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일로 창사 52주년을 맞은 한국일보는 1954년 창간 이래 90년대 초까지 신문업계에서 항상 선두그룹에 속했다.
‘기자사관학교’라는 명성은 한국일보의 자랑이었다. 창간과 함께 최초로 견습기자 6명을 선발하면서 언론사 공채 제도의 효시를 이뤘다. 한국일보에서는 선배를 ‘형’이라고 부른다. 이같은 선후배 간의 끈끈한 정과 책임감으로 나타나는 독특한 사풍은 우수한 기자들을 양산하는 밑거름이 됐다고 한국일보 출신 기자들은 입을 모은다.
1977년 창업자인 장기영 전 회장이 별세했으나 83년에는 당시 언론사 사상 최대인 발행부수 1백60만부를 돌파하는 등 ‘일등신문’의 자리를 지켰다.
1980년만 해도 한국일보는 매출액 규모에서 2백17억원을 기록, 동아일보(2백65억원) 다음이었다. 조간신문 가운데서는 1위였다.
5공화국 이후 사정이 달라졌다. 조선일보가 급성장하기 시작한 것이다. 1988년 신문사 매출액 규모는 조선일보(9백14억원) 동아일보(8백85억원) 한국일보(7백13억원) 순으로 바뀌었다.
선두로서 지위가 흔들리기 시작한 한국일보는 1989년 월요일자 발행을 단행하면서 본격적인 공세에 나섰다.
1991년에는 30년 만에 석간을 부활시켜 조·석간 동시 발행체제를 갖췄다. 1993년에는 동아일보가, 95년에는 중앙일보가 조간으로 전환하면서 경쟁은 더욱 불붙었다.
무리한 경쟁 속에서 회사 경영은 곪아갔다. 1996년 한국일보의 부채비율은 1564.0%를 기록했다. 이 과정에서 IMF 사태까지 맞았다. 1991년 1천2백88억원이던 부채는 1999년 5천5백90억원으로 급증했다. 중앙일간지 가운데 가장 높은 수치였다. 회사는 더욱 기울었다.
1999년 우리은행 등 채권기관들은 결국 경영권은 보장하지만 일정 기간 동안 부도 처리를 유예하는 ‘사적 화의’를 결정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월간 ‘말’지는 장재국 전 회장이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9백만 달러에 이르는 거액 도박을 벌였다는 의혹을 제기했다.
안팎의 퇴진 요구를 받던 장재국 전 회장은 2002년 주주총회를 통해 물러나고 구속됐으며, 장재구 회장이 취임했다.
2002년 6월 채권단과 맺은 기업재무구조개선약정(MOU)을 통해 5백억 증자를 약속한 장재구 회장은 진통 끝에 지난해 6월 증자를 완료하고 2선 후퇴의 뜻을 밝혔다.
증자 완료 뒤 한국일보는 조직 개편과 지면 혁신을 벌이는 등 회생의 몸부림을 치고 있다.
‘일등 신문’으로 불리던 한국일보가 쇠락의 길을 걷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언론계에서는 90년 이후 조·석간 동시 발행 등 동아 조선 중앙과의 무리한 경쟁과 함께 장강재 전 회장 별세 후 방만한 경영과 장씨 가족의 경영권 다툼도 한국일보의 부실화를 부추겼다고 보고 있다.
2000년, 44년 동안 한국일보에 근무했던 김성우 전 파리총국장이 회사를 그만 두면서 발표한 ‘한국일보를 떠나면서’라는 성명은 이를 압축적으로 말해준다.
그는 “한국일보가 쇠하기 시작한 것은 바로 공기인 신문사를 사물시한 경영 때문…주주들은 신문을 살릴 생각은 하지 않고 권력 싸움으로 사운을 소진시켰다…경영진은 확고한 언론관도 없이 종이장사처럼 신문사를 운영해왔다”라고 비판했다.
주식의 90% 이상을 차지했던 장씨 가족이 한국일보에서 빌려 쓴 단기주주대여금은 2005년 12월 현재까지도 1백95억원에 달한다.
장기영 전 회장의 4형제는 장남 장강재 전 회장의 사후 서울경제신문, 일간스포츠, 미주한국일보 등 계열사를 나눠 맡았으나 회사는 계속 어려움에 빠졌다. 일간스포츠는 지난해 한국일보가 보유 주식을 전량 매각하면서 완전히 분리되기에 이르렀다.
유대 관계가 튼튼하기로 유명했던 한국일보 특유의 사풍도 경영권 혼란 속에 흔들렸다.
90년 중반부터 한국일보에 근무했던 한 기자는 “장강재 전 회장 사망 뒤 장재국, 장재구 회장, 사실상 후계자로 꼽혔던 장중호 사장 등 경영권을 놓고 여러 사람이 번갈아 부상하면서 사람들이 이리저리 줄을 섰고 그에 따른 편집과 인사가 횡행했다”며 “이것이 한국일보가 부실화된 중요한 원인”이라고 말했다.
장우성 기자 jean@journalist.or.kr
이대혁 기자 daebal94@journalist.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