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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시작전통제권 환수 반대 시국선언을 대대적으로 조명하고 있는 일부 언론들이 군사정권 시절 시국선언 보도에는 인색했던 것으로 나타났다. 사진은 1976년 3·1구국선언과 1987년 6월 당시의 동아일보, 중앙일보의 지면. | ||
지난 4월 동아일보 송대근 논설위원이 쓴 칼럼 ‘횡설수설’에서는 우리나라 현대사에서 주요한 시국선언 3개를 꼽았다. 4·19혁명을 성공으로 이끈 1960년 4월25일 교수 시국선언, 1976년 3월1일 명동성당 구국선언, 1987년 6월 항쟁 시기 각계의 시국선언 등이다.
4·19 당시 동아일보는 4·25 교수 시국선언을 1면 기사로, 조선일보는 3면에 소개했다.
그러나 유신정권 시절 함석헌·윤보선·정일형·김대중씨 등이 주도한 3·1 구국선언은 동아·조선·중앙 모두 보도하지 않았다. 당시 3월2일자 조선일보 1면 머리는 박정희 대통령의 3·1절 기념식사를 소개한 ‘3·1정신, 중흥의 차원으로’라는 기사였다. 석간이었던 중앙, 동아 역시 3·1절 행사를 1면 머리로 보도했다. 2일자에도 이와 관련된 보도는 없었다. 이후 이 선언 관련자들은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옥고를 치렀다. 이들의 요구는 긴급조치 철폐, 의회정치의 회복과 사법권 독립 등이었다.
1980년 5월15일 계엄철폐와 신군부 반대를 주장했던 1백34인 지식인 선언 역시 보도되지 않았다. 당시 동아·조선·중앙 주요 신문들은 학생 시위에 대한 정부의 방침을 집중적으로 소개하면서, 시위대의 해산을 촉구했다.
1987년 6월의 시국선언은 각 지역, 각 직업군 별로 다양하게 펼쳐졌으나 세 신문은 대부분 1단 기사로 취급했다. 당시 중앙일보 15일자에 1단으로 소개된 보도에 따르면 4·13 조치 철회를 요구하는 각계의 시국성명에는 4월22일 이후 6월14일까지 4천3백41명이 참여했다.
당시의 보도는 군부독재 정권의 강력한 언론 통제 탓에 어쩔 수 없었다고 보는 의견도 있다. 그러나 최근 시국선언에 대한 주요 신문들의 집중 보도는 과거에 대한 반성 및 성찰 부족의 결과라는 지적이다. 저널리즘의 원칙에서 벗어난 정략적 보도라는 비판도 있다.
최근 발표되는 각종 시국선언과 성명은 1987년 6월 이후 언로가 개방된 데 따른 결과이며, 그에 따라 정확한 사실에 기반하기보다는 감성에 이끌려 이뤄지는 경우가 많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주요 신문들은 이런 일방적 주장을 자신들의 정치적 목적에 따라 극단적으로 키우는 등 재활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대구가톨릭대 최경진 교수(언론광고학부)는 “과거 언로가 막힌 현실에서 나온 시국선언을 주요신문들이 외면한 것을 지금 엄정히 평가하긴 힘들더라도, 최소한 성찰이 있다면 요즘 같은 시국선언 보도의 문제는 없을 것”이라며 “시국선언 등에서 나타나는 일방적인 주장을 자사 이데올로기에 맞는다고 대대적으로 보도하기 보다는 사회적 갈등을 공정한 토론을 통해 해결할 수 있도록 하는 언론의 공공성이 아쉽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