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미 제네바 합의에서 소외 초래 대북 강경론 일변도 보도 우려 조선 김 주석 사망후 강경책 돌변 박홍 전 서강대 총장 색깔론 불 당겨
1994년 김일성 북한 주석 사망 이후 북미 제네바 합의에 이르기까지 ‘북핵 위기’ 상황에서 주요 언론은 색깔론을 주도하고 북한에 대해서는 강경 대처를 주문했던 것으로 나타났다.
당시 김영삼 정부도 언론들의 입장과 마찬가지로 강경 노선으로 일관하다가 북미 제네바 합의 이후 경수로 지원비용만 냈을 뿐 아무런 구실을 하지 못했다는 문제도 제기됐다.
1994년 7월25일 예정됐던 당시 김영삼 대통령과 김일성 북한 주석의 남북정상회담까지 대부분의 언론은 조심스럽게 기대감을 나타냈다. 1993년 북한의 NPT 탈퇴 이후 긴장이 고조되던 한반도 평화에 새로운 계기가 될 수 있으리라는 국민적 공감대가 있었기 때문이다.
조선일보 김대중 주필은 7월3일자 칼럼 ‘평양에 가서’에서 김영삼 당시 대통령에게 정상회담에서 필요할 때는 단호한 태도를 보여야 한다는 등 북한에 대한 경계를 늦추지 않으면서도 “평화공존, 핵, 통일, 남북교류 등 모든 현안에 대해 상대방과 많은 대화를 나눴으면 한다”고 밝혔다.
조선일보 류근일 당시 논설실장도 9일자 칼럼 ‘한가닥 희망-통일의 공동목표’에서 “쓸데없는 이데올로기적 수사학일랑 치우고서 오로지 한마디만 나누고 합의하면 된다. ‘우리 제각기의 길을 인정하고 건드리지 맙시다’”라고 밝혔다.
9일 김 주석 사망 후부터는 새로운 국면이 전개된다. 이른바 ‘색깔론’이 제기되기 시작했다. 이는 ‘조문 파동’에서 시작됐다. 이부영 당시 민주당 의원은 7월11일 국회 외무통일위에서 “전략적 판단으로 북한 주민들의 현재 심리적 상태를 고려해서, 국민들 일각의 양해가 있다면 같은 민족으로서 조문단을 파견하겠다는 의사표시를 할 뜻이 없는가”라고 질의했다. 언론의 십자포화가 뒤따랐다.
조선일보는 12일자 사설에서 “김정일 체제의 정체성, 효율성, 정책방향 및 장악력의 정도가 분명하게 드러날 때까지는 정부와 당국자들은 제발 좀 섣부른 판단과 단정적인 말들을 하지 말았으면 한다”며 “우리가 아는 바는 그(김정일)가 세습왕조의 상속자요 KAL기 폭파의 명령권자였다는 사실 뿐이며, 철저하게 베일에 가려진 낯선 인물이란 점”이라며 경계심을 환기시켰다.
한총련 등 학생운동 단체에 대한 ‘색깔 시비’가 뒤이었다. 15일 전남대에서 북한 찬양 유인물이 발견되자 “주사파 학생들과 북한의 연계” 의혹을 제기했다. ‘학원내 주사파 실체’(조선일보 7월17일자) 등의 기사를 통해 학생운동의 이적성을 부각했다. 동아일보 7월17일자 사설 ‘국가 기강 바로 세우라’는 “김일성의 죽음을 계기로 우리 사회내부에 잠복해 있던 급진 또는 친북세력들의 실체가 드러나고 있다”며 “김일성의 죽음을 계기로 우리 사회내부에 잠복해 있던 급진 또는 친북세력들의 실체가 드러나고 있다”고 주장했다.
18일 박홍 서강대 총장이 청와대 오찬에서 “대학가 주사파의 뒤에는 사로맹이 있고, 사로맹 뒤에는 북한의 사로청, 김정일이 있다”고 주장하면서 색깔 논쟁은 더욱 가열된다. 조선일보, 동아일보는 이후 박홍 총장의 인터뷰를 실으면서 “학생운동 내 유사시 요인암살 등을 위한 테러조직이 구성돼 있다. 보안을 위해 점조직으로 구성된 이들은 폭력을 통한 프롤레타리아혁명완수를 위해 비밀훈련까지 받고 있다. 조직원을 포섭하기 위해 대학신입생들을 상대로 미인계까지 동원하고 있다” “공산당에 가입한 학생이 2백~3백명 정도 된다”는 주장을 소개했다. 경찰은 이후 박 총장의 발언을 토대로 수사를 벌였으나 별다른 결과를 얻지 못했다.
