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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출발 사흘만에 평양 도착, 회담후 감시 피해 먼저 돌아와

48년 '남북연석회의' 취재한 이동수 동아꿈나무재단 이사장

김창남 기자  2006.08.30 14:0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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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8년 평양에서 열린 ‘남북연석회의’를 취재한 이동수 당시 조선일보 기자와 이를 가장 먼저 보도한 1948년 4월 29일자 조선일보.  
 
본보는 지난 1948년 ‘남북 제정당 사회단체 대표자 연석회의’(이하 연석회의)를 취재한 동아꿈나무재단 이동수 이사장(84·당시 조선일보 사회부 기자)을 전화인터뷰를 통해 당시 상황을 들어봤다. 그는 당시 수습을 갓 뗀 기자로, 조선일보 ‘평양회담 현지보고’라는 특종기사를 썼다.

-1948년 4월 19일 평양에서 열린 ‘연석회의’ 취재 당시를 회상한다면.
조선일보 사회부 최성복(차장)기자와 함께 수습을 갓 뗀 나는 김찬승 사회부장의 지시에 따라 김구 일행을 취재하기 위해 평양을 방북했다. 교통편의 문제로 서울을 떠난 지 사흘 만인 23일 도착했지만 남북협상 마지막 날이었기 때문에 이전 회담 내용은 그쪽 신문과 사람들로부터 간접 취재를 할 수밖에 없었다.

-취재 성과는 어떠했는가.
남북협상 본회의 일정이 끝나자 북한은 남한에서 온 기자들에게 산업시찰을 시켰지만 난 기사와 자료를 든 가방을 들고 서울로 향했다. 이 과정은 한마디로 목숨을 건 모험이었다. 평양을 떠난 지 하루에만 난 서울에 도착해서 4월 29일자 조선일보 1면에 ‘평양회담 현지보고’란 스트레이트 기사와 2면 해설 기사를 썼다. 이 때문에 다른 기자들에 비해 특종을 쓸 수 있었다.

-당시 취재를 하면서 가장 아쉬웠던 점은.
지금도 비슷하지만 남북 회담이 열리면 기자들은 취재를 위해 정치인들을 쫓아가는 꼴이었다. 당시도 남북 단독 정부를 논의하기 위한 정치들의 연석회담이 열렸지만 기자들은 이를 취재만 했다. 간간히 회담장 주변에서 남북 기자들끼리 만나 환담했었다.

-남북언론인 토론회가 연내 개최하기로 합의했는데 어떤 점에 주안을 둬야 하는가.
해방 이후 언론인 간 교류는 전무했다. 무엇보다 언론인들의 교류를 활성화하기 위해선 정식 합의가 필요하다. 이를 통해 회의 등을 연례화해 자주 만나는 것이 중요하다. 물론 기자들이 만난다고 해서 짧은 시일 내에 좋은 결과가 나오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여러 차례 만남을 통해 상호 간 인식과 이해를 넓히는 것이 중요하다.

이 이사장은 연희전문 재학 중 조선일보 수습기자로 입사한 뒤 동아일보로 자리를 옮겨 편집부국장, 수석해설위원, 동아방송 국장, 상무이사 등을 역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