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핵 실험이후 청와대 관계자통해 이호철 실장에게 ‘문건’전달
"권오흥씨와는 12년전에 알게된 사이로 몇안되는 대북전문가"
북측 “측근,특사-6자 회담·쌀,비료 지원 약속-정상회담 의지 확인” 밝혀
주간동아가 4월3일자 커버스토리에서 노무현 정부가 비선 프로젝트를 통해 남북간 특사 교환 및 정상회담을 추진했다는 내용의 비망록을 보도했다. 대북전문가로 알려진 권오홍씨가 작성한 이 비망록은 즉각 일간지들의 추가보도로 이어졌지만 이해당사자간 주장이 첨예하게 엇갈렸다.
이 과정에 시사저널 남문희 한반도전문기자가 ‘문건’을 작성해 청와대에 전달했다는 새로운 사실이 드러났다. 남 기자는 일부 언론에서 ‘문건’의 작성 경위와 공개된 팩트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간략하게 밝혔다. 그러나 기자 신분으로 이런 문건을 작성했다는 것에 대해서도 논란이 일었다. 이에 본보는 30일 남 기자를 만나 이번 사건에 대한 진위를 들었다. 다음은 일문일답.
-보고서를 작성한 경위는 무엇인가.
먼저, 보고서가 아니라는 것을 지적하고 싶다. 나는 기자이기에 앞서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정부에 하나의 정책제언을 한 것이다. 일간지들이 보도했듯이 전달 과정에 말보다는 글의 형태를 바라는 사람(청와대 관계자)이 있어 글로써 작성하게 됐다.
-정책제언이라는 ‘문건’을 어떻게 작성하게 된 것인가.
지난해 9월20일 베이징에 머물고 있던 대북 전문가 권오홍(비선라인의 첫 기획자·코트라 출신 경제인)씨로부터 한 통의 이메일을 받았다. 다급하게 작성된 이메일에는 “북측이 남측과 만나고 싶어하며 현 정권의 최 측근인 안희정 씨를 통해 (비공식라인으로) 노 대통령의 입장을 확인하고 싶다”는 내용이 담겨있었다. 자신은 베이징에 있어 연락망이 마땅치 않으니 대신 전해주길 바란다는 의미였다.
첨언을 하자면, 당시 남북관계는 작년 7월5일 미사일 발사이후 급박하게 변화하고 있었다. 권씨는 20일 이전 나를 만난 자리에서 “현재 상황이 어떤지 알고 싶다. 조만간 베이징에 들어갈 계획”이라고 말했다.
이런 이유로 베이징에 간 권씨는 도착하자마자 리호남 참사(대남 경협 전문가)를 우연찮게 만나게 됐다. 권씨에 따르면 그는 리호남 참사를 약 10년간 지켜봐왔고 잘알고 있었다. 리참사로부터 북의 의중을 전달받은 권씨가 내게 메일을 보냈던 것이고 나는 안희정 씨에게 전달키로 했다.
그러나 내가 안희정 씨와 아는 사이가 아니었기 때문에 안씨와 평소 친분이 있는 것으로 알려진 전 국가안전보장회의(NSC) 행정관인 K씨에 내용 전달을 부탁했다.
K씨는 이런 내용을 안씨에게 전달했으나 그는 “사면복권된지 얼마되지 않았고 움직이면 노출될 수밖에 없어 부담스럽다. K씨가 북의 의중을 대신 알아봐 달라”고 답을 해왔다.
K씨가 권씨를 아는 상황도 아니었기 때문에 할수없이 내가 ‘소개차원’으로 9월25일 K씨와 함께 베이징에 가게됐다.
그 자리에는 권오홍씨와 리호남 참사가 있었다. 이날 리 참사 발언의 요지는“(남북 수뇌부) 측근간에 얘기가 진척되고 2005년 6월 정동영 당시 통일부 장관이 평양을 방문했듯 남측에서 특사를 보내면 자연스럽게 북측이 6자 회담에 복귀할 수 있지 않겠냐”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 북측은 6자 회담에 복귀하고 싶고 이를 남한과 협의할 의사가 있다는 의미였다.
이와 함께 거론된 것이 북측의 쌀, 비료 지원 문제였다. 이 부분은 언론 보도에서는 와전된 부분이 있는데 리 참사는 미사일 발사 당시 이종석 전 통일부 장관이 쌀, 비료 지원을 중단하면서 “북이 6자 회담에 복귀하면 재개할 수 있다”는 말을 했다는 것을 상기시키며 “앞으로 6자회담에 복귀할 것이니 지원을 재개한다는 약속을 해줄수 있지 않느냐, 이 부분도 약속해 달라”고 했다.