북한에서 넘어온 강명도 김일성대 강사가 “북한이 핵폭탄 5개를 만들었다고 들었다”고 말하자 주요 언론들의 목소리는 더 커졌다.
7월28일 조선일보 사설은 “우리 내부의 친북파와 기타 일부 세력은 덩달아 ‘핵전쟁 하지 않으려면 우리가 양보해야 한다’며 례의 당근론, 유화론, 맏형론, 냉전세력 운운을 또 들고나올 것이다. 이러한 사태는 이미 ‘너무 늦은 때’가 될 것이고, 그때 가서 아무리 후회한들 아무 소용이 없다”며 “정부는 항상 최악의 경우를 예상해야 하는데 그동안 김정부는 너무 ‘좋은 경우’ 만을 위주로 정책선택을 하지 않았나”고 질타했다. 국제원자력기구(IAEA)는 즉각 부인했으나 언론들은 “5개 핵보유설을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문했다. 북미대화에 나선 미국에게도 촉구했다. 조선일보는 8월5일자 사설에서 “북한 핵의혹을 남겨놓고 상호 연락사무소를 설치하며 경수로를 지원하는 것이 냉전이후 시대 새로운 질서 형성에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 우리도 북한핵에 대한 불안감을 그대로 두고 경수로 지원 사업에 돈을 댈 수는 없다”고 밝혔다. 또 북한의 마약밀매설, 인권문제 등도 제기했다.
8월12일에는 끝난 제네바 북미 3단계 고위급 회담에서 북한 핵 해결의 포괄적 틀 합의에 이르자 언론들은 “한국이 소외되는 것 아니냐”며 불안감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그러면서도 정부에게는 “북핵의 과거규명이 최종 목표”라고 계속 강조했다. 8월 북미합의 뒤 조선일보 사설은 “우리 정부가 특히 조심해야 할 것은 성급한 대북정책의 추진이다. 현재의 김정일체제는 기존의 대남정책에 변화의 모습을 보이고 있지 않다”는 입장을 보였다. 미국이 북한과 합의에 점점 다다르자 “미국이 자신의 핵 비확산이라는 세계전략적 고려 속에서 한국의 국가이익을 고려하지 않고 성급하게 북한의 외교전략에 휘말려든다면 사태는 심각한 방향으로 발전하게 될 것”(조선 9월4일자 사설)이라고 경계했다.
북한과 미국은 10월21일 그간의 회담 결과를 총괄하면서 ‘북미제네바 기본합의서’를 채택했다. 두 나라는 관계 개선을 도모하고 북한이 핵개발을 포기하는 대신에 경수로를 지원하기로 했다. 경수로 건설비용은 한국과 일본의 몫이 됐다. 북한의 NPT 복귀와 특별사찰 수용도 이뤄졌다. 동아일보는 21일자 사설에서 “북―미합의의 수용은 기정사실화된 것 같다. 또 반대를 한다 해도 이제는 늦다”라며 충격을 나타냈다.
북한 전문가들은 1993년 북한 NPT 탈퇴 이후 우리 주요 언론들은 국내에서는 사상 시비를 제기하고, 정부에 대해서는 대북강경책을 요구해왔다고 분석했다. 당시 김영삼 정부는 미국보다 더 완고한 태도로 “핵을 가진 자와는 대화할 수 없다”고 맞섰다. 이는 남북 간 대화채널이 끊기고 북한과 미국 양자 구도로 굳어지는 계기가 됐다. 결과적으로 한국은 경수로 비용만 부담하고 들러리 신세로 전락하고 말았다는 것이다.
동국대 이철기 교수(국제관계학과)는 “지금도 언론들이 대북강경론으로 일관할 경우 핵문제가 대화국면으로 진행될 때 북한은 한국을 신뢰하지 않을 것이며, 1994년과 마찬가지로 북미간 협상에서 발언권 역시 크게 줄어들게 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