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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관이 신문발행 취소권한 '언론윤리위법' 제정

역대 정권 언론통제 사건①

장우성 기자  2007.08.29 14:4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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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법’철폐 투쟁…19개 언론사 기자들 중심 ‘한국기자협회’ 결성



   
 
  ▲ 1964년 '언론윤리위법 파동'은 기자들의 거센 투쟁을 불렀다. 이는 한국기자협회 결성으로 이어졌다. 사진은 1964년 발행된 기자협회보 창간호의 1면.  
 
최근 언론계와 정부 사이에 ‘취재제한’ 논란이 한창이다. 일부 언론은 ‘5공식 통제’라며 반발하고 있다. 역대 정권은 목적과 정도·수단의 차이는 있으나 항상 언론을 자기 편의대로 통제하려는 욕망을 가져왔다. 본보는 2회에 걸쳐 이승만 정권부터 김대중 정권까지 논란이 됐던 대표적인 언론 통제 사건을 살펴보고, 현 정권이 추진하려는 ‘선진화 방안’과 어떤 점이 비슷하고 다른지 알아본다.

이승만 정권의 경향신문 폐간
“신문에는 간혹 사실 아닌 말 안되는 말이 있다.”
“(동아일보와 경향신문은) 있는 말 없는 말을 하여 민심을 소란 이산케하였으며 정부를 때리기만 하는 신문이다. 그런 신문은 앞으로 귀찮게 굴어서 단속해야겠다.”

이승만 대통령이 1956년 6월과 9월 가진 기자회견에서 한 말이다. 자유당 정권의 언론관을 단적으로 보여줬다. 자유당 정권은 ‘출판물에 대한 임시조치법’ ‘국정 보호 임시조치법’ 등을 제정하면서 비판적인 언론을 제압했다. 1958년에는 국가보안법을 개정해 통과시켰는데 ‘적을 이롭게 할 목적으로 관공서, 정당, 단체 또는 개인에 관한 정보를 수집하는 자’를 처벌하도록 했다. 반 정부 성향 언론의 취재 활동에도 적용될 소지가 컸다.

자유당 정권은 급기야 1959년 4월30일 경향신문을 폐간했다. 경향신문 객원 논설위원이었던 주요한의 ‘여적’ 칼럼이 불씨가 된 이 사건으로 반공지이면서 가톨릭계 신문이었던 경향신문을 “공산당의 흉계를 분쇄한다”는 명분 아래 문을 닫게 됐다. 경향은 당시 친(親)민주당 성향의 논조로 이승만 정권에 비판적인 입장을 보였다. 6월 서울고법이 경향 폐간 조치가 부당하다며 경향신문의 손을 들어주자 정부는 발행취소를 철회하는 대신 발행무기정지 처분을 내렸다. 경향은 4·19 혁명이 일어나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한 뒤 4월26일에야 복간됐다.

1956년 3월19일 국제신문인협회(IPI)가 ‘한국은 언론자유가 없으므로 초청대상에서 제외했다’고 발표한 성명을 보면 당시 언론의 현실을 알 수 있다.

박정희 정권의 ‘언론윤리위법’ 파동
“국론을 통일하기 위해 무책임한 언론의 자숙이 요청된다.”
“과거 많은 신문들이 금전에 좌우되고 부패했으며 공산주의 색채를 띄었다.”

“우리나라 신문은 선의건 악의건 너무나 많이 자극적, 선동적인 언사를 써 왔다.”
박정희 대통령의 언론관 역시 부정적이었다. 그는 각종 기고와 연설에서 언론에 대한 불편한 감정을 숨기지 않았다.

1960년 4·19혁명으로 들어선 허정 과도 내각은 국가보안법, 선거법 등 언론 활동을 제한했던 제반 법률을 개정했다. 미군정이 좌익계 신문을 견제하기 위해 만들었던 미군정 법령 제88호를 폐지했다. 신문 발행도 허가제에서 등록제로 바꿨다. 장면 정권은 민족일보가 계속 비판적인 기사를 내보내자 당시 관영지였던 서울신문에서 인쇄를 하지 못하도록 조처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승만 정권 시절 비판의 표적이었던 공보실을 폐지하고 국무원사무처에 통합시키는 등 ‘언론 불간섭 정책’을 펴 언론은 사상 유래없는 자유를 누리게 됐다. 한편 수준 미달의 언론사가 급증하면서 기사를 미끼로 금품을 갈취하는 사이비 기자들이 극성을 부렸다.

5·16 쿠데타로 집권한 군부세력이 들어서자마자 언론에 칼을 빼든 것도 이런 명분 아래에서였다. 국가재건최고회의는 혁신계 신문인 민족일보를 폐간시키고 조용수 사장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북한 간첩의 공작금으로 신문을 창간하고 친북활동을 했다는 혐의였다. 사이비기자를 단속한다는 명분으로 언론인 정화에 나서 9백60명의 언론인을 구속하거나 재판에 넘겼다. 포고 제11호를 내고 76개 중앙일간지 등의 등록을 취소했다. 장면 정권이 폐지했던 공보실은 공보부로 승격시켜 강화했다.

명예훼손 기사를 실은 신문은 등록을 취소할 수 있다는 내용 등을 담은 ‘신문 등 등록법안’의 제정도 추진됐다. 언론계는 이 법이 언론통제에 악용될 것을 우려해 한발 앞서 1961년 9월 ‘한국신문윤리위원회’를 발족했다. 정부에게 통제를 받기보다 언론 자율적으로 규제하겠다는 뜻이었다.

그러나 군사정권은 언론 통제를 제도화하려는 노력을 멈추지 않았다. 비상계엄을 해제한 뒤에도 언론을 계속 관리하기 위해 1964년 제정하려던 ‘언론윤리위원회법’(이하 언윤법)이 그것이다. 박정희 대통령은 한일회담반대시위 등으로 정국이 혼란스러워지자 이를 언론의 선동 탓이라고 여겼다. 정부가 기사를 심의해 윤리에 어긋난다고 판단될 경우 문공부장관이 신문의 발행을 정지 또는 취소할 수 있도록 한 법률이다. 이 법은 그해 8월 국회에서 통과됐다.

언론계는 이를 ‘악법’으로 규정하고 편집인협회 등을 중심으로 ‘언론윤리법철폐투쟁위원회’를 결성했다. 기자들은 항의 표시로 박정희 대통령의 8·15 경축 기념사 보도를 거부했다. 국회, 중앙청 출입기자들은 24시간 취재거부를 벌였다. 이런 목소리가 모여 8월17일, 19개 언론사 기자들을 중심으로 한국기자협회가 창립되기에 이른다.

여론이 악화되자 군사정권은 언론사별로 회유에 나서 발행인협회 26개 회원사 중 동아일보, 조선일보, 경향신문, 대구매일신문 4개사를 제외한 나머지 신문사들은 언윤법에 사실상 동의했다. 이에 기협과 편협, 일선 기자들은 발행인들의 결정을 강력히 비판하며 철폐운동을 계속하겠다고 밝혔고, IPI 헌 엘리어스 회장이 박정희 대통령에게 언윤법 철폐를 촉구하는 전문을 전달하기도 했다. 기자들이 9월10일 대대적인 국민대회 개최를 준비하는 동안 정부와 언론계 고위층 간에는 타협이 진행됐다. 잘 알려진 ‘유성 회담’ 이후 박정희 대통령은 9일 “언론계의 자율 규제 의지를 믿고 언윤법 시행을 보류한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학계에서는 이 타협을 “언론계가 사실상 굴복한 것”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장우성 기자 jean@journalist.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