그는 6자 회담이 가능하면 당연히 정상회담 논의도 진행할 수 있다는 뜻도 전달했다. 리 참사는 북측에서는 노무현 대통령의 임기도 얼마 남지 않았으니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만나고 싶어한다는 말을 덧붙이기도 했다.
K씨는 서울로 돌아와 이같은 내용을 안희정씨한테 전달했다. 안씨는 계속 묵묵부답이었고 베이징에서 기다리던 리호남 참사도 기다리다 북측으로 돌아갔다. 시간은 계속 흐르고 일은 진행되고 있었다.
10월2일 오후 안씨가 K씨에게 입장을 전달했다. 공식라인(통일부-통일선전부 체제, 일명 통-통 체제)이 움직이고 있으니 이 라인이 깨지면 모를까 지금 움직이는 것은 부담스럽다는 것이었다. 거절이었다.
K씨에 따르면 안씨는 당시 내용들을 대통령에게 다 보고하지는 않았고 다만 공식라인이 깨지면 역할을 할 수도 있겠다고만 했다고 한다.
같은 날 오후6시 K씨를 통해 베이징에 있는 권씨에게 안씨의 답이 전해졌다. 북측은 매우 놀라며 “이럴 수 있느냐”고 했다. 사실상 판은 완전히 깨졌고 없던 얘기가 된 것이다.
※남문희 기자는 여기까지 밝힌 뒤, 다음 내용을 말하기 앞서 북측이 이같은 제안을 하게 된 배경을 언급했다. 그의 발언을 정리해 덧붙인다.
북한도 7월5일 미사일을 발사하면서 불안감이 있었다. 그쪽도 사람 사는 곳인데 왜 불안감이 없었겠는가. 북측은 어쩔 수 없이 미사일 발사까지 했지만 속 마음은 외교협상 테이블로 돌아올 구실을 찾고 있었던 것 같다. 8월말, 9월초쯤이다.
먼저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중국을 통해 이를 해소하고자 했다. 김 위원장이 두 차례 중국 방문을 시도했으나 두 차례 모두 중도에 포기했다. 작년 초 이후 복잡하게 꼬인 북-중 관계가 원인이었다.
이에 김 위원장은 9월14일 신의주까지 갔다가 평양으로 복귀하면서 새로운 대안을 모색했다. 이때 남측과의 관계를 통해서 6자회담에 복귀하는 방법을 모색하고자 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당시 남북간의 공식 채널인 장관급 회담 채널은 기능이 마비된 상태였다. 따라서 새로운 라인인 수뇌부간 측근 라인을 통한 대화가 수면 위로 떠오른 것이다.
북측은 안희정씨의 답변을 듣고 완전히 절망했다. 중국, 남한 어느 쪽으로도 출구가 없게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북측의 절망감은 다음날 북한의 핵실험 선언으로 표출됐다.
청와대뿐 아니라 정부도 당황했지만 상황에 대한 수습책을 내놓지 못한 채 북한이 10월9일 핵실험을 강행하는 상황에 도달했다. 그때 이미 난 모든 상황이 종료됐다고 보았다. 답답했다. 분명히 방법이 있었는데, 어떻게 이렇게 결말이 날 수 있나. 이런 생각으로 머릿속이 복잡했다. 북한이 2, 3차 핵실험 강행할지도 모른다는 얘기로 한반도 주변은 위기감이 계속 고조되고 있었다. 매우 유동적인 급박한 상황이었다.
북한이 핵실험을 강행한 10월9일 청와대 쪽 한 인사를 우연히 만나 식사를 하게 됐다. 답답한 심경과 함께 그동안 전개된 내용을 푸념 비슷하게 털어놓았다. “정부의 위기관리 능력이 취약한 것 아닌가. 현 상황이 너무 위태로운 것 같다”는 게 요지였다.
이 청와대 관계자는 “내가 이 내용을 보고하고 싶지만 비전문가이기 때문에 정리할 자신이 없다. 그 내용을 하나만 문건으로 정리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래서 나는 언론에서 보도한 일명 ‘보고서’라는, ‘북핵문제 해결을 위한 정책제언’이라는 제목의 문건을 그 다음날 정리해주었다. 어떻게 사용될지는 알 수 없었다. 며칠 후 관계자로부터 이호철 대통령 국정상황실장이 만나고 싶다는 얘기를 전해 들었다.
-베이징에서 안씨와 리참사가 협상을 하게 됐다. 이 때에도 역할을 했나.
이호철 대통령 국정상황실장과 10월17일 만났다. 그는 어떻게 된 것인지 설명해 달라고 했다. 다 전해들은 이실장은 “일단 시간을 좀 달라”고 했다.
