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5년 전조선기자대회 ‘처음’…48년 남북연석회의 ‘마지막’

▲ 1948년 남북제정당사회단체연석회의에 남조선기자단 대표로 참여했던 정진석의 묘비. 그는 북한 애국열사릉에 묻혀있다. <김광운 국사편찬위원회 위원 제공>
한반도 기자들의 전국적 교류는 일제 시대에는 탄압으로. 해방 이후에는 이념의 차이로 우여곡절을 겪었다. 이후 분단이 되면서 이 땅의 기자들도 허리가 잘려진 셈이 됐다.
일제 언론탄압 저항이 기자대회로
우리나라의 첫 전국적 대규모의 기자대회는 1925년 4월15일부터 사흘 동안 서울 종로 천도교기념관에서 열린 ‘전조선기자대회’였다.
당시는 일제의 민족언론에 대한 억압이 극심하던 때였다. 신문지법, 출판법, 보안법, 치안유지법 등을 통해 사전·사후 규제를 벌여 탄압을 강화했다. 이에 일반 기자들은 무명회(1921), 철필구락부(1924), 조선전위기자동맹(1927) 등 기자단체를 조직해 일제에 저항하기 시작했다. 1925년 전조선기자대회는 이런 기자들의 노력이 정점에 이른 결실이었다.
이 대회에는 조선·동아 등 서울 및 지방 기자들 포함 6백여명이 참여했다.
‘죽어가는 조선을 붓으로 그려보자! 거듭나는 조선을 붓으로 채질하자!’가 대회의 구호였다.
의장에는 조선일보 이상재 사장, 부의장에는 조선일보 안재홍 이사가 선출됐다.
대회는 5개항의 ‘전조선기자대회 결의문’을 채택해 언론권위 신장, 현행 신문 및 출판법에 대한 개신(改新), 언론집회 결사의 자유를 구속하는 법규 철폐 등을 요구했다.
이 대회는 서울시내 각사 사회부 기자들을 중심으로 조직된 철필구락부와 ‘화요회’ 등 조선일보 사회주의 계열의 지방 주재 기자들이 주도했다.
이에 따라 좌파의 공산당 건설에 이용당한 대회라는 비판과 사회주의자들이 적극적이었던 것은 사실이나 한 정파의 이익에 쏠리기보다는 민족협동단일전선인 신간회의 모태를 이뤘다는 후대의 평가가 엇갈리고 있다.
사회주의 색채 짙어지기 시작
두 번째 전조선기자대회는 해방 후인 1945년 10월 23, 24일 서울 기독교청년회관에서 열렸다. 이 대회에는 전국 24개사 2백50명의 기자들이 참석했다. 대회는 조선통신사 이종모의 사회로 양재하(신조선보)의 개회사, 김진기(해방통신)의 경과보고, 위원장의 조선신문기자회 결성 선언 순으로 진행됐다. 정진석(자유신문)이 강령 규약을 발표한 다음 좌익계 신문이었던 조선인민보 사장 김정도의 선언문 낭독이 있었다.
‘민족의 완전독립을 기한다’ ‘언론자유의 확보를 기한다’는 두 개 강령을 채택하고 조선인민공화국 지지를 결의하는 등 사회주의적 색채가 짙었다. 그러나 아직 좌우대립은 표면화되지 않았다.
이 행사에는 인민공화국 중앙인민위원회 허헌, 조선공산당 김삼용, 이승만, 여운형, 미군정 장관 아놀드 소장 등 좌우를 망라한 당시 정치계의 유력한 인사들이 참여했다. 이승만의 연설은 서울방송에 의해 전국에 생중계되기도 했다.
이 대회 중인 23일 조선신문기자회가 결성됐다. 초대 위원장은 이종모였다. 이 단체는 이듬해 미소공동위원회에 적극 협력을 천명하는 등 좌익노선을 지지했다. 이후 사회적으로 좌우 대립이 격화되면서 언론도 분열되기 시작했다. 12월에는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채택한 신탁통치안을 두고 좌익과 우익의 투쟁이 본격화되기 시작했다. 조선인민보 인쇄공장이 습격당했다. 동아일보 사장을 지낸 송진우가 암살되기도 했다.
이듬해 4월28일 조선신문기자회의 주도로 명동 천주교문화관에서 해방 이후 두번째 전조선기자대회가 열렸다. 연합군에 ‘우호친선과 신의를 중상하는 반동신문 폐간’을 요구하고 조선인민보의 군정재판 회부 대책을 강구했다. 새 위원장단도 선출됐다. 위원장단은 문동표(조선일보), 양재하(한성일보), 정진석(자유신문), 김기림(공립통신), 이상호(노력인민)였다. 이들은 진보적 민주주의를 표방하면서 좌익을 지지했다. 이런 흐름에 맞서 8월10일에는 동아일보 중심으로 조선신문기자협회가 창립됐다.
정진석 기자, 취재후 북측에 남아
이후 치열한 이념 대립 속에 전국 규모의 기자대회는 개최되지 못했다.
1948년 남북 제정당 사회단체 연석회의(이하 연석회의)가 사실상 마지막이었다. 당시 민족적인 기대와 남북과 이념을 떠난 전국 언론들의 취재열기 속에 남북 기자들의 비공식적인 만남이 이뤄졌다. 남쪽의 기자들은 자유신문의 정진석을 기자단 대표로 해 취재를 벌였다. 1945년 미소공위 때도 남북 기자 공동취재가 이뤄진 적은 있었으나 규모상 연석회의 당시가 가장 컸다. 한편 기자단 대표였던 정진석은 연석회의 취재 뒤 북쪽에 남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는 이후 김일성대 교수, 철학연구소 소장 등을 지냈으며 1968년 사망 뒤 북한 애국열사릉에 묻혀있다. 남쪽 출신의 기자가 이 묘지에 묻혀있는 것은 그가 유일하다.
남북연석회의는 분단 이전 마지막으로 전국의 기자들이 모였던 자리였던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백범 김구가 남북 단정에 반대해 주도한 이 회담에서 공동성명서가 채택됐으나 결국 한반도는 둘로 나뉘어졌다.
1950년 한국전쟁 직전인 6월11일 북측 대표와 조국전선신문의 김재창 기자가 평화제의호소문을 갖고 서울을 방문하려 했으나 38선을 넘자마자 압송, 처형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 뒤 전쟁을 거치면서 남북기자 사이의 교류는 오랜 세월 얼어붙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