유신헌법을 공포하기에 이른다. 유신체제에서 제정된 방송법으로 방송윤리위원회를 설치했다. 방송사가 방송윤리위의 시정 통보를 7일 내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문공부 장관이 재허가 보류를 요구할 수 있도록 했다. 1973년에는 정부 직제를 개편해 각 부처 대변인제를 실시, 언론인 출신 13명을 대변인으로 기용했다. 이는 취재의 편의보다는 창구 단일화를 노린 것이었다. 문공부 장관이 각 언론사 보도편집국장을 불러 학생 시위나 베트남 파병 등을 축소 보도하라고 요청하는 등 간섭도 심해졌다. 문화공보부는 1976년 각 방송사에 ‘시간대별 편성지침’을 내려 보냈다.

기자실 논란은 박 정권 말기까지 계속됐다. 동아·조선 기자 등의 자유언론실천운동이 파문을 일으켰던 1975년 5월 정부는 긴급조치 9호를 발동했다. 언론에도 고삐를 당겼다. 프레스카드의 유효기간을 1년으로 줄이고 보도지침을 강화하는 한편 정부 기관 기자실을 축소·폐지하기 시작했다. 같은 달 문공부는 중앙관서 출입기자 1백5명, 기사실 6개를 줄였다. 내무부는 서울시경과 경기도 경찰국을 뺀 서울 시내 일선경찰서와 전국 9개도 경찰서 기자실을 폐쇄했다. 시경 출입기자도 각 사에서 2명만 두도록 했다. 정부는 “경찰서 기자실이 부조리의 온상이 되고 있다”며 축소를 강행했다.

기자협회와 편집인협회, 당시 야당인 신민당은 정부의 조처에 반대하는 성명을 발표하고 ‘기자실 부활’ 운동을 벌였다. 당시 기자협회는 성명에서 “기자실 존속으로 인한 작은 부조리를 제거한다 하여 더 큰 부조리를 감시하고 고발하는 기자실을 폐쇄한다는 것은 본말이 전도된 조치라고 하지않을 수 없다”고 반대했다.

경찰서 기자실은 1979년 이르러 대부분 부활하게 된다. 기자협회 등 언론단체들이 꾸준히 부활운동을 벌였다. 국제기자연맹(IFJ) 등 국제단체들까지 기자실 문제에 관심을 나타냈다. 정부는 서서히 일선 경찰서 기자실을 다시 허용했다. 당시 기자실 부활운동을 주도했던 기자협회 박기병 고문은 “박 정권은 ‘부조리 근절’을 내세워 경찰서 기자실을 없애려 했지만 사실은 경찰의 인권침해가 심각하던 시절, 언론의 보도에 부담을 느꼈던 것”이라고 술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