이실장을 통해 나중에 확인한 사실이지만 안희정씨가 10월2일 북측에 ‘거부’의 뜻을 전한 뒤, 다음날 바로 북측이 핵실험 선언하면서 안씨는 매우 당황했다고 한다. 그는 급한 마음에 K씨에게 연락을 취했으나 연락이 되지 않았다. 당시 K씨는 핸드폰을 잊어버려 연락이 되지 않았던 것이었고 그렇게 며칠이 지나가 버렸던 것이다. 나도 사실은 K씨에게 몇 차례 연락을 취했으나 전혀 연락이 되지 않은 상황이었다.
이 실장은 이날 저녁 “보안문제도 있으니 다시 안이 하는 게 낫겠다. 안은 내가 설득해보겠다”고 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안희정씨가 처음에 거절했기 때문에 그가 재등장하리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렇게해서 안희정씨가 재등장했다.
안씨는 10월20일 베이징을 방문하면서 외교통일위 당시 방북경험이 있는 열린우리당 이화영 의원과 동행했다.
-10.20 베이징 남북접촉이 성과 없이 끝난 것은 무엇 때문인가.
나중에 권씨로부터 전해들은 내용을 토대로 보면 안희정씨가 자신의 역할을 ‘끊어진 다리, 즉 공식라인을 잇는 것’으로 파악했다는 데 문제가 있었다. 리호남씨는 기존의 공식라인이 아닌 대통령의 의중을 전하는 새로운 라인 구축을 생각했던 것인데 이런 역할을 부담스러워 한 안씨가 줄곧 “왜 비선으로 하는가. 공식라인으로 하자”고 주장했던 것이다.
리씨는 안씨의 말을 듣고 “그런 방식이면 알았다. 서신을 써달라. 민화협 등에 전달하겠다”고 말하고 자리를 박차고 일어서 버렸다.
-안씨 이후 이 의원이 ‘주연(주간동아 식 표현)’으로 등장하게 된 연유는.
북측의 재 제의로 11월11일 베이징에서 다시 ‘확정회담’을 가지기로 했다. 확정회담이라는 것은 특사 교환을 확정하기 위한 회담이라는 의미다.
그런데 엉뚱한 데서 사건이 터졌다. 11월9일 오마이뉴스 기사(노 대통령, 정상회담 대북특사 파견, 북한 6자회담 복귀, 사전통보받았다)가 터진 것이다. 북측은 11월11일 베이징 면담을 나갈 수 없다, 신변 위협 등을 이유로 취소를 통보했다. 대신 안희정씨가 직접 평양에 오라는 새 제안을 했다. 남측의 프로답지 못한 모습에 어깃장을 놓은 것이다.
안희정씨는 “베이징에서 만나는 것도 힘든 상황인데”라며 펄쩍 뛰었다. 그 후 남북간 여러차례 옥신각신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결국 안희정씨가 빠지고 대신 이화영 의원이 가는 것으로 정리됐다. 이 때부터 한발 물러선 안희정씨가 아닌 ‘이화영 창구’가 등장하게 됐다.
-권씨가 언론을 통해 비망록을 공개한 이유는 무엇인가.
그는 이번 일을 추진하면서 북측에 내용상으로는 경제와 인도주의를 내용으로 하는 정상회담이 추진돼야 한다고 밝혔다. 또한 2007년 대선이 있는 해이기 때문에 정치권의 오용소지를 방지하기 위해 4월 이전 성사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1997년 ‘북풍’ 사건 등을 상기하며 남한의 정치적 휘말림을 곤혹스러워했던 북측도 이에 동의했다.
그러나 작년 12월16일 권씨와 이화영의원이 평양을 방문한 이후부터 처음 기획의도와 다른 방향으로 가기 시작했고 이화영 의원과 권씨간에도 연락이 안되는 상황이 한달째 계속됐다. 그러던 중 3월6일 이해찬 전 총리와 이화영 의원이 방북한다는 사실이 언론에 일제히 보도됐다.
이화영 의원이 평양을 다녀온 이후에야 권씨와 연락이 두절된 사이 이 의원이 다른 루트, 아태평화위를 통해 별도로 일을 추진해오고 있었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애초 아이디어를 제공했던 권씨를 완벽하게 따돌린 셈이다.
어쨌든 이 때부터 권씨는 “결국 이번 건도 정치권 논리대로 돌아갔구나”라고 생각하며 자괴감에 빠졌다. 권씨는 나에게 “더 이상 묵과할 수 없다. 그간의 일들을 공개하겠다”고 했다. 나는 한 달 이상 “다 죽자는 거냐. 안된다”며 권씨를 막았다.
