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년 10월 한국일보 기자 87명 첫 노조 결성

이듬해 30여개 언론사로 확대
기자협회, 80년 신군부에 의해 집행부 와해
재건 이후 정권통제…6월 항쟁 참여 미미
6월 항쟁 20주년을 맞아 재조명 작업이 한창이다. 1980년대는 신군부의 집권 이후 언론통폐합 등 언론에 대한 탄압과 통제가 극에 달했다. 대부분의 언론은 군부정권에 협력하면서 ‘정권의 나팔수’라는 비아냥을 듣기도 했다. 한마디로 언론의 자유가 최악의 지경이었던 시절이다. 이에 본지는 당시 기자협회와 언론계의 움직임을 간추려 본다.
박종철군 고문치사 사건은 6월항쟁의 불씨가 됐다. 이는 한 기자의 기지에 의해 세상에 밝혀졌다. 1987년 중앙일보의 한 기자는 한 검찰 간부가 “경찰, 큰일 났어”라고 무심코 내뱉은 한마디에서 사건의 단서를 잡아냈다. 1월14일 중앙일보는 ‘경찰에서 조사받던 대학생 쇼크사’라는 기사를 내보냈다. 이어 동아일보는 당시 부검의 의사 오연상씨의 진술을 통해 고문에 의한 사망 가능성을 처음으로 제기했다. 중앙의 신성호(현 논설위원), 동아의 김차웅, 황호택(현 논설위원), 임채청 기자(현 편집국장)는 이 사건 보도로 한국기자상을 받았다.
전두환 정권의 4·13 호헌 조치 이후 정국이 차차 가열될 무렵 서울신문 기자들의 이진의 사장 퇴진운동이 벌어졌다.
서울신문 편집국 기자 70여명은 5월18일 이진의 사장이 편집과정에 독단적인 간섭과 전횡을 저지르고 있다며 퇴진을 요구했다. 이진의 사장은 신군부 집권 이후 MBC 사장, 문화공보부 장관을 거친 5공화국 언론계의 실세 중 실세였다. 이 사장은 6월11일 결국 자리에서 물러났다.
기자들의 시국선언도 잇따랐다. 1987년 5월25일 동아일보 기자 1백32명은 편집국에서 ‘민주화를 위한 우리의 주장’을 발표했다. 동아 기자들은 “개헌논의의 조속한 재개와 진정한 민주화조치가 이뤄져야 한다”며 △4·13 호헌 철회 △자유언론 회복 △‘말’ 지 관련자의 즉각 석방을 요구하는 결의문을 채택했다.
한국일보 기자 1백50명은 29일 편집국에서 ‘현 언론에 대한 우리의 견해’를 발표하고 “오늘의 언론현실은 정치권력에 의해서 뿐 아니라 패배주의적 사고·무력갈등 언론인 스스로의 자세에도 책임이 있음을 자성한다”고 밝혔다.
부산일보 기자들은 6월5일, 코리아타임스 기자들은 8일, 대구매일신문 기자들은 12일, 경향신문 기자들은 18일, 부산MBC 기자들은 22일 잇따라 시국선언을 발표했다. 이들은 계속해서 헌법 개정과 보도지침 철회, 기관원들의 언론사 출입금지 등을 주장했다.
6·29선언으로 잠시 뜸했던 시국선언은 7월16일 KBS 기자협회 분회가 결의문을 채택하면서 다시 불붙었다. 기자들은 공정보도, 편집권독립 등을 제기하기 시작했다. 기자협회도 성명을 발표해 △언론기본법 및 프레스카드제 폐지 △주재기자 부활 △새 헌법에 편집권 독립 명시 △해직기자 복직 등을 요구했다.
이후 각 언론사 기협 분회 및 기자들의 모임들이 재조직됐다. 7월21일 중앙일보 기자들이 언론자유 실천을 위한 운영위원회를 구성한 것을 신호로 부산일보, 광주일보, 코리아헤럴드, 경향신문, 연합뉴스(당시 연합통신) 기자들이 조직을 재건했다.
기협의 강령도 원상복귀됐다. 81년 전두환 정권이 강제로 바꾼 기협 강령 두 번째 조항인 “우리는 언론창달과 윤리제고에 앞장선다”를 “우리는 언론자유를 침해하는 여하한 압제에도 뭉쳐 싸운다”로 회복시켰다. 11월에는 1980년 이후 언론을 무력화시켰던 언론기본법이 철폐됐다.
한편 1987년은 언론 노동조합 운동의 원년으로도 기록된다. 6월 항쟁 이후 민주화 바람을 타고 한국일보 기자 87명이 10월29일 처음으로 노조를 결성했다. 11월18일에는 동아일보, 12월1일 중앙일보, 12월9일 MBC, 12월14일 코리아헤럴드 노조가 결성됐다. 이듬해에는 30여개 언론사에 노조가 들어섰고 11월 언론노동조합연맹이 탄생해 권영길 기자(현 민주노동당 원내대표)가 초대 위원장을 맡았다.
그러나 1980년 신군부에 의해 김태홍 회장 등 집행부가 구속돼 와해됐던 기자협회는 81년 재건 이후에는 정권의 통제 등 내외적 여건으로 후생복지 부문에 주력했다. 이에 따라 6월항쟁 당시 별다른 참여를 하지 못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장우성 기자 jean@journalist.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