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저널의 역사는 독립언론을 향한 외길이었다.
1989년 10월20일 창간호를 낸 시사저널은 1987년 6·10시민항쟁 이후 불어 닥친 민주화 바람 속에서 싹을 틔웠다. 6·10 이후 민주화 조처가 취해지면서 군사정권 시절부터 계속돼온 언론에 대한 통제가 누그러지기 시작했다.
동아일보, 조선일보, 한국일보 등 메이저 신문사가 주도하고 있던 언론시장에 진입할 수 있는 문이 열린 것이다. 이런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1988년 한겨레도 창간됐다.
1980년 신군부 등장 이후 긴 외유 길에 나섰던 박권상 전 편집인은 1989년 귀국해 해직기자 출신인 표완수(현 YTN 사장) 전 경제부장, 동아투위의 박순철 전 편집국장 등과 함께 새로운 언론의 창간을 모색하기에 이른다.
여기에 최원석 동아건설 회장의 동생이었던 최원영씨가 함께 했다. 당시 예음문화재단을 운영하면서 언론 및 문화예술분야에 관심이 많았던 그는 “한국의 테드 터너가 되겠다”는 포부를 가졌던 것으로 전해진다.
젊은 재력가와 민주 언론인들 사이에 의기투합이 이뤄진 것이다. 이들은 한국에도 ‘타임’이나 ‘뉴스위크’같은 격조 높은 시사주간지가 필요한 때라는 데 의견을 모으고 시사저널 창간에 박차를 가했다.
동아일보 및 80년대 해직기자와 각 언론사에서 뜻을 같이 하는 기자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이들이 내세운 시사저널의 정신은 ‘자본과 권력에서 자유로운, 사실과 진실만을 말하는 언론’이었다.
국내에서는 한국일보, 동아일보 등에서 사주에 의해 좌우되는 언론사의 단점을 경험했고, 오랜 외국 생활에서는 영미권의 선진 언론을 접했던 박권상 편집인은 언론의 독립성을 강조했다. 이를 위해 박 편집인은 최원영씨에게도 편집권과 경영의 분리를 강조했다. 그 역시 이를 흔쾌히 수용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는 시사저널의 전통으로 굳어져갔다.
이런 정신에서 태어난 시사저널은 새로운 언론문화를 일궈나가는데 앞장섰다. 촌지 근절 운동이나 인터뷰이에게 인터뷰료를 지급하도록 했던 조치, 연말이면 기자들이 취재원에게 선물을 보내도록 자금을 지급했던 일 등은 그 당시 한국적인 언론 현실에서 유별나게 취급되기도 했다.
주간조선, 주간한국에 의해 양분됐으나 신문에 가려 독자적인 영역을 찾지 못했던 주간지 시장에서 최초 전면 컬러 시사주간지 시사저널은 새 바람을 몰고 왔다. 스티븐 호킹 박사, 빌리 브란트 전 서독 총리, 잠롱 방콕 시장 초청 인터뷰 등의 기획도 큰 반향을 얻었다. 초기 투자도 정력적으로 이뤄졌다. 그 결과 창간 2년 만에 정기구독 부수 10만부를 돌파했다. 이는 이후 최고 14만부까지 늘어났다. 시사주간지 시장이 커지면서 한겨레21이 창간됐다. 기존 주간지들도 뒤늦게 새 단장에 들어갔다.
이후 수많은 특종으로 순항을 거듭하던 시사저널은 1998년 3월 모 회사인 국제언론문화사가 부도를 당하면서 큰 고비를 맞게 된다. 당시 IMF 사태로 동아그룹이 몰락하자 최원영 회장마저 기울게 된 것이다. 자매지였던 TV저널, 여성잡지 에버는 이때 문을 닫았다.
시사저널의 고난이 시작됐다. 월급도 절반 이상 줄었다. 생계의 어려움에 부닥친 일부 기자들은 하나둘 눈물을 머금고 회사를 떠났다. 하지만 남은 기자들은 서로 어깨를 다독였다. 선배 기자들은 갹출해 편집국 복사기를 마련했다. 어려운 사정 속에서도 한 호도 거르지 않았다. 박성섭 전 덕산그룹 회장이 인수 계약을 맺고도 대금을 지불하지 않아 물러나는 등 우여곡절도 겪었다. 결국 1999년 10월 시사저널은 서울문화사에 인수됐다. 인수 이후 발행인과 편집인을 겸임하던 심상기 회장은 2003년 4월 중앙일보, 대학 후배인 금창태 사장을 영입했다.
시사저널의 한 기자는 “부도를 당하고도 회생한 언론은 시사저널 밖에 없다”고 말했다. 처음부터 경영과 편집이 분리돼 자율 운영을 이뤄온 시사저널은 경영 붕괴 상태에서도 편집국이 제자리를 지킬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는 “시사저널 기자들은 자기 매체에 대한 자부심과 애정이 남다르다”며 “그 힘이 온갖 험난한 위기를 이겨내고 시사저널의 오늘을 있게 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