그렇지만 권씨는 단호했다. 한국사회가 남북문제를 어떻게 풀어가야 하는지 ‘담론’을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계속 기존처럼 정치논리대로 남북문제가 끌려 가서는 안된다는 게 그의 지론이었다. 인간적인 배신감도 있었을 것이다.
-주간동아에는 비망록이 A4 5백쪽 분량이라고 돼 있다. 이번에 전 내용을 다 공개한 게 아니라는 얘긴데. 추가 공개가 있는 것인가.
나는 비망록 공개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이다. 그러나 권씨는 간추려서라도 공개하겠다는 입장인 것 같다.
-조선일보에서 권씨와 남 기자에 대해 ‘검증 안된 인물 소개로 접촉’이라고 했다. 어떻게 생각하는가.
권씨는 언론에 보도된 대로 코트라 출신의 대북 전문가다. 취재원과 기자의 관계로 12년 전 처음 만났는데 내가 아는 몇 안 되는 대북 전문가다.
권씨는 그동안 남북문제 해결을 위해서 두 가지를 강조했다. 첫째는 이산가족 문제의 본질적인 해법을 찾는 것이며 둘째는 100대 경협 프로젝트를 통한 남북간 상생 협력 관계의 구축이다.
권씨는 이산가족상봉이 매년 몇 백 명씩 오고가는 정치적 쇼로 비춰지는 것을 매우 안타까워했다. 또 북측의 경제여건 해결도 단순히 쌀, 비료를 지원하는 게 아니라 먹고사는 문제를 원천적으로 해결해주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래서 그가 만들어낸 것이 ‘100대 프로젝트’다. 코트라 시절 연구한 100대 프로젝트는 각 단계별로 적정한 기술과 산업을 순차적으로 북한에 적용해 가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처럼 권씨는 북한 문제를 남한이 주도적으로 이끌고 가야 한다는 것과 함께 경제, 인도주의를 바탕으로 하는 남북정상회담을 갖자는 복안을 가지고 있었다.
나에 대해서는 뭐라 말하기 힘들다. 그러나 이 문제(한반도)만 18년 동안 천착해왔다는 점을 밝히고 싶다. 현장에 최대한 접근해서 파악하려 했다. 권씨를 주목한 이유도 그가 가장 현장에 접근해 있는 인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기자가 이런 ‘문건’을 작성하고 개입했다는 것에 대해서 부정적인 시각이 있다.
앞서 말했지만 나는 기자를 떠나 대한민국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안타까웠던 점, 급박한 상황 속에서 답답했던 마음을 청와대 관계자를 만나 토로했던 것이다.
그가 서면으로 전달해주길 바랬기 때문에 문건이 작성된 것일 뿐 언론에서 표현하는 것처럼 보고서를 쓴 것도 아니고 ‘중개인’의 역할을 한 것도 아니다.
개인적으로는 북의 의중을 전달한 것에서 나의 역할은 끝났다고 생각했고 공식이든 비공식이든 그 후의 일은 통치권자, 정책 당국자들이 알아서 할 부분이라고 여겼다.
또 베이징 방문과 관련해 “자금은 어디서 마련했나” 라는 질문을 던지는 기자도 있었는데 철저하게 내 개인 자비를 들여갔었다. 갔던 이유도 밝힌 대로 소개인 격이었을 뿐이다.
-언론의 보도 내용에서 팩트가 아닌 부분은 무엇인가.
100대 프로젝트를 북측이 제의했다고 했는데 그것은 권씨의 아이디어다. 다만 리 참사와 권씨의 공감대가 형성되면서 다른 자리에서 리 참사도 그 얘기를 꺼냈다고는 한다.
또 북한이 무조건 쌀, 비료 지원을 요구했던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6자회담 복귀를 전제로 한 것이었고 이미 남측에서도 약속한 것이었다. 한나라당이 주장하는 ‘밀사파견이 노 정부에서 나온 기획’이라는 것도 사실이 아니다.
-조선일보는 안씨가 법적 절차를 무시하고 북측 인사를 접촉했다고 보도했는데.
조선일보를 보니 ‘안씨가 북측 인사를 만나고 통일부에 신고도 하지 않은 것은 명백한 남북교류협력법 위반’이라고 썼더라. 그렇다면 나도 문제가 된다. 그런데 오늘(30일)은 또 이재정 통일부 장관이 안희정씨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했는데 그럼 나도 문제되지 않는 것 아닌가. 그것은 법 위반이기에 앞서 국가안보를 책임지는 대통령의 통치행위에 따른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