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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설의 江'건너 '설득의 땅'으로

송년 제언-기자사회를 돌아본다 >2<

편집위원회  2005.11.30 09:5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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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칼럼 ‘절망’과 ‘낙담’ 횡행


신문들이여, 국민을 기쁘게 하자!




온통 날카롭다. 뾰쪽한 글로 벼린 날이 서슬 푸르다. 한국 신문 지상의 사설란과 칼럼코너가 전쟁터로 변한지 수 년째다. 글께나 쓴다는 기자 논객들은 자나깨나 권력의 흉중을 향해 융단폭격에 십자포화를 날린다. 아침 식탁의 벗 신문에서 글의 향기는 사라지고 저주의 글발만 성성하다.



한국 신문시장의 메이저군단들은 악순환의 고리에 단단히 매인 것처럼 독설시리즈를 그칠 줄 모른다. 모두가 청와대만을 공격하는 저격수이다. 온통 청와대만을 조져댄다. 노무현 권부만을 시시콜콜히 해부한다. 전체 시대담론이 그저 현 집권세력 몰아쳐 꾸짖는 것에 집중되어 있다. 그 바람에 한국의 논단과 논의구조는 황폐화되고 을씨년스럽다.



언제부터인지 대표적 신문들의 신문 사설이 초라해졌다. 독자들에게 사설이 화제로 오르지 못한다. 9백자 짜리 사설 3꼭지세트를 젊은 독자들은 아예 쳐다보지도 않는다. 수용자에게 사설은 그저 제목으로만 일별되는 도외시의 영역이다. 멀티미디어 다매체시대 ‘신문의 꽃’ 사설과 칼럼란은 오히려 신문 상품만의 최고 경쟁력 요소로 떠올라야 하는데 실제는 정반대다. 반세기전 우리 사회 곳곳에 계몽의 빛이 와 닿아야 할 때 사설과 칼럼은 ‘한국의 등대’였다. 독재의 억압적 권위주의가 발호 할 때 사설은 한줄기 양심의 가느다란 소리였다. 민주주의가 휘청거리는 경향각지에서 그 여린 음향의 의미를 곱씹어보았다. 신문의 향기를 기억하는 독자들이 사설을 ‘신문의 심장’으로 여기는 근거이다.



민주와 자율이 어느덧 사회시스템으로 자리 잡은 요즘, 정치사설은 그 권위의 빛이 바랬다. 신문사 안팎의 유명 논객들이 쓴다는 칼럼은 온통 정치적 수사를 곁들인 정권 조지기를 목표로 중언부언하고 있다. 해당 신문사의 입맛과 타협한 글쟁이들은 결론이 뻔한 그 논조를 오늘도 반복하고 있다. 그리하여 한국의 아침 글밭은 다양성을 잃어버리고 있다. 지면의 시렁 위에 얹혀져있지만 그 식상함으로 시선을 끌지 못하고 있다.



사회시스템은 복잡해졌다. 권력은 분권화로 치닫고 있다. 거들먹거리며 무게 잡던 그 정치권력들은 스스로 권위주의의 갑옷을 벗고 있다. 한반도를 휘감던 이념적 가치체계는 다변화하고 있다. 건들지 못하는 담론 성역은 사라졌다. 시민들의 일상은 풍요로워졌고 생활세계는 효율과 합리주의로 방향을 잡았다. 외골수 민중민주주의와 평등지향적 개혁브랜드는 이미 낡은 것으로 낙인찍혀 사상의 시장선 유효기간 만료로 치부된다. 전체주의와 타협하지 않는 열린사회의 기틀은 하나하나 뿌리내리고 있다. 뉴 라이트도 나왔으니 뉴 레프트도 나올 것이다.



한데 신문의 글 밭은 여전히 절망만 처절하고 현실의 낙담만 횡행한다. 그 사설과 칼럼의 결론은 정권 비판으로 끝난다. 모든 사례와 인용이 결국은 정권 비틀기 기법으로 귀결된다. 참으로 식상하다. 과연 우리 한국호의 앞날에 절망할 일이 그리도 많은가. 과연 5년짜리 정권 하나 잘못만나 나라가 절망의 구렁텅이로 빠져드는가. 소외된 사각지대의 음지를 배려하는 사회복지망을 거론하면 좌파정권의 퍼주기 예산낭비인가.



우린 믿기 지 않을 만큼 압축적 경제성장을 이룩했고 시민사회는 가슴 벅찬 민주화를 성취했다. 한반도의 남쪽은 전 세계 정보통신혁명의 핵심 시험장으로 주목받고 있다. 민주주의 투명성은 성큼 다가오고 있다. 유사이래 이처럼 표현의 자유를 구가한 적이 있었던가. 신문자본이 이제 스스로 눈치 볼 것은 거대자본의 ‘심기’뿐이지 않는가.



정권은 짧다. 정파들은 탄력적이다. 권부의 무능함은 절차적으로 계도하고 타이르면 된다. 국민이 거중조정할 것이다. 국민이 코디네이터가 될 것이다. 그러하니 신문이여, 국민을 기쁘게 하자. 아침의 상쾌함을 망치지 말자. 대안을 갖춘 설득의 논리로 출근길을 가뿐하게 하자.



다시 진득한 문리(文理)로 돌아갈 필요가 있다. 과도한 저주와 독설과 비아냥을 거둘 때도 되지 않았나. 정치의 영역에만 머무는 비판의 포격은 사설과 칼럼이 무너지는 최악의 자충수였다. 칼은 칼집에 머물 때 가장 무겁고 무섭다. 증오의 전염만 판치는 지면은 결국 독자들을 떠나게 한다. 이제 수용자들이 권력을 별로 주목하지 않는다. 주목하지 않는 곳을 주목하는 신문의 외길은 위험하다. 그저 쪼아대는 칼럼만 넘칠 때 신문은 위태롭다. 비트는 데도 유연할 필요가 있으며 문자향을 가져야 한다. 한국의 저널리스트들은 글을 부리고 논리를 부릴 때마다 가슴에 손을 얹으며 진지해질 필요가 있다. 우리는 진정한 시대의 소통을 원하는가. 맹목적 비판으로 치장한 현학을 원하는가.



한국의 저널리즘은 지나친 적대주의를 거둘 필요가 있다. 우리가 편을 갈라 영원히 아방과 타방으로 으르렁거릴 사이인가. 이념적 DNA구조가 그리도 현격한가. 조금만 파헤치면 오십보백보다.



참으로 단일한 정보네트워크로 짜여진 한국사회다. 긴장과 활력으로 탄탄한 한국 커뮤니티다. 절망보다 격려의 메시지로 글의 힘을 세울 필요가 있다. 조정과 타협으로 방법론을 얘기할 국면이다. 탈정치로 소모적 주의주장을 잠재울 때가 왔다. 바야흐로 아기자기한 생활담론으로 글발의 시장을 풍요롭게 하는 신문이 앞서갈 것이다. 전방위로 대안을 제시하고 설득커뮤니케이션을 기조로 하는 신문이 모든 계층에게 지지를 받을 것이다. 그 신문의 앞날, 그 신문이 결정